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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분가분 Oct 05. 2024

내가 살고 싶은 세상, 내가 꿈꾸는 교실

어떤 세상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나요?



이근이 형에게     



기쁜 소식, 우울한 현실, 그러나 희망

  편지에 실려 온 형의 축하의 말, 정말 고마워요. 저와 아내에게 아이가 생겼어요. 형의 말대로 새 생명의 탄생은 그 자체로 축복이에요. 이토록 기쁜 소식이, 현실에선 아내의 처절한 입덧으로 잠시 묻히기도 했지만, 그 고통의 시간이 지나가 잠잠해지니, 다시 새 생명에 마음을 기울이게 되었어요. 아직 얼떨떨하지만, 이 아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어루만질 거예요.


  하지만 걱정도 함께 우리를 덮쳐요. 이 우울한 현실에, 어두운 세상에 새 생명을 밖으로 내보내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 때문에요. 지금 여기, 대한민국은 아이가 살만한 세상인가, 하고 다시금 진지하게 생각해 봐요.

  형의 글을 보니 살만한 세상이 아닌 것 같아요. 보이지 않는 계급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어요. 치열한 경쟁 위주의 사회에서 내 뜻을 펼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에요. 사회 보장 시스템도 아주 잘 갖춰진 것도 아니어서 능력이 없으면 굶어 죽기 딱 좋아요. 아등바등 어떻게든 살아내야 해요. 무엇보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워요. 가난하다고, 피부색이 다르다고, 장애인이라고, 한부모 가정이라고 업신여겨요. 쉽게 동정해서 나를 불쌍한 사람 만들어요.


  하지만 때로 그런 식의 진단이 과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지금까지 살아오건대, 그렇게까지 팍팍하지만은 않았거든요. 제 둘레 사람들도 살펴보건대,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지만, 참 좋고 선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걸요. 사회보장체계가 매우 아쉽지만 그래도 우리나라만큼 의료체계가 그런대로 잘 갖춰진 곳도 많지 않고요. (최근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으로 치료받아야 할 이들이 받지 못하고 서서히 시들어가는 현실은 너무 안타까워요) 우리나라처럼 사람들의 문맹률이 낮고, 문해력 수준이 뛰어난 나라도 찾기 힘들어요. 자꾸 젊은 세대의 문해력이 떨어진다고들 하는데, OECD 국가들과 비교해 봐도 우리나라의 문해력은 높은 곳에 있어요. 게다가 젊은 세대의 문해력이 노년 세대의 그것보다 더 높은걸요.

그래서 저는 우리나라에서 ‘희망’도 함께 봐요.




내 능력은 나의 것이 아니다

  형이 저에게 어떤 세상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냐고 물으셨죠? 즉 제가 꿈꾸는 세상이 어떤지를요. 내가 꿈꾸는 세상이라니, 뭔가 거창하네요. 좀 더 건조하게 이야기해 볼까요?

 

 저는 극단적인 게 싫어요. 개인의 ‘자유’만을 중시하는, 그리하여 개인의 ‘능력’이 모든 걸 말해준다는 그런 미국식 자유주의, 자본주의가 싫어요. 개인에게 자유를 주면, 그래서 그 자유 속에서 개인이 노력한 만큼 능력이 펼쳐질 테고, 그 능력만큼 보상해 주는 게 공정하다고 믿는, 그런 것에 저는 동의할 수 없어요.


  어느 한 개인의 능력은 정말 온전히 그가 노력해 일군 걸까요? 맞아요. 그 노력을 부정할 순 없어요. 형이나 저나 공부를 잘한 축에 속했으니 재수가 없지만 잘 알겠죠. 나는 시험 잘 보기 위해 밤잠 줄여가며 피가 터지게 공부했는데(솔직히 피가 터지게까지 한 적은 없긴 해요. 그냥 말이 그렇다는) 슬렁슬렁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고, 게임하고 자고 놀고 하는 애들이 시험을 못 보는 건 당연해요. 내가 그만큼 노력했으니 시험을 잘 보는 건 당연한걸요.


  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아이들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는 쉽게 그렇게 말 못 할지도 몰라요. 어릴 때부터 풍요로운 집안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A 학생은 공부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아요. 물론 쉽지도 않지만 어릴 때부터 부모와 함께 책을 읽어온 A는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게 익숙해요. 물론 이 아이들도 힘들게 매일 학원 가고 억지로 해야 하는 건 똑같아요. 스트레스도 받아요. 하지만 어릴 때부터 이렇게 자란 A는 그럭저럭 할 만해요. 버틸 만해요. 엉덩이를 붙이고 공부하는 걸 어느샌가 학습했거든요. 꾸역꾸역 열심히 해요. 열심히 한 A의 성적은 그런대로 좋아요.


  그에 반해 B는 풍족하지 않아요. 부모님이 같이 사업을 하다 망했어요. 매일 부모님의 싸우는 소리로 하루를 맞고 하루를 끝맺어요. 학원 갈 돈이 없어 학원 가는 건 꿈도 꾸지 못해요. 학교에서는 부모님 싸우는 소리가 귀에 맴돌고, 학교가 끝나면 부모님 싸우는 소리가 듣기 싫어 거리를 배회해요. B가 공부하지 못하는 건, 그리하여 시험을 잘 보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거 아닐까요?


  피에르 부르디외라는 사회학자, 아비투스, 문화자본 따위 말들을 꺼내지 않더라도 사실은 누구나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개인 능력의 높고 낮음은, 온전히 개인 책임이 아니라는 것을. 부모의 경제적 능력, 사회문화적 자본이 가장 크게 작동한다는 것을.


  이런 사회에서는 부모의 경제적 능력이 자녀의 경제적 능력으로 대물림되기 딱이에요. 공부를 잘하는 A는 좋은 대학을 갈 것이고 좋은 직장에 취업할 것이며 돈을 많이 벌 거니까요. 공부를 잘 못 하는 B는 대학은 아예 꿈도 못 꿀지도 모르고 좋은 직장은커녕 변변한 직업을 구하지도 못해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가거나 아예 나쁜 길로 빠질 수도 있겠죠.


  이런 사회가 바람직한 가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는 볼 수 없어요. 저는 이런 사회를 꿈꿀 수 없어요.      




평등이라는 숭고한 가치의 왜곡  

  그렇다고 저런 식의 ‘계급 사회’가 문제라고 그 어떤 차이도 없애버리려 하는 극단적, 기계적 ‘평등’의 사회도 싫은 건 매한가지예요. 부모의 경제적 차이를 없애고자 모든 사유재산을 몰수하고 국가가 모든 걸 관리하고 나누어주는 그런 사회는 사실 더 끔찍해요.


  꽤나 이상적인 이념을 현실에 구현하려고 한 그 시도 자체는 어쩌면 긍정적으로 바라봐야 할지도 몰라요. 그러나 결과는 끔찍했지요. 이른바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그 숭고한 이념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으로 한쪽에 치우친 까닭에 모두 몰락해 버렸거나 허울뿐인 껍데기만 남았어요. 소련이 그랬고, 북한이 그랬고, 중국이 그랬어요. 그 어떤 차이도 인정하지 않아 개인의 창조성, 다양성은 깡그리 무시돼 버렸지요. 그리하여 모두 전체주의 사회가 돼 버렸어요. 다양성이라곤 일체 없는 그런 사회.


  처음 시작은 사람을 살리려는 것에서 출발했을진대 반대로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었지요. 스탈린과 모택동과 김일성이 죽인 사람의 숫자는 과연 얼마일까요. 게다가 자신들의 이념을 스스로 철저히 짓밟은 그들은, 전혀 평등한 세상 속에서 살지도 않았어요. 본인들만 특권 속에 누릴 것 다 누리다 갔죠.      




내가 꿈꾸는 세상

  그럼 대체 저는 어떤 사회를 꿈꾸는 걸까요. 글쎄요. 너무 뻔한 대답이고 전혀 창의적인 대답도 아니지만, 그나마 현실 속에서 불완전하게나마 ‘평등’이라는 가치도 지키면서 개인의 ‘자유’도 지킨 나라들이 있긴 있지요. 이른바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인 서유럽과 북유럽 국가들이에요.


  적어도 그 나라들은 내가 돈을 못 벌고 돈이 없다고 해서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을 못 한다거나, 아파도 치료를 못 받는다거나, 배우고 싶은 걸 못 배우거나 하지는 않지요. 두터운 사회 보장 체제로 교육과 의료가 무료이고 각종 사회수당과 연금으로 기본적인 생활은 영위할 수 있게 해 주니까요. 하지만 여기에도 어느 정도 환상은 끼어들어 가 있을 거예요. 제가 직접 여행하며 본 몇 나라들은, 길거리에 노숙인들이 넘쳐났어요. 그렇게 사회보장제도가 잘 돼 있다는 그곳에서요.


  게다가 ‘자유’는 넘칠 만큼 있어요. 도덕적 엄숙주의가 아직 우리를 짓누르는 대한민국에 비해, 문화적으로 굉장히 자유로워요. 훨씬 성역도 적고 그런 만큼 다채로워요.

  ‘자유’와 ‘평등’이 그런대로 조화롭게 섞여 들어가 있는 이 사민주의 복지 국가들만큼이라도 우리는 따라가려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체제가 최선인지는 모르겠어요. 사실상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배신한 이들이 나름의 타협책으로 만들어 낸 이 체제가, 비록 많은 문제점이 있더라도 현재로서는 우리가 따라가야 할 롤모델이 아닌가 싶어요. 거기서 멈추지 말고 더 좋은 대안을,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겠지요.


  그런데 이 나라들이 지금의 체제를 그냥 뚝딱 만들어낸 게 아니에요. 지배계급, 자본가 계급과 통치 계급 처지에서는 말 잘 듣는 노동자와 시민들이 좋아요.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노동자와 시민을 길들이려 했어요. 그리고 함께하지 못하게 했지요. 뿔뿔이 흩어지게 해서 고립된 ‘개인’으로 만들어 버리려 했어요.


  그러나 그럴 때마다(위기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노동자와 시민은 뭉치고 연대했어요. 내 일이 아니어도 내 일처럼 생각하고, 어떤 한 직종의 파업으로 일상이 불편하더라도 불평은 최소한으로 하고 서로 지지했어요. 함께 했지요. ‘더불어 함께’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느슨하게나마 모두 노력했어요.      




안 되는 것들

  다시 정리해 보면, 제가 꿈꾸는 세상을 교실 상황에 적용하며 조금 더 풀어쓰면 이래요.

 

 먼저, 힘센 이가 약한 이들을 괴롭히면 안 돼요. 그리고 약자라고 차별받으면 안 돼요. 힘센 아이가 힘 약한 아이를 때리면 안 돼요. 잘 산다고 못 사는 친구를 무시하면 안 돼요. 공부 잘한다고, 똑똑하다고 공부 못하고 느린 아이를 놀리면 안 돼요. 나에게 장애가 없다고 장애인 친구를 조롱하면 안 돼요. 이런 건 정말 절대 절대 안 돼요.


  그렇게 된 게 다 본인 탓이 아니에요. 내가 공부를 잘하게 된 것도, 우리 집이 잘 사는 것도, 장애가 없는 것도 다 내가 잘나서 그렇게 된 게 아니에요. 반대로 내가 공부를 잘 못 하는 것도, 우리 집이 잘 못 사는 것도, 장애가 있는 것도 다 내가 못 나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리고 그것 자체로는 못난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이렇게 사회적 격차가 나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어요. 이 격차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 가지 방법

  이 격차를 가만히 둔다고 해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요. 인간의 역사는 격차가 벌어지는 순간 야만의 역사로 돌변했어요. 많이 가진 사람이 적게 가진 사람을 억압하고 노예로 부리기 시작해요. 원시공동체 사회에서는 뭐든 넉넉지 않았기에 똑같이 나누어 먹었어요. 힘이 약하다고, 여자라고, 아이라고 특별히 차별받지 않았어요.


  그런데 대략 청동기 시대 이후 인간의 생산력이 늘어난 순간부터 많이 가진 자와 적게 가진 자가 나뉘기 시작했고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생겨나기 시작했죠. 온갖 차별과 폭력과 전쟁의 역사는 그 이후 생겨나지요.

 

 지금이라고 다른가요. 여전히 변형된 방식의 제국주의 전쟁은(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을 보세요) 현재 진행형이에요. 그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은 많이 사라졌다손 치더라도 계급 간 갈등은, 그로 인한 차별은, 그로 인한 간접 폭력은 우리 사회에 그리고 전 세계에 만연해 있지요.


  이렇게 인간의 역사를 보건대, 사회적 격차는 가만히 두면 인간 소외로 이어지기 마련이에요. 가지지 못한 자들은 상처받기 마련이에요. 여기서 우리는 사회적 격차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첫째는, 너무나 당연한 얘긴데, 그 격차를 줄이는 거예요. 격차를 줄이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훨씬 평화로워질 거예요. 그런데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보여주었던 그런 폭력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방식으로는 안 돼요. 민주적이지 않은 방식은 결국 망하게 돼 있다는 걸 역사가 보여주고 있어요. 앞에서 이야기한 사민주의 방식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그들이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여하튼 이것은 시스템과 제도의 문제예요. 현실 격차를 무한정 뻥튀기하여 왜곡하는 자본주의의 부족함을 제도로 끊임없이 땜질해야 해요. 거기에는 소득 격차를 현실화하는 세금 제도를 손질하는 게 가장 큰 축이라 하겠지만, 사회 보장 제도를 정비하는 것도 또 다른 큰 축이라 할 수 있어요. 그 사회 보장 제도에는 교육 제도도 포함이 돼요.


  여기서 우리 교사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없을 거예요. 교사 개인은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무기력하거든요. 우리는 따지고 보면 말단 공무원이잖아요. 어떤 정책에 영향을 끼칠만한 위치에 전혀 있지 않아요. 교사로서 교육 정책과 제도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는 교원 단체나 교원 노조에 가입하거나 개인적으로 교육 관련 시민단체에 들어가 활동하는 정도일 거예요. 분명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만 한계 또한 명확해요.


  누구든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거예요. 그렇지만 우리나라 현실은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 하는 경우도 드물지만 분명 있을 거예요. 초중고 시절에는 어마어마한 사교육비가 부담스러워 사교육을 받지 못하고, 대학은 등록비가 부담돼 쉽게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거예요. 이 어마어마한 문제를 풀기 위해 사교육 시장의 문제와 대학 무상 등록금 문제를 건드려야 하는데, 교사 개인은 그 거대한 문제 앞에서 너무도 초라해요.


  둘째는, 사회적 격차를 줄이지 않더라도 그 격차 자체가 사람의 격을 높이거나 낮추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하는 거예요. 달리 말해 사람들 일반의 ‘자존감’을 높여 주는 것이지요. 한번 생각해 보면 돈이 많은 것이, 사회적 지위가 높인 것이 반드시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장해 주지는 않아요. 일반적으로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집안에서 자란 사람들이 정서적으로도 안정된 경우가 많긴 하겠지만, 때로 돈과 권력을 무기로 자기들보다 아래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갑질을 하는 경우를 우리는 심심찮게 보기도 해요. 반대로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사람이 다른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경우도 많이 보지요.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을 밟고 일어서서 많은 돈과 높은 지위를 얻는 일 그 자체일까요, 아니면 돈이나 지위와 상관없이 자기 스스로 이 세상에 우뚝 서서 어려움에 부닥친 이들을 도우며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일일까요. 전 두말할 나위 없이 뒤엣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하고 온당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말들은 때로 위험하기도 해요. 개인의 ‘자존감 회복’을 강조하는 것은, 그 본래 의도와 상관없이 문제의 원인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해요.


  사회적 격차를 못 견뎌하며 바라보는 이들이  스스로에게 문제의 원인을 돌리게 만들어 자격지심과 열등감과 열패감 속에서 허우적댈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사회적 모순을 개인의 자존감 회복으로 극복하는 방식은, 저 높은 곳에서 지배계급을 미소 짓게 할지도 몰라요.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이 모순은 해체되지 않고, 더 공고해질지도 몰라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개인의 단단한 자존감(돈이나 지위보다 더 중요한 건 서로 도우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란 믿음을 굳게 갖는 것)은 여전히 필요하며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거기서 끝내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해요.


  그 단단한 자존감으로 무장해서, 돈이나 지위를 이용해 사회적 소수자를 차별하고 억압하는 이들을 끌어내리는 거예요.


지금의 현실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옳지 않은 현실을 바꾸기 위해 끊임없이 저항해야 해요.     




교사의 의미

  여기서 우리, 교사는 비로소 힘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거대한 제도와 체제의 벽 앞에서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던 우리는 이제 다시 힘을 내야 하고, 힘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혹여 어른들에 의해 눈과 귀가 가려지려고 할 때 우리 교사들이 아이들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잠시라도 끄집어낼 수 있거든요. 물론 다시 칠흑으로 들어가겠지만요. 그렇지만 잠깐 맛본 강렬한 태양 앞에서 아이들은 변화의 씨앗을 자신들 몸속에 심어 놓게 될 거라고 믿어요. 그 씨앗을 틔우느냐 그대로 깊은 곳에 묻어두느냐는 온전히 그 아이들 몫이지만요. 그것까지야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죠.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아이들에게서 무한한 희망을 발견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교직은 신비롭기도 해요.


  또한 알게 모르게 가해지는 사회적 차별 속에서 멍들어가는 아이들을 잠시라도 우리 교사들이 보듬어 줄 수 있어요. 형이 편지에서 보여주었던 그동안의 모습들이 바로 그런 모습일 거예요. ‘온 마음을 다해 조금 더 관심이 필요한 아이들을 사랑’하려고 한 형의 모습이요.


  하지만 형처럼 나름의 사명감으로 상처가 있는 아이들을 더 바라봐주고 다독여주었던 교사가 얼마나 될지는 의문스러워요.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교사는 아이들을 보듬어주기는커녕 알량한 권력을 이용해서 되려 아이들을 억압해 왔고(물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이들의 성장을 지원해 온 훌륭하신 선생님들도 계시지만요), 2000년대 이후 교사들은 갑을 관계가 뒤바뀐 학교 문화에 적응하느라 누구를 돌볼 여유가 없었거든요. 지금도 안타깝지만, 아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기에는 교사의 상처도 만만찮게 깊거든요.


불행한 시대의 교사와 불행한 시대의 아이들, 우리를 이렇게 불행하게 만든 이유를 찾아 여기까지 왔네요. 이제는 학부모의 문제를 짚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불행한 시대를 만든 한 축, 학부모란 존재'


이렇게 온 책임을 그들에게 떠밀어도 되는 건지, 그들 또한 시대의 희생양인지, 형의 생각을 듣고 싶어요.      



2024. 10. 2. 수요일

교사 곽 노 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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