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 관측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열대의 밤을 선생님은 어떻게 보내셨는지…… 걱정스러웠습니다.
하지만 그 지독한 열기의 와중에도 제가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식을 선생님으로부터 전해 들었지요. 참으로 축하하고 또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사모님께서 새 생명을 잉태하셨다는 소식은 그 자체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연은 늘 어김없이 때가 되면 태양의 고도를 낮추거나 높이며 지구의 생명력을 조절해 온 것처럼 인간 역시도 앞뒤가 꽉 막힌 듯한 절망의 순간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품어 안으며 다시 일어서려 했던 역사를 끊임없이 써내려 왔습니다.
이제 선생님도 그 역사의 새 주인공이 되셨어요. 그리고 ‘아빠’로서의 신비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만약 한국에 있었다면 선생님이 계신 고양시까지 달려가 축하의 자리를 마련했을 텐데…… 이렇게 멀리 있어 들뜬 제 마음만 편지에 가득 담아 보냅니다.
권위주의
지금 써 내려가는 이 편지로 선생님과 제가 주고받은 서신의 횟수가 벌써 7차례에 접어들었어요. 그간의 편지들을 통해서 선생님께서 왜 그토록 끈질기게 교직 전반의 권위주의 문화에 몰입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지난 답장을 읽고 교사들의 학생 지도 방식과 개별 교실에 뿌리 깊게 자리한 전체주의 문화(튀는 걸 곱게 보지 않는 시선)에도 도도하게 흐르고 있는 권위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도 절실히 느낄 수 있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이 교감 선생님의 뺨을 때린 사건을 집요하게 꿰뚫어 가는 선생님의 시선은 저에겐 아름답게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권위주의에 기대지 않고서 문제 행동 학생을 지도하기 위해 견지해야 할 실질적인 자세와 관련 법에 의거한 ‘정당한 학생생활지도’의 전형을 제시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더불어 서이초 사건 이후 개정된 관련 법률과 현재 진행 중인 백승아 의원의 ‘서이초 특별법’에 관한 부분들은 우리 교사들이 반드시 숙지해야 하고, 법률안이 통과될 때까지 깊은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중요한 사안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물론 교감 선생님의 뺨을 때린 3학년 아이를 물리적으로 제지하는 장면에서는 교사들 사이의 다양한 입장에 따라서 여러 가지 관점으로 생각해 볼 여지는 있을 듯해요. 법률이 보장하는 안전장치가 아직 완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뺨을 때리는 아이의 두 손을 그렇게까지 붙잡으려고 나서는 교사가 있을지 의문스럽기도 하고요. 저라면 당연히 법률이 보장하든 하지 않든 그 아이의 팔을 잡아 제지했을 테지만요. 선생님 말씀대로 타인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는 폭력은 그 어떤 이유에서든 받아들여서는 안 되니까요.
하지만 이런 저 역시도 아이들에게 큰 소리로 호통을 치거나 학생의 문제 행동을 멈추기 위해 물리적인 접촉이 발생하는 날에는 밤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저는 아직도 권위주의적 방식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어 선생님 앞에 서기가 부끄럽습니다) 선생님의 답장 마지막에 언급하신 대로 문제 행동 학생의 뿌리는 온전히 그대로 가정의 문제이고 나아가 우리 사회의 문제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어른들의 잘못으로 아이들이 흔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에 구멍이 난 것처럼 생기가 빠져나가는 기분에 젖어듭니다. 선생님도 이제 아이를 낳게 되면 이 기분을 절절히 느끼게 되실 테지요.
그래서 저는 이 아이들에게 제 모든 관심을 집중하고 있어요. 제가 생각할 때 저의 남은 교직의 역할이 만일 있다면 ‘이 아이들을 어떻게 희망의 길로 손잡아 이끌 것인가’입니다. 이것과 관련된 내용은 조금 뒤에 더 자세히 써 보도록 할게요.
화술
선생님도 아시듯이 저는 ‘전국교사연극모임’에서 주관하는 교사 연극 연수에 10년 넘도록 참여해 왔어요. 그 인연으로 제가 사는 지역에 있는 전문 극단에 객원 배우로 참여해 대한민국 연극제 본선에서 대극장 무대에 서는 소중한 경험을 가져보기도 했지요.
그런데 연극이 종합 예술로서 학생들의 창의력 및 상상력을 발달시키고, 협동 활동을 통해서 의사소통 능력을 기르는 효과적인 교육활동이라는 것 말고도 저를 완전히 사로잡았던 부분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연극배우들에게 아주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는 ‘화술’입니다.
대한민국 연극제 본선에 올랐던 작품 안에서 주제를 대변하는 인물이 물질에 눈이 먼 등장인물들에게 근엄하게 누르는 대사를 쳐야 하는데, 계속 화를 내면서 대사를 쳐서 당시 극단의 예술 감독님이셨던 이원기 교수님으로부터 자꾸만 지적받았어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당시 청운대 방송 연기과 학과장님이셨던 이원기 교수님은 저의 중대 문창과 시절 희곡론을 강의하셨던 강사님이셨어요.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 새로운 장소에서 다시 뵙게 되어 얼마나 반갑고 놀랐는지 몰라요. 정말 죄짓고는 못 사는 세상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배우는 철저한 대본 분석과 대사 분석을 통해 상황에 가장 적확한 대사를 쳐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대사를 정말 잘 들어야만 해요. 내 대사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대사를 잘 들어야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상대의 상태를 정확히 인식해서 상황에 맞는 적확한 느낌의 대사를 내뱉을 수 있습니다.”
아, 그때 저는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느낌을 받았답니다. 그 당시는 제가 한 반에 10명도 채 되지 않는 면 단위 작은 학교에서 한 반에 30명이 넘는 읍내 큰 학교로 옮겨와 연일 샤우팅으로 목에서 쇳소리가 났던 시절이었어요. 매일 아이들에게 화만 냈던 저에게 그때부터 ‘화냄 VS 엄함’은 제 교직의 화두로 다가왔습니다. 분명하게 안 되는 것들에 대해서 엄정하게 가르쳐야 하는데 무조건 화만 내던 저를 개안시키는 사건이었던 겁니다.
매일 새벽 2시까지 공연 연습하고 다음 날 출근하면서도 아이들의 철없는 언행에 평소 같았으면 몸이 힘들어 화를 냈을 텐데, 그 당시엔 ‘화술’을 연습하기 위해 아이의 말을 열심히 잘 들으면서 샤우팅이 아니라 근엄한 목소리로 상황을 정리하는 제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끼곤 했어요.
선생님이 편지 끝부분에 적으신 ‘친절하며 단호한’ 태도는 연습해야만 하고, 교사의 언어를 매뉴얼화해서 교대에서도 예비 교사들에게 숙지시켜야만 한다는 의견을 읽고, 바로 저 ‘화술’이 떠올랐답니다!
하지만 그런 저도 학생으로부터 아동학대로 신고당한 걸 보면 아직도 훈련이 필요한 건가 봐요. 마치 한 편의 연극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똑같은 연기를 수백 수천 번 연습하는 배우들처럼 말입니다!
참, 그리고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사실 저의 아동학대 신고 경험은 다른 선생님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요. 물론 심리적 위축감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서 관련 뉴스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울렁울렁하기는 하지만…… 견딜만해요. 다만 철저히 홀로 고립된 ‘섬’ 같은 존재가 되었던 느낌은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립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율연수 휴직 기간이 끝나고 복직하게 되면 절대로 저 같은 처지의 선생님들이 혼자서 힘든 시간을 보내지 않도록 옆에서 손잡아주는 동료가 되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해 봐요. 이 일은 특별한 사명감이 없어도 가능하고, 보잘것없고 내세울 것 없는 평범한 우리가 동료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이니까요.
계급사회와 공교육의 역할
‘개근 거지’, 지난 3월에 보낸 제 편지에 썼던 낱말입니다. 이미 선생님도 들어보셨겠지요? 한국 사회의 양극화를 저리도 잘 드러내는 말이 있을까 싶어요. 사실 저는 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엄청나게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집’이라고 이해했었답니다. 대한민국은 ‘개근 거지’라는 무지막지한 낱말을 상대를 비하하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어른들이(물론 일부 몰상식한 어른들) 사는 나라입니다.
억지라고 고개를 흔드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걸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한국 사회는 계급사회라는 것을 뜻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말은 우리는 불평등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만 한다는 걸 의미해요. 조선시대와 같은 전 근대 사회처럼 드러내놓고 계급을 나누지는 않지만 철저하게 부(자본)를 기준으로 자신의 우월함을 대놓고 과시하는 세상이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입니다. 한국 사회를 휩쓸었던 각종 ‘수저론’이 이미 이 사실을 대변한 지 꽤 오래되었지요.
자, 이런 세상에서 상위권에 속하지 않아 끊임없이 상위권에 진입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 반대로 자신의 우월함을 독점하기 위해 자신보다 부족한 존재들을 끊임없이 깎아내리려는 사람들, 이도 저도 아닌 변두리에서 홀로 제 살을 파먹으며 서서히 미쳐가는 사람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한국 사회가 진짜로 진짜로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일까요?
선생님 지적대로 이것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학교 교육을 비롯한 학생 훈육과 생활지도는 철저히 반쪽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진정으로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새로운 전망이 없다면 어떠한 저출산 대책이 나와도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어떠한 세상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으세요? 이 질문은 선생님의 이상적인 교사상이나 교사 롤모델이 궁금해지는 이유와도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써 내려가고 있는 ‘비판’의 끝에는 ‘대안’이 있어야만 하니까요. 바닥을 치고 난 후에는 새로운 하늘을 향해 날아올라야 하니까요.
하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와 우리들의 학교는 모두가 ‘더불어 함께’ 행복한 세상을 꿈꾸지 못하고(‘자유민주주의’는 진정 이걸 부정해야만 가능한 걸까요?) 여전히 남보다 조금이라도 우월해지기 위해(비교는 바보들의 놀이!) 오늘도 잠을 줄이며 일과 공부에 매달리고, 가족을 외면하면서까지 성과를 내기 위해 한 방향으로만 달려 나가고 있어요.
그 광란의 질주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어른이 만드는 어그러지고 왜곡된 환경은 고스란히 아이들의 문제로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날 학교에서 우리 교사들이 만나게 되는 ‘문제 행동 학생’이 그렇게 탄생하게 되는 거겠죠. (아, ‘무기력 교사의 탄생’과 ‘문제 행동 학생의 탄생’이 함께 연출하는 케미여! 대한민국 학교의 디스토피아여!)
그 때문에 저는 공교육 학교의 마지막 책무는 최후의 사회 안전망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신규 시절부터 지금까지 제 온 마음을 다해 조금 더 관심이 필요한 아이들을 사랑하려고 했습니다. 사실 저는 과거에 흔히들 말했던 ‘문제아’를 더 사랑했어요.
솔직히 모범생 아이들은 굳이 제가 어쩌지 않아도 훌륭하시고 풍족하신 부모님들께서 때때마다 아이의 성장을 위해 물과 거름을 주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이 부분에 대해 고등학생 제 딸은 아빠는 차별주의자라고 늘 주장하지만 제 뜻을 굽히기 힘드네요.)
하지만 조손 가정의 아이들,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 한부모 가정의 아이들, 가족 불화로 힘든 아이들, 입양 가정의 아이들 그리고 특별한 발달 장애가 있는 아이들에겐 저의 관심과 사랑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응원의 노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문제 행동 학생’이 가르치기 힘들기는 하지만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어요. 매번 읍내 큰 학교를 이야기하게 되는데, 그 당시 2월에 새 학급을 배정할 때 특별히 지도하기 힘든 아이가 있는 반이 생기게 되면(뽑기로 그 반을 뽑은 교사를 절망에 빠지게 만드는), 그 반을 제가 맡겠다고 늘 자청했습니다. 그게 공교육 교사의 가장 중요한 책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교육은 공장에서 제품을 만드는 것처럼 투입과 산출이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사라는 직업이 힘들고 쉽게 지치기 때문에 아이들과의 접촉을 줄이기 위해 많은 교사들이 관리자의 길로 가려고 했던 것도 틀린 말은 아닐 겁니다.
저 역시도 제가 담임교사가 되어 ‘문제 행동 학생’을 가르쳤던 시간 동안 큰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던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졸업 후에도 1년에 한 번이라도 꼭 연락해서 밥을 같이 먹으며 그 아이들의 성장을 응원했지요. 제가 이렇게 지속적인 관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시골이라는 지역적 원인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해요. 시골은 조선시대의 궁처럼 정말 사방이 ‘눈’입니다. 그만큼 지역 사회가 좁다는 의미겠지요.
그런데 이게 정말 신비롭습니다. 하나같이 다른 학부모들의 항의성 민원을 받았던 그 아이들이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커나가는 거였어요. 그 가운데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한 아이가 있습니다. 입양된 아이였는데 3학년 때 학급 절도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 큰 갈등을 일으켰던 아이였지요. 그런데 그 아이가 중학생이 되어 격투기 선수가 되고 메달을 따서 운동선수로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경찰관을 꿈꾸는 건강한 청소년으로 성장했던 겁니다.
추억의 힘
어떤 선생님은 제가 ‘문제 행동 학생’을 특별히 지도하는 비법 같은 게 있는 게 아니냐고 물어보기도 합니다. 경기도에서 충남으로 내려왔던 첫 학교에서는 ‘6학년 스페셜리스트’로 불리기도 했지요. 그렇지만 저에게 비밀리에 전해지는 비법 같은 건 없습니다. 있다면 그것은 바로 ‘추억의 힘’입니다.
바로 지난 편지에서 말씀드린 저의 롤모델이신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물려주신 위대한 유산, ‘추억’이 저의 비법이라면 비법입니다. 제 스승님은 갑자기 특별한 날을 자기 맘대로 아무렇게나 만들어서 학급 아이들을 데리고 산에 가서 라면을 끓여 먹거나, 스케이트장에 가거나 낚시터에 데리고 가면서 행복했던 추억을 많이 만들어주셨어요. 저도 살아가면서 힘든 순간들을 많이 만났지만,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런 생각으로 힘든 시간을 버텨냅니다.
‘얼어붙은 땅이 서서히 녹아 풀리게 되면
연두-두두 둥둥, 봄빛 장단에 춤출 거야’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행복했던 기억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주는 겁니다. 제 사비를 털어서 주말에 유행하는 영화도 보러 다니고, 산에 가서 컵라면도 먹고, 찜질방에 가서 구운 달걀도 함께 까먹는 거지요.
학교 수업 과정에서는 잘 따라오지 못하거나 흥미를 보이지 않으면 그 아이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활동이나 주제로 그때그때 갑자기 바꿔버립니다. (물론 매번 이럴 수는 없지만요) 그렇게 해서 재미를 가지고 몰입했던 기억을, 그래서 신났던 기억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서 그 아이가 자신에 대한 긍정적 자아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노력했답니다. (이건 제 딸아이가 지적하듯 다른 아이들에게는 역차별이 될 수도……) 그렇게 만들어진 긍정적 자존감은 반드시 이 아이들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든든한 지렛대가 될 거라고 저는 확신해요.
이번 2024년 파리 올림픽에서 사격 부분 금메달을 딴 어린 선수들의 인터뷰를 봐도 알 수 있잖아요. 금메달을 목표로 지옥 훈련을 했던 게 아니라 좋아하는 사격을 맘껏 즐기면서 몰입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좋은 결과를 얻게 되었다고 말하잖아요.
덴마크의 국가 경쟁력이 전 세계 1위라고 합니다. 그런데 덴마크 사람들은 4시만 되면 퇴근을 한다고 해요. 짧은 노동시간에도 불구하고 높은 생산성을 낳을 수 있는 비결 역시도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라’라고 합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전 세계 출산율 최하위의 비정상적인 국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양성’이 세상 곳곳에서 꽃 피울 수 있도록,
아이들의 자연적 생명력이 극대화될 수 있도록,
자신만의 행복을 꿈꿀 수 있도록,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맘껏 펼쳐 나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면 됩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문제도 우리 학교의 문제도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닐까요?
간단하지만 그걸 구현하려면 세상을 통째로 바꿔야 하니 정말이지 쉽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남과 비교해서 더 돋보이고 싶고, 우월해지려는 무한 욕망만 내려놓는다면 저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진짜 진짜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찾아갈 수 있도록 우리 어른들이 앞장서서 인정해 주고 이끌어주면 되지 않을까요? 무조건 ‘의대’를 가야만 경제적 안정을 누릴 수 있고, 세상으로부터 존경받는 사회는 분명히 정상이 아니니까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모습을 어른들이 먼저 실천하기가 왜 이토록 힘이 들까요?
타인이 던져주는 ‘좋아요’ 숫자에 나의 행복을 더 이상 기대지 않고 나답게 사는 게 왜 이토록 힘든 일이 되어버린 걸까요?
비바리움
혹시 ‘비바리움’이라는 영화를 보셨는지요. Vivarium의 원래 뜻은 ‘관찰이나 연구를 목적으로 동물과 식물을 가두어 사육하는 공간’이라고 합니다.
실제 영화를 보면 똑같은 디자인에 똑같은 색깔을 가진 주택이 단지를 형성하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기이한 공간이 등장해요. 그리고 이곳에서 주인공 부부는 이해 불가능한 미스터리 사건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 속 공간이 마치 우리나라와 ‘우리들의 학교’를 떠올리게 만들어서 섬뜩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