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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ssy Sep 13. 2022

시아버지 덕분에 원 없이 불러본 이름 아. 버. 지.

나는 아버지가 정확히 언제 돌아가셨는지 모른다. 알려고 들었으면 알았을 텐데 네 살 때나 다섯 살 무렵 돌아가셨고 기억이 전혀 없기에 일, 이년 차이를 확인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학교 들어가기 전엔 아버지의 부재를 잘 못 느꼈다. 그냥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돌아가신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원래 안 셨고 아버지의 병수발로 인해 빚더미에 앉게 된 엄마는 늘 일하러 다니느라 바쁘셨다. 뭐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국민학교 5학년 때 친구 집에 놀러 갔다. 그 친구가 아주 부자라는 건 그 집에 가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친구 집에는 없는 게 없었고 정말 별천지처럼 보였다. 게다가 하나 더 너무 다정한 아. 버. 지. 가 계셨다. 여태껏 보아왔던 이웃 술주정뱅이 아버지들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다정하게 딸의 이름을 불러주며 하교한 딸과 친구를 반겨주던 그때 그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리고 가족을 위해 집 밖 베란다 한켠 의자에 앉아 담배를 태우시던 모습마저도 너무 다정해 보였다. 그때 처음으로 <나도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친구네 오빠도 너무 다정했다. 나한테 유독 더 잘해줬던 것 같다. 고마웠다. 속으로 생각했다. < 가정의 분위기가 이렇게 평화로울 수 있구나 >. 친구는 나를 자기 집으로 자주 불렀고 나도 놀러 가면 따뜻한 가족과 다양한 체험과 귀한 음식들을 맛볼 수 있어 참 좋았다.


나는 언니가 결혼하기 전까진 언니와 둘이 한방에서 함께 잤다. 내가 <아빠>란 단어가 얼마나 소리 내어 불러보고 싶었는지 그날 밤 잠자리에서 언니가 옆에 누워 있는데 잠꼬대처럼 진짜 불러보고야 말았다. 마치 꿈속에서 아빠를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아빠. 아빠. 아빠.." 언니는 내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곁에 누운 채 두 팔로 나를 꼬옥 안아주었다. 그때 어린 나를 보며 언니는 울지 않았을까 싶다. 이게 내가 기억하는 결혼 전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리 내어 불러본 <아빠>란 단어다.


결혼을 하고 남편의 본가가 있는 시골로 갔다. 그때의 다정했던 친구 아버지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지만 여느 고부관계처럼 늘 눈치 주고 미워하는 시어머니로부터 방패막이가 되어주신 아버님을 만났다. 늘 내편이 되어주셨고 나를 참 좋아해 주셨다. 늘 소리 지르고 화가 나 계신 시어머니를 생각하면 시댁 <ㅅ> 자만 봐도 우울증세가 도졌지만 다정하게 나를 맞아주시고 따뜻하게 대해 주시는 아버님을 생각하면 또 좋았다.


내 평생 불러보지 못한 <아버지>란 이름을 원 없이 부를 수 있게 허락해주신 분이라 나에겐 친정아버지를 만난 듯 좋았다. 시아버지로 인해 그동안 불러보지 못한 호칭에 대한 그리움과 소망을 다 이루었고 사랑도 넘치게 받았다. 그리고 작은 아이를 임신한 그 해 갑자기 혈전으로 돌아가셨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돌아가신 분의 몸을 처음 만져봤다. 임신한 상태라 시댁 친인척들의 의견이 분분했지만 그래도 자식이니 함께 하는 게 맞다 했고,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돌아가신 분의 냉동된 차가운 다리를 직접 손으로 만지게 되었다. 얼음같이 차가워진 아버님의 몸을 만지고 너무 놀라 쇼크가 올 것 같았다. 그리고 화장되는 불 소리가 무섭게 이글거리며 그 모든 공간을 가득 채웠다. 복중에 새로이 탄생할 아이를 지닌 채 또 다른 한 생명과 작별하는 그 순간은 말로 표현하기 참으로 힘든 고통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시골로 돌아갔다. 그 날밤 나는 방에서 쉽게 잠들지 못하고 끝끝내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다. 그게 나에게 아버지란 이름을 부르게 해 주신 분과의 이별에서 오는 큰 슬픔 때문인지, 얼어버린 신체를 직접 만진 충격에서 온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 무섭게 소리 내며 타오르는 화장터의 불 소리 때문인지 아직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 후 충격이 너무 컸던지 복중 아이는 한 달 동안 성장을 멈추었지만 정기검진 때 의사의 강력한 경고로 다시 제대로 식사를 하기 시작하면서 건강하게 잘 태어날 수 있었다.


시어머니는 막 태어난 아이를 보러 병원에 오셨고

"니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작은 애한테 딸이든 아들이든 아무 소리 하지 마라> 고 하시더라"

면서 큰 아이를 보며 터를 잘 못 팔아 또 딸이라며 타박 아닌 타박을 하신다. 아버님의 유언 아닌 유언대로 나한테는 아무 말 않고 큰아이 탓을 하기로 하신 건지 참 씁쓸했다.


지금도 사진으로 밖에 볼 수 없었던 친아버지에 대한 그리움보단 아. 버. 지 란 귀한 이름을 나도 불러볼 수 있게 허락해주신 시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더 크다.

사랑합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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