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이 교사들의 문제, 권위주의를 다시 한번 짚어야겠습니다. 다른 문제들은 조금 차치하고서라도요. 이 문제가 저는 가장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참 아이러니하지요. 저는 교사들이 권위적인 방식을 여전히 많이들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학생들한테 교사의 권위는 점점 떨어지다 못해 기본적인 인권조차 위협받고 있는 현실이요. 그건 제가 이전 편지에서 적은, ‘무기력 교사의 탄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체벌’이라는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졌던 교사들이 어느 순간 체벌을 할 수 없게 됨으로써, 그 빈 공간을 어떻게든 메꾸려는 발버둥이랄까요. 체벌을 할 수 없으니 윽박지르는 방법으로나마 아이들을 통제하려는 발버둥이지요.
그러나 실질적으로 아이들을 제재할 수 있는 방법과 시스템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무섭게 하는 방법은 한계가 뚜렷했습니다. 아무리 교사가 무섭게 한다 한들, 그 교사의 말, 듣지 않아도 이제 맞지 않거든요. 그렇다고 쉽게 징계를 받지도 않고 징계를 받는다 해도 솜방망이인 경우가 많거든요. 막 나가도 이제 나를 어쩔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상황이 온 겁니다.
물론 이는 모두의 상황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래도 착하고 무섭게 하는 교사의 말도 웬만하면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을뿐더러 그리 바람직한 상황도 아닙니다. 교사의 무서움, 즉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한 교실은 곧 무너질 게 뻔했거든요. 필요한 건 심한 문제 행동을 보이는 학생을 관리할 수 있는 잘 짜인 훈육 시스템이요, 어느 한 학교에만 갖춰진 게 아닌 전체 학교에 어느 정도 일관되게 적용될 수 있는 그런 시스템입니다.
그러나 우리네 교육은 그런 시스템을 제대로 만들지 않았고 그에 대한 문제의식도 너무 부족한 채, 그저 교사 개인 역량에 모든 걸 맡겨 버린 경향이 있습니다. 교사가 할 수 있는 게 너무 제한적인데 모든 걸 교사에게 맡겨버린 이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서 무슨 교육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교사의 권위주의 문제는, 속 시원하게 비판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권위적인 교사, 무섭게 하는 걸 기본으로 하는 교사들이 왕왕 보임에도(그런데 사실, 그렇지 않은 교사들이 더 많아요. 그러나 20~30퍼센트 정도의 교사들은 여전히 ‘무서운 교사’의 틀을 벗어나지 못해요) 무작정 비판하지 못하겠어요.
교사 양성기관(교대, 사범대)에서 학생 훈육법, 학생 지도법을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고, 학생 생활지도 시스템은 전혀 갖춰지지 않은 현실 속에서 어떻게 그들 개인에게 이 문제의 책임을 떠넘길 수 있겠습니까. 형 말처럼 저도 교사들에 대한 섣부른 비판을 거두어들여야 하지 싶습니다.
손웅정의 아동학대
저는 손웅정의 방식이 형의 말처럼 ‘태양’과 ‘바람’을 넘나드는 아슬아슬함을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태양’보다는 ‘바람’에 좀 더 치우쳤던 건 사실이었죠. 그의 ‘바람’이 그저 ‘엄함’ 정도로만 끝났으면 좋으련만 비록 많이는 아닐지라도 몇 번씩 ‘선’을 넘었어요. 그는 ‘욕’을 했고, 그의 코치진들은 ‘체벌’을 했어요.
관련 학부모의 치졸함과 비겁함, 돈에 대한 천박한 태도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 학부모의 잘못이 손웅정과 코치진들의 잘못을 정당화할 수는 없어요. 좋은 결과를 끌어낼 수만 있다면 과정 따위야 어찌 되어도 괜찮다는 논리와 저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욕’과 ‘체벌’은 아동학대로 볼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르는 어떤 분기점, 기준 같은 거라고 저는 생각해요. ‘욕’은 ‘정서적 학대’와 관련이 있고, ‘체벌’은 ‘신체적 학대’와 관련이 있죠. ‘체벌’은 한 번밖에 안 했더라도 ‘신체적 학대’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걸로 알아요. 아무리 한 번이라도 그건 안 되는 거예요. 혹여 손웅정 측에 여론이 호의적이라고 하더라도, 이 부분에 대해서 그의 코치진들에 대한 잘못은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비록 한 번이라도.
반면 ‘정서적 학대’는 참 애매한 게 많아요.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정서적 학대’는 명확한 기준이 없어요. 그래서 얼마 전 발의한 일명 ‘서이초 특별법’ 중 하나에는 그 명확한 기준을 세우려 노력한 흔적이 있지요. 그 기준은 단순하게 말해 ‘지속성’과 ‘강도’ 예요. 얼마나 지속해서 했는지, 얼마나 심하게 했는지 여부지요. 아이들에 대한 ‘욕’이 절대 올바른 것도 아니고 그런 것이 허용되는 분위기는 없어져야 할 구태라고 생각하지만, 반복적이지 않은 한 번의 ‘욕’만으로 이를 아동학대라는 ‘형벌’로 처벌해야 하는지는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욕’ 자체만 봤을 때도 그 강도 면에서 약하다고 보기는 힘들겠지요. 그런데 그런 ‘욕’을 손웅정 감독이 만약 여러 번 한 정황이 충분히 인정된다면, 그 또한 여지없이 ‘정서적 학대’로 봐야 할 것 같아요.
권이근의 아동학대
그에 반해 이근이 형은 어떨까요. 형은 손웅정과 자신이 비슷해 보인다고 했지만 저는 생각이 달라요. 저는 아동학대로 넘어가는 어떤 ‘선’이 있다고 생각해요. 손웅정 측은 ‘선’을 넘었고, 형은 ‘선’을 넘지는 않았다고 생각해요.
일단 형, 형에겐 너무 미안한 얘기지만 호통을 치고 지휘봉으로 아이의 배를 찌른 건 분명 문제의 소지가 있는 행동이었어요.
호통을 친 것 자체로는 저는 큰 문제라고 생각진 않아요. 그 안에 욕이 들어있다거나 아이의 인격을 현저히 깔아뭉개는 발언이 있지 않다면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정서적 학대’의 분기점을 저는 ‘욕’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단순히 아이의 문제 행동을 지적하며 큰 소리로 호통쳤다고 해서 저는 그게 아동학대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아요. 현실에서는 ‘큰소리 호통’도 아동학대로 신고당하는 판이지만요. 물론 호통을 치는 방식이 아예 문제가 없다는 것도 아니고, 또 다른 방법으로 아이를 훈육할 수 있다면 당연히 더 좋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다른 방법’에 대한 대안이 딱히 없는 우리 교사들에게 이는 또 무책임한 말일 수도 있어요. 어쨌든 ‘호통’ 자체로 아동학대가 된다는 건 정말 너무하고 또 너무하다고 저는 생각해요.
지휘봉으로 아이의 배를 찌른 행동은 어떨까요. 이는 신체적 학대와 관련이 있을 텐데, 저는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신체적 학대의 분기점은 ‘체벌’ 또는 ‘물리적 가격’이라고 생각해요. 아이의 배를 찌른 행동은 ‘체벌’이나 ‘물리적 가격’에 해당할까요? 저는 그 행동이 부적절하다고 얘기할 수 있을지언정 ‘체벌’이나 ‘물리적 가격’에 해당할만한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문제의 소지는 분명 있는 행동이어서 형이 말한 것처럼 형은 그 행동을 하는 대신 ‘시간을 두고 다음 기회에 다시 새롭게 시작하며 분위기를 전환했어야만’ 했어요. 그럼에도 ‘아동학대죄’라는 ‘형벌’로 처벌해야 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아요. 형법상 처벌은 다른 문제니 까요.
형이 그러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다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전 사실 형의 마음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저 또한 어찌하지 못했던, 감당하지 못했던 아이를 만났던 경험이 있거든요. 수업 시간이면 찌를 듯한 고음과 괴상한 흥얼거림을 반복했던 그 아이는 하지 말라고 아무리 말해도, 호통을 쳐봐도(저 또한 호통을 쳤던 경험이 많습니다. 사실 교사라면 누구나 있긴 하지요. 점점 없애려고 노력 중이에요), 달래 봐도 소용이 없었어요. 멈추지 않았지요. 외부 강사 수업이라 이동해야 하는 시간임에도 가지 않아 한참을 설득했어요.
결과는 어땠을까요. 복도 긴 의자에 드러누웠던 그 아이를 어쩌지 못하는 저를 보며 저 스스로 무기력함만을 느꼈었더랬지요. 한없이 깊은 우울감에 빠져들었었어요. 더 힘들고 지난한 상황은 이야기하자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굳이 더 제 부끄럽고 무기력했던 과거를 후벼 파서 뭐 하겠습니까. 더불어 형의 아픔이자 상처를 제가 너무 건조하게 대한 건 아닌지, 더 덧나게 해 아물려던 상처를 곪게 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되고 미안한 마음이에요.
친절하며 단호한 생활지도,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의 현실은 ‘권위적으로 호통치는 태도’와 ‘친절하며 단호한’ 태도 사이의 문제로 설명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형 진단에 동의해요. 다시 얘기하자면, 아무리 제가 대안으로 내놓은 ‘친절하며 단호한’ 태도로 일관한다 한들 지금의 현실에서는 한계가 있다는 이야기이죠 형 말은?
‘학급 긍정 훈육법이나 비폭력 대화, 감정 코칭과 같은 이른바 회복적 생활지도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말이 특히 와닿습니다. 제가 다시 저만의 말로 정리하자면, ‘친절하며 단호한 생활지도’와 더불어 법적, 제도적 장치가 함께 가야 해요. 하나만 있으면 반쪽밖에 안 돼요.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여야 해요.
일단, ‘친절하며 단호한 생활지도’에 대한 설명부터 해야겠어요. 교사들이라면 어디선가 들어봤을 법한 이 말을 사실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요.
예를 들어 볼게요. 학교에서 동아리 활동으로 아이들이 교실에서 요리를 하고 있어요. 한 아이가 준비물 중 하나인 케첩을 갖고 친구들을 향해 총 쏘는 흉내를 내요. 그러다가 실수로 진짜 케첩이 발사돼 친구 옷에 묻었어요.
이때 친절하기만 한 교사라면 어떻게 할까요? 아마도 아이를 달래는 걸로 끝낼 거예요. “에고, 괜찮아, 괜찮아. 친구한테 장난치려다가 실수로 그럴 수 있지. 다음부터 조심하면 돼.” 아이의 마음은 충분히 공감받았지만 아이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해요. 자기 잘못에 책임을 지지 않아요. 아이는 이 정도의 잘못은 그냥 해도 되는 거구나, 생각할 거예요.
반면 단호하기만 한 교사는 어떨까요? 아마도 호통을 치거나 화를 내겠죠. “곽노근, 선생님이 먹는 거로 그런 장난치지 말라고 했지? 몇 번을 얘기해야 알겠어? 네가 친구 옷 다 물어줄 거야?!” 아이는 내가 잘못했다는 걸 알긴 알겠지만, 마음이 충분히 공감받지 못했기 때문에 안에 울분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때로 책임을 전가하기도 합니다. 애꿎게 옆에 아이한테 책임을 돌리기도 하고, 선생님한테 복수하고 싶은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친절하며 단호한 교사는 어떤가요. ‘감정’에 친절하지만(곧 공감해 주지만) ‘행동’에는 단호합니다. “노근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 실수로 그런 거 알아. 노근이도 놀랬지? 그렇지만 케첩이 묻은 이근이는 어떤 기분일까? 이근이한테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지, 이근이한테 사과하고 이근이 옷에 묻은 건 네가 최선을 다해 지워줘야 해.” 그러고 나서 화장실에 가서 지울 수 있는 만큼 지울 수 있게 합니다. 어쩌면 정말로 친구 옷을 물어줘야 할 수도 있음도 알려줍니다. 아이 마음에 공감해 주되, 아이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건 반드시 일러주고 책임지는 행동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어찌 보면 뻔한 말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육 현장에서 이렇게 ‘친절하며 단호한’ 태도로 아이를 대하는 교사는 생각만큼 많지 않습니다. 아이의 잘못부터 지적하고 꾸중으로만 일관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전에 항상 먼저 해야 할 건 ‘공감’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공감’으로만 끝내서는 안 됩니다. 그 뒤에 놓치지 않고 해야 할 건 ‘꾸중’이 아니라 행동에 대한 ‘단호함’입니다. 네가 잘못한 행동에 있어서는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는 ‘행동에 대한 단호함’. 잘못된 행동을 알려주고 책임지는 행동을 할 수 있게끔 하는 데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단호함. 그러나 윽박지르거나 화내지 않는 단호함.
지금부터 저는 얼마 전 논란이 되었던 ‘교감 뺨 때리는 아이’ 사건을 예로 들어, ‘친절하며 단호한 생활지도’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 그리고 더불어 ‘법과 제도’가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려 해요.
교감 뺨을 때린 아이, 어떻게 단호하게 지도해야 할까
2024년 6월 3일 전북 전주의 한 초등학교에서 3학년 아이가 교감 선생님 뺨을 여러 번 때렸습니다. 침도 뱉었고 욕도 했습니다. 팔뚝도 물었습니다. 우산으로 벽인지 창문인지를 내려치기도 했습니다. 아이는 왜 그랬을까요. 무단 조퇴하려다 교감이 막자 그런 일을 벌였습니다.
아이의 욕지거리와 폭력에도 크게 흥분하지 않고 대응하는 교감 선생님은 사실 그것만으로도 너무 대단합니다. 하지만 교감 선생님의 언어들은 상황을 나아지게 하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훈육의 언어라고도 할 수 없겠습니다. 경찰을 부르라는 말은 오히려 아이를 자극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 그럼 교감은, 교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앞에서는 ‘공감’을 먼저 해줘야 한다고 했는데, 예외적인 경우가 있습니다. 아이가 폭력적인 행동을 할 경우입니다. 이럴 땐 ‘단호함’이 먼저입니다.
아이의 행동은 물리적 폭력과 언어적 폭력이 함께 합니다. 공동체를 살아가면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지요. 교사는 한 치의 물러섬 없이, 그리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단순합니다.
“욕하면 안 돼.”
“때리면 안 돼.”
고작 그거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흔들림 없는 단호한 저 말 한마디는 생각보다 힘이 셉니다. 아이는 아직 욕하면 안 된다는 걸, 때리면 안 된다는 걸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가르쳐 줘야 하고 끊임없이 알려줘야 합니다.
저렇게 말한다고 아이가 욕을 안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때 우리는 다시 한번 말해야 합니다. “욕하면 안 돼. 욕은 안 되는 거야.” 물론 아이는 물러섬 없이 욕을 할 것이고, 그때마다 우리는 더더욱 물러섬 없이 말해야 합니다. “욕하면 안 돼.”
아이가 때리기 시작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찰을 부르라는, 아이를 자극하는 말 대신 다시 단호하게 말해야 합니다. “때리면 안 되는 거야.” 그렇다고 아이가 때리는 걸 멈추지 않을 겁니다. 그때마다 우리도 멈추지 말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건 절대 안 되는 거야.” 물러섬 없이, 흔들림 없이.
말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그런데 말만으로 될까요? 욕하지 말라는 말, 때리지 말라는 말만으로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가 계속해서 욕을 하고 계속해서 때린다면, 하지 못하게 하는 게 맞습니다. 설마 욕할 자유, 때릴 자유를 아동에게 허하는 게 인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 믿습니다.
교감 선생님은 아쉽게도 아이의 폭력적 행동을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왜 그러는지는 압니다. 아무리 법이 바뀌었다 한들, 그에 대한 판례가 충분히 쌓이지 않았기에 잘못 손대면 여전히 아동학대로 고소당할 거라는 두려움은 현실에서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 현실적 어려움을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교감 선생님의 행동은, 아이의 행동을 바로잡는 훈육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팔을 휘두르는 아이의 두 손을 잡아야 합니다. 때리면 절대 안 된다는 말과 함께. 아이의 두 손을 잡는 것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아이의 두 손을 잡는 행위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법에서 명시한 ‘정당한 학생생활지도’이기 때문입니다. 잠시 법을 살펴보겠습니다.
법이 말하는 ‘정당한 학생생활지도’
작년, 교사들의 뜨거운 외침으로 개정된, 교권보호 5법 중 하나인 초·중등교육법 제20조의 2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제20조의 2(학교의 장 및 교원의 학생생활지도) ① 학교의 장과 교원은 학생의 인권을 보호하고 교원의 교육활동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법령과 학칙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학생을 지도할 수 있다.
② 제1항에 따른 교원의 정당한 학생생활지도에 대해서는 「아동복지법」 제17조 제3호, 제5호 및 제6호의 금지행위 위반으로 보지 아니한다.
이 법에 따라 교사는 학생생활지도를 할 수 있고, ‘정당한 학생생활지도’에 대해서는 아동학대 행위로 보지 않습니다. (흔히 ‘면책’이라는 오염된 낱말로 잘못 표현돼 버린 바로 그 부분입니다) 구체적으로 아동복지법 제17조 제3호, 제5호 및 제6호에 해당하는 아동학대 행위인데, 아래와 같습니다.
3. 아동의 신체에 손상을 주거나 신체의 건강 및 발달을 해치는 신체적 학대행위
5. 아동의 정신건강 및 발달에 해를 끼치는 정서적 학대행위
6. 자신의 보호ㆍ감독을 받는 아동을 유기하거나 의식주를 포함한 기본적 보호ㆍ양육ㆍ치료 및 교육을 소홀히 하는 방임행위
그런데 사실 이는 하나 마나 한 말입니다. ‘정당한’ 학생생활지도가 어떻게 위와 같은 학대행위일 수 있겠습니까. ‘정당한’이라는 말속에는 이미 ‘학대행위가 수반되지 않은’이라는 뜻이 내재해 있다고 봐야 합니다. 따라서 ‘정당한 학생생활지도’라는 말은 곧 ‘학대행위가 수반되지 않은 학생생활지도’라는 말이랑 결국 같은 말입니다. (이에 대한 몰이해로 또 얼마나 많은 학생 인권 근본주의자들의 공허한 말들이 의미 없게 나뒹굴었던가요.)
여하튼 무작정 ‘정당한 학생생활지도’라 하면 조금 추상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명료화할 필요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정당한’의 뜻을 저마다 오남용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테니까요. 그리하여 나온 것이 바로 그 유명한, 탈도 많고 말도 많은 <교원의 학생생활지도에 관한 고시>입니다. 이 고시에 불완전한 부분이 너무 많긴 하지만 그래도 써먹을 수 있는 만큼은 써먹어야 합니다. 고시 제12조(훈육) ④항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습니다.
④ 학교의 장과 교원은 자신 또는 타인의 생명ㆍ신체에 위해를 끼치거나 재산에 중대한 손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긴급한 경우 학생의 행위를 물리적으로 제지할 수 있다. 이 경우 학교의 장과 교원은 교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주변 학생에게 신고를 요청할 수 있다.
다시 앞 사건으로 돌아가 볼까요. 그 아이는 교감, 즉 타인의 신체에 위해를 끼쳤습니다. 또 무단 이탈함으로써 아직 보호받아야 할 어린 나이의 자신 스스로에게 위해를 끼칠 우려가 다분합니다.
이런 상황은 너무 명백합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서나, 그 아이 스스로를 위해서나 학교의 장과 교원은 물리적으로 그 아이를 제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아이의 폭력적 행동을 멈추게 하기 위해 손 하나 잡는 것은 적어도 법적으로 뒷받침된 행동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아직도 아무 행동도 못 하고 이리 무기력할까요.
아이에게 덧붙여야 할 한 마디
조금 더 구체적으로 가 볼까요.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는 폭력을 중단시키기 위해 아이의 손을 잡을지언정, 그 아이를 주먹으로 때리거나 발로 차거나 넘어뜨리면 안 됩니다.
그 순간 ‘정당한 학생생활지도’를 넘어선 것이 돼 버리니까요. 다만 아이가 누군가를 때리려고 할 때 우리는 적극적으로 그 행동을 막고 제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대한 그 아이가 꼼짝할 수 없도록 잡고 있어야 합니다. 아슬아슬하죠? ‘꼼짝할 수 없도록’이라는 말이 참 걸리긴 합니다. 이때 우리는 아이에게 한 마디 덧붙여야 합니다. 화내지 않되 단호하게.
“누군가를 때리는 행동은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할 뿐만 아니라 너를 다치게 할 수도 있어. 우리 모두 안전해지기 위해서 잠시 너를 붙잡고 있을 거야. 네가 진정하면 놓아줄 거야. 진정할 때까지 기다릴 거야”
우리가 너를 붙잡고 있는 이유를 아이에게 이야기해 주어야 합니다. 네가 미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모두 안전해지기 위해서, 그리고 너를 위해서 그렇다는 것을. 아이는 죽을 듯 몸부림을 칠 것입니다.
그래도 흔들림 없이, 단호하게 똑같이 얘기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안전해지기 위해서 잠시 너를 붙잡고 있을 거야. 네가 진정하면 놓아줄 거야.” 그리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1시간이건, 2시간이건.
인권침해가 아니라 정당한 학생생활지도다
이와 함께 있어야 할 제도가 바로 ‘분리 제도’지요. 교육부 고시 제12조(훈육) ⑥항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⑥ 학교의 장과 교원은 학생이 교육활동을 방해하여 다른 학생들의 학습권 보호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경우, 다음 각 호의 방법에 따라 해당 학생을 분리할 수 있다.
제가 앞에서 이야기한 감당하지 못했던 아이, 수업 시간이면 찌를 듯한 고음과 괴상한 흥얼거림을 반복했던 그 아이에게 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했어요.
“지금 하는 행동은 수업을 심하게 방해하는 행동이야. 선생님이 셋을 셀 동안 조절해 주었으면 좋겠어. 조절이 힘들 수 있어. 조절이 힘들면 선생님이 도와줄 거야. 잠시 다른 곳에서 조절하고 올 수 있도록 할 거야.”
역시나 화내지 않고 단호하게 이야기합니다. 셋을 셌는데도 조절이 안 되면(혹은 교실 내 다른 장소로의 분리 조치했는데도 조절이 안 되면) 아이를 교감 선생님(또는 다른 선생님)께 인계합니다. 교감 선생님의 말을 무시하고 움직이지 않으면요? 그러면 보호자에게 연락해야지요. 지금 아이가 수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니 데려가셔서 가정학습을 부탁드린다고 이야기해야지요. 이 또한 교육부 고시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12조(훈육) ⑦항입니다.
⑦ 학교의 장은 제6항 제3호 및 제4호에 따른 분리를 거부하거나 1일 2회 이상 분리를 시행하였음에도 학생이 지속해서 교육활동을 방해하여 다른 학생들의 학습권 보호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경우, 보호자에게 학생인계를 요청하여 가정학습을 하게 할 수 있다.
일부 학생 인권옹호자들은 이를 학생 인권침해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권한이 남용될 수 있고 학생의 권리가 부당하게 침해될 수 있다고요. 저는 그들의 말들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우려 또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교사들이 권한을 남용할 거라는 그 발상에서, 교사들을 그토록 믿지 못하겠다는 의지가 읽힙니다. 과연 지금의 교사들이 그 권한을 얼마나 남용할까요. 고시가 나온 지 일 년이 넘은 지금 그 권한을 남용한 사례가 얼마나 나왔던가요.
사실 그 고시에 있는 내용을 제대로 적용한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저도 학교에 있으면서 한 번도 못 봤습니다. 되도록 교실 안에서 해결하고 싶지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은 게 교사들입니다. 또 어떤 흉한 일을 당하려고요.
학생의 권리가 침해된다고요? 문제 행동을 보인 학생의 권리가 중요한 만큼 다른 학생들의 권리도 중요합니다. 이 학생 인권옹호자, 아니 학생 인권 근본주의자들은 다른 학생들의 권리에 대해 아무런 대답을 못 합니다. 그들 눈에는 다른 학생들의 권리, 방해받지 않고 수업받을 권리는 보이지 않는 걸까요?
물론 문제 행동을 보인 학생의 권리도 당연히 지켜야 합니다. 문제 행동을 보였다고 해서 기본적 인권을 도외시하면 안 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 행동을 보인 학생을 무슨 쌍팔년도 마냥 체벌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교무실에 가서 벌세우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상태가 될 때까지 잠시 분리해 놓겠다는 뜻입니다. 당장 자기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괴성을 지르고 교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있는 상황인데, 다른 학생들의 학습할 권리는 차치하고라도, 그 스스로의 학습할 권리는 정말 지킬 수 있는 건가요? 그 해당 학생의 학습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도 오히려 분리를 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 아이가 조절할 수 있도록 기다리고, 다시 공부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면 함께 교실에서 공부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스스로도 ‘내가 이렇게 문제 행동을 보여도 아무도 나를 제지하지 못하는구나’가 아니라 ‘아, 내가 이렇게 문제 행동을 보이면 누군가는 못 하게끔 하는구나’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인권’의 이름으로 그런 문제 행동을 문제 삼지 않는 것이 정말로 ‘인권’을 위하는 길인지 ‘인권 근본주의자’들은 성찰해 봐야 합니다.
그 아이는 왜 그렇게 됐을까
쓰다 보니 할 말이 많아져 글이 길어졌습니다. 이제 마칠까 싶지만, 사실 하고 싶은 말이 더 있긴 합니다. 먼저, 교사들 또한 호통을 치는 방식에서 벗어나 ‘친절하며 단호한’ 태도를 연습하고 적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감정을 빼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은 사실 배우고 연습해야 하는 부분이긴 합니다. 그냥 되는 건 아니거든요. 이에 대해 국가적인 차원에서 분리제도와 연계한 교사의 언어를 매뉴얼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사 양성 단계에서도 중점적으로 다루어야 함은 더 강조할 필요가 없고요.
그러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탄탄한 법 제정이지요. 법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친절하며 단호한’ 생활지도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친절하며 단호한’ 방식뿐만 아니라 모든 방식이 마찬가지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엄하고 무섭게 하는 방법도 똑같이 한계를 같습니다) 지금의 법은 불완전합니다.
‘고시’ 수준에서 뒷받침되고 있는 실정이거든요. ‘법률’ 수준에서 뒷받침되어야 하고, 그렇기에 백승아 의원(교사 출신 국회의원)이 발의한 일명 ‘서이초 특별법’이 너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곳저곳에서 공격을 받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또, 근본적으로는 더 큰 사회의 문제도 함께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앞에서 예로 든 ‘교감 뺨 때린 아이’의 경우, 그 아이 하나를 악마화시킨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습니다.
문제 행동을 보인 아이를 ‘분리’하고 ‘물리적 제지’를 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아이가 왜 그런 문제 행동을 보이느냐를 아는 것입니다. SBS의 <궁금한 이야기Y)(2024.6.24. 방송)에 나온 내용을 보면, 그 아이의 문제는 그대로 보호자의 문제입니다. 가정환경의 문제입니다. 더 깊게 파고들어 가면 ‘계급’의 문제일 수도 있고 ‘내 새끼 지상주의’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에 대한 성찰이 없는 훈육과 생활지도는 반쪽일 수밖에 없습니다.
글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형이 질문한, 제가 꿈꾸는 교사상, 제 교사 롤모델은 다음 기회에 이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서이초 1주기를 지나 폭염의 끝을 달리고 있습니다. 건강 조심해요 형. 다음 편지 기다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