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분가분 Oct 14. 2024

'학부모 콜라주'론

우리는 소모품이 아니라 하나의 온전한 작품입니다.


노근 선생님께     


벌써 1

선생님, 제가 첫 편지를 보냈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하나요?

작년 10월, 풍요로운 가을이 저물어 텅 비어가던 어느 날의 깊은 밤이었지요. 어느새 계절이 한 바퀴 돌았고, 이곳 캐나다에서 다시 가을을 맞이했어요.

집 둘레에 있는 호숫길을 산책할 때면 낙엽이 바싹 말라가는 모습에서 바사삭 과자 씹는 소리를 엿들어요. 가끔은 달콤하고 구수한 기름 냄새가 난다고 상상하기도 해요. 어느 날은 자전거를 느릿느릿 타고 가는데 진짜 구수한 기름 볶는 냄새가 나는 거였어요. 하지만 아무리 둘레를 둘러봐도 음식을 만드는 식당이나 가정집은 보이지 않았지요. 뭐랄까요, 마음이 만들어내는 기운이 얼마나 강렬한지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어요.

네, 맞아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1년이라는 자율연수 휴직이 저에겐 분명 선물 같은 시간이었어요. 더욱이 떨어졌던 가족과 함께 보낸 시간을 통해 모호했던 제 미래에 대해서도 흐릿하게나마 밑그림을 그릴 수 있었어요. 무엇보다 선생님과의 서신교환을 통해 많은 생각들이 정리되는 소중한 시간이었요. 더불어 나날이 성숙해 가는 선생님의 생각을 읽으며 놀랍기도 했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교사의 모범을 보았어요. 여러모로 참 고마운 당신입니다.      




불행한 시대를 만든 한 축, 학부모란 존재

선생님이 편지 마지막에 쓰신 저 구절을 보는 순간, 두려움이 훅 밀려들었어요.

솔직히 동료 교사에 대한 비판을 떠올릴 때보다 마음이 더 옥죄는 느낌이에요. 그동안 학교에 있으면서 한국 교육계에서 가장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존재는 바로 학부모라는 결론을 얻었거든요.

그런데 그걸 아주 오래전에 저에게 일깨워주셨던 분이 있었어요. 저는 귀농 귀촌을 위해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진행했던 귀농학교를 다니면서 많은 인생 선배님들을 만났어요. 그때는 제가 교대를 다닐 때였는데, 잊을 수 없는 어느 형님과의 대화를 들려드릴게요.     


“교대생이니까 물어보고 싶은데, 대한민국 교육 대통령이 누군지 혹시 알아?”

“헤헤, 난센스 퀴즈 같은 건가요? 그럼 교육부 장관은 아닐 테고……”

“당연히 아니지! 조금 쉽게 생각해 봐.”

“글쎄요, 누굴까요. 손주은 같은 학원 강사 아니에요?”

“그럴까?”

“아! 알았다! 엄마예요, 전부 엄마 맘대로 하잖아요!”

“땡, 아주 비슷해. 거의 다 왔어. 한 걸음만 더 들어가!”

“잉? 에이, 몰라요. 도대체, 누군데요?”

“하하, 바로바로 누구냐면? 옆집 아줌마!”     


아, 정말이지 저 때는 사실 저 대화를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그냥 힘든 농사일 사이에 한바탕 웃음을 선사한 농담으로만 받아들였거든요. 그런데 말이죠, 제가 교사가 되고 5년 정도 지나고, 저도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하면서 저 대화의 위력을 실감하기 시작했어요. 이전 편지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한국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에 삶의 기준을 맞추며 살아가려는 경향이 너무나도 강해요. 대한민국 교육 대통령이 ‘옆집 아줌마’라는 저 형님의 진단도 같은 맥락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선생님 말씀대로 저를 포함한 모든 학부모는 시대의 희생양이면서 동시에 문제를 더 복잡하게 왜곡시켜 온 책임자이기도 해요. 하지만, 정답이 없어 보이는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을 뒤바꿀 힘을 가진 존재 역시도 학부모라는 강한 믿음을 바탕으로 저의 생각들을 조각조각 붙여 나가 볼게요. 마치 콜라주 미술 작품처럼요.




타로(Tarot)

캐나다에 와서 한국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종종 있었어요. 대부분 아내가 다니던 앨곤퀸 대학 어학 코스에서 만난 사람들이죠. 그런데 아내는 제가 타로점을 볼 줄 안다고 사람들에게 말해서 타로를 들고 자식 교육과 관련된 이야기를 자주 나누게 되었어요. 물론 저는 아이들과의 상담을 위해 타로를 공부했지 점을 보기 위한 게 아니어서 순전히 재미로 타로를 봐주었지만, 가슴 아픈 일들을 자주 듣고 보았어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아마 쉽게 짐작은 하실 거예요. 캐나다로 자식을 데리고 온 부모님들은 100% 자식을 위해서라고 해요. 그런데 캐나다에 왔다고 해서 모두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게 아니더라고요. 아이들이 원해서 온 경우는 대부분 뜻하는 방향대로 나아가지만, 부모님이 강하게 원해서 끌려오다시피 한 아이들의 경우는, 조금 그래요. 무슨 뜻인지 아시죠?

저는 2000년, 뉴 밀레니엄에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난 적이 있었어요. 대략 1년간 호주에서 지낼 때도 비슷하게 경험했던 기억이 있었죠. 그러니까 2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도 바뀌지 않는 한국 학부모들의 어떤 강렬하고도 특정한 경향성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어요. 20여 년 전 호주에서는 마약에 빠져 허우적대는 자식을 망연자실 바라보는 서울대 졸업생 부모님을 본 적도 있었지요. 캐나다에서 듣고 보았던 슬픈 일들에 대해서는 조용히 입을 다무는 게 나을 듯해요. 그래서 학부모님들께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어요.     


부모가 자식을 위한다고 하는 게 정말로 자식을 위한 것일까?’     


여기서 무엇이 문제인지는 분명하지요. 사실 하나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정말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마음을 열고 아이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면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은 아직 세상을 살아보지 않아서 잘 모른다고 그냥 단정을 지어버려요. 문제의 시작은 여기서부터 비롯되는 게 대부분이었어요. 17년 학교에서 가르쳐보니 초등학교 3~4학년만 되어도 요즘 아이들은 사실 알 건 대부분 다 알고 있어요. 그걸 모르는 건 역으로 어른들이었죠. (더구나 다가올 AI시대를 앞두고 더 우왕좌왕하는 건 어른들일 겁니다)


타로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만 더 타로에 관해 말해볼게요.

타로는 총 78장이고, 22장의 메이저 카드와 56장의 마이너 카드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런데 이 마이너 카드는 인간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를 4가지로 나누어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어요. 마치 우리나라의 오행(화, 수, 목, 금, 토)처럼 말이죠.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 세상은 불(의지-wand), 물(감정-cup), 공기(이성-sword), 흙(물질-pentacle)으로 이뤄졌다고 바라보고 있어요. 저도 사실 처음엔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캐나다에 와서 여러 한국 부모님들에게 타로를 봐주면서 깨달은 게 있어요.

타로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인간 세상을 구성하는 대부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에요. 의지, 감정, 이성(생각)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인간 세계의 참모습 가운데 75%는 쉽게 알아챌 수 없는 것들이에요. 반대로 인간들이 아등바등 매달리는 물질은 고작 25%에 불과하죠. 이 세상에서 진짜 소중한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마음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어린 왕자’의 이야기도 같은 결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예요. 마음의 눈으로 바라봐야 아이들이 진짜 원하는 걸 듣고 볼 수 있어요. 우리 어른들은 이제부터라도 ‘마음의 눈’을 크게 떠야만 해요. (한국에 돌아가면 선생님 타로도 봐 드릴게요!^^)      




원죄

아마 2011, 2012년쯤으로 기억해요. 학교 운영위원장을 맡으셨던 저의 반 아이의 학부모님께서 교장 선생님과 학교 정수기 설치 문제로 갈등을 겪으셨죠. (왜 학교에는 정수기는 안 되고 음수기만 설치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왜 어떤 학교에는 정수기를 설치해도 아무런 제재가 없는 건지 아직도 저는 알 수 없어요) 저는 저라도 뭘 해서 학부모님 마음을 풀어드려야겠다, 생각하고 슈퍼 오지랖을 부리며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그 운영위원장님과 단둘이 술자리를 만들었어요. 그때 그 운영위원장님이 제게 물었죠.


“학부모들은 모두 원죄를 가지고 있어요. 그게 뭔지 아세요?”


저는 그 질문이 무얼 뜻하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멋쩍게 머리를 긁으니 하시는 말씀이 이랬죠.


“학교에 자식을 보낸 죄로 학부모들은 학교에 요구하고 싶은 게 있어도 강하게 요구하지 못해요.”


그때는 확 와닿는 말이 아니었죠. 진짜 아이들을 위해서 필요한 게 있으면 지금처럼 강하게 학교장에게 요구하셔도 돼요, 전 이렇게 말했어요. 그런데 제가 제 자식을 학교에 보내고 나니 정말 확 와닿는 말로 바뀌더군요.


제 생각엔 학부모님 대부분은 이렇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일본에서부터 시작된 ‘괴물 부모’ 논쟁과 사례들이 한국에서도 점점 그 횟수가 늘어나고 강도가 세지고 있어요. 작년엔 ‘왕의 DNA를 가진 아이’라고 제 자식에게 특별 대우를 요구한 교육부 관료가 공분을 일으키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진짜 진짜 대부분 학부모는 그렇지 않아요. 자신의 지나친 행동이 제 자식에게 오히려 불이익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염려하시는 분들이 더 많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서이초 사건과 같은 지나친 항의성 민원의 경우는 특별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게 모든 현장 교사들의 생각이에요. 건강하고 건설적인 학부모 상담 대부분은 담임교사가 당연히 해야 하겠지만, 이른바 ‘괴물 부모’의 항의성 민원에는 그에 상응하는 특별 대처법이 이제부터라도 반드시 있어야만 해요.


무능한 교육부가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학교 현장의 책임자인 교장, 교감 선생님들께서라도 함께 연대하셔서 교사들을 지원하기 위한 실제적인 방법론을 고민해주셔야만 해요. (모두 교사 시절을 거쳐서 그 자리까지 가셨으니 동료였고 선후배였던 교사들이 얼마나 고통받는지 제일 잘 알고 계시잖아요, 제발 부탁드려요!)

  



공교육은 서비스가 아니에요

이제는 너무 고리타분한 논쟁 주제이지요. 한국의 많은 어른이 공교육은 당연히 국가로부터 받아야 할 서비스라고 생각한다고 보여요. 하지만 분명한 건 공교육은 절대로 서비스가 아니에요. 공교육을 서비스라고 인식하는 순간 공교육은 상품으로 변질해 버려요. 상품은 공장에서 일괄적인 제조 방식을 거쳐 대량으로 생산되죠. 아,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서비스 상품도 있어요. 흔히 이야기하는 전통적 산업 분류 방식에서 3차 산업에 해당하는 것들이요. 하지만 이것들도 고객의 만족과 수요를 극대화하기 위한 매뉴얼이 존재해요. 반대로 사교육은 서비스가 될 수 있겠죠. 의대 블랙홀 현상을 주도하는 한 축이 바로 사교육 시장이고, 학부모들의 불안과 욕망을 자극하는 그들만의 매뉴얼이 분명 존재하니까요.

그런데 제 경험으로 공교육에는 매뉴얼이 존재할 수 없다고 확신해요. 학교에 모여 있는 100명의 아이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매뉴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공교육이라는 영역은 하나하나의 구체적 실천 사례만이 존재할 뿐이에요. 그리고 슬프게도 그 사례들이 반드시 성공적이라는 보장도 없어요. 실패한 사례 속에서 더 나은 방법론을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찾아가는 게 현장 교사들이죠. (실패 속에서 희망을 힘겹게 찾아가는 노근 선생님 같은 현장 교사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참 소중해요)

여기서 정말 이야기하고 싶은 건 이거예요.


우리의 아이들을 건강하고 올바르게 성장시키기 위해서 학부모님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요.


만족스러운 서비스 상품을 소비하듯 학교에 내 자식만을 위한 필요를 요구하는 모습은 학교 교육 공동체를 조금씩 파괴하는 부정적 힘을 내뿜어요. 물론 내 자식에게 필요한 걸 요구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범위가 내 자식에게만 한정되어서는 절대로 절대로 안 돼요. '마음의 눈'을 더 크게 뜨셔야만 해요.


그래야 학교가 제대로 설 수 있어요. 내 아이를 위한 요구가 혹시 다른 아이에게는 피해나 상처를 주지는 않는지, 혹시 더 나아갈 수 있다면 내 아이를 위하면서 동시에 다른 아이도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지 한 번 더 생각하시고 학교에 요구하셔야만 해요.


모든 어른이 인정하듯이 학교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축소판이에요. 그래서 학교가 살아나고 있는 긍정적 사례를 접하게 되면 우리나라 사회 전체를 살릴 수 있는 희망을 엿보기도 해요. 그러니 학교 교육 공동체가 건강하게 회복될 수 있도록 학부모님께서 민원을 전달하시고 싶을 때는 한 번만 더 생각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해요.


유명한 유튜브 채널들에서 자녀 교육을 위한 조언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어요. 하지만 정작 학교는 깊은 늪에서 빠져나올 것 같지 않아요. 그건 바로 오로지 내 자식만, 내 가족만 잘 되면 된다는 좁은 생각에 갇혀 있어서 그래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무도한 자본주의 시스템의(적절한 제도적 제한 장치가 있지 않으면 자본은 탐욕을 멈추지 않아서 무도해요) 부속품이 될 수밖에 없어요. 노근 선생님께서 지난 편지에서 말씀하신 대로 이건 '저 높은 지배계급'들이 원하는 거예요. 우리를 뿔뿔이 흩어진 개인으로 만들어 모든 문제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게 해서 사회 구조의 문제를 놓치게 만드는 거죠. 솔직히 이런 말이 너무 정치적으로 들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들어요. 이걸 대한민국 정치판에서 이야기하는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의 갈등으로 몰아붙이는 순간 우리는 변화의 기회를 놓치고 말아요. 개인적 욕망과 사회적 욕망(공동체성)이 충돌하는 지점을 놓치는 순간 나 자신의 참모습을 잊게 돼요. 그래서 내 것이 아니지만 내 것 같은, 남의 눈에 잘 보이기 위한, 남보다 우월해지기 위한 나만의 욕망을 추구하다가 나도 모르게 우리 사회의 이웃들을 짓밟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제발 이런 인식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우리 어른들이(교사와 학부모 모두) '마음의 눈'을 더 크게 떠야만 해요.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소모품으로 사는 삶에서 벗어나 우리가 제 삶의 주인으로 ‘우뚝’ 서야만 해요. 그래야 학교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좋은 옆집 아줌마가 된다면?

하지만 오해하시면 안 돼요. 너무 중요해서 지겹지만 다시 한번 더 강조하면, ‘제 삶의 주인으로 우뚝 서야 한다’라는 그럴듯한 이 말은 내 자식만, 내 가족만 잘 되는 걸 말하는 게 절대 아니에요. 뿔뿔이 조각나 뒤죽박죽 어지러운 낙서 같은 학교를 하나의 이름다운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구도(방향성)를 잡아야만 해요. 그 해답은 바로 학교 교육 공동체를 건강하게 회복하는 거예요.


제가 자주 말씀드렸던 혁신학교 경험 안에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부모의 이혼으로 조부모와 사는 1학년 아이가 있었죠. 흔히 말하는 조손가정의 아이였죠. 학부모 공개 수업 때 학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책상을 뒤집어엎어버린 그야말로 통제 불능의 아이였죠. 당연히 친구들에 대한 폭력과 괴롭힘이 지속되었고, 담임교사도 어쩌지 못하는 상태가 이어지자 결국 2학기가 되어 한 학부모님이 학교에 학교폭력으로 신고했어요. (아, 그 당시 학교폭력 업무담당자가 바로 저였어요!)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당시엔 학교가 접수한 학교폭력 신고 사안을 학교 자체적으로 심의하고, 심의 결과를 내놓는 마치 법원의 역할까지 해야만 했었죠. 그런데 놀랍게도 신고했던 학부모님께서 학폭위 도중에 신고를 취소하고, 그 아이의 건강한 돌봄을 위해 학교 교육 공동체가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어요. 어쩌면 지난 편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럴 수 있었던 것은 시골이라는 지역 사회가 가진 특성이 크게 작용했어요. 시골은 그나마 아직도 농경 사회 공동체 정서가 남아있어요.


조금 자세히 설명하면 학폭위 위원 가운데 한 분이 마을에서 오래도록 교사로 생활하신 그야말로 어른이셨고, 그 어른은 문제 행동 아이의 조부모님과 오랜 인연을 가지고 계셨으며, 그 아이의 아빠도 잘 알고 있었어요. 학폭위에 함께 자리했던 문제 행동 아이의 아빠는 그 어른을 알아보시고 단박에 자식에게 무심했던 자신의 지난 과거를 인정했어요.


업무담당자였던 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학폭 업무 처리 절차가 얼마나 복잡했는지 옛날 학폭 업무담당자들 아니면 아무도 모를걸요!), 모두가 학교 둘레 마을의 어른이었던 학폭위 위원들과 함께 그 아이를 어떻게 돌봐줄 것인가 의견을 나누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지켜볼 수 있었어요.


우리는 맨날 말로만 이랬어요.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고요. 하지만 이 말의 진짜 뜻을 저는 이때 절절히 경험할 수 있었어요. 결국 그 문제 행동 아이는 조부모를 떠나 아빠와 함께 살기 위해 도시로 전학을 가게 되었죠. 물론 도시에 있는 아빠와 같이 산다고 해서 이 아이가 극적으로 변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적어도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부모와 같이 살아야 하는 게 제대로 된 삶이란 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 우리 학교는’ 과연 어떤 모습인가요?

지금 우리 학교를 되살릴 힘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해답은 간단하다고 생각해요. 서두에서 들려드린 어느 형님과의 대화를 여기에 끌어와 생각해 보면, 우리가 모두 좋은 대한민국 교육 대통령이 되는 거예요. 내가 좋은 옆집 이웃이 되면, 우리가 서로를 돌보는 건강한 이웃이 되어 준다면……


혹시, 생각만 해도 마음이 답답해질지 몰라요. 맞아요, 이건 절대로 혼자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함께 손을 잡고 같이 걸어 나가야 해요. 공동체는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가장 가까운 이웃과 함께 교육과 관련된 책이나 동화책, 동시집을 읽으며 가볍게 출발하면 좋겠어요. 일주일에, 아니 한 달에 한 번이라도요.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도 우리 대한민국에서 나왔잖아요! 맞아요, 책 모임이 딱 좋겠어요! (이참에 예전의 '기적의 도서관' 같은 건강한 책문화 운동이 재탄생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책 읽기 모임을 통해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을 위 대화를 조금씩 나누다 보면 변화의 실마리가 보일 거예요. 맨날 아이들에게 책 읽으라고 말만 하지 말고, 부모가 직접 보여주는 거죠. 내 아이의 첫 선생님도 부모이고, 아이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선생님도 부모니까요. 학교 교사는 절대로 부모를 극복할 수 없어요. 부모보다 더 훌륭한 선생님은 이 세상에 없어요. 자식은 부모의 훌륭한 모습을 가장 자연스럽게 배우며 따라가니까요.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니까요.  (학교에 오래 있어보니 자식을 보면 부모가 보이고, 부모를 보면 자식이 보이더라고요)




'학부모 콜라주'

사실 요즘 학교에서는 학부모라는 말을 잘 쓰지 않아요. 학교에서 가정으로 내보내는 가정통신문에도 ‘학부모 서명’이라는 문구 대신 ‘보호자 서명’이라고 바꾼 지도 꽤 오래되었죠. 잘 아시듯이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탄생하다 보니 학생과 함께 사는 어른이 꼭 그 아이를 낳은 부모가 아닌 경우가 생겨나기 시작한 거죠.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보호자’라는 말 대신에 ‘양육자’라는 낱말을 쓰고 있는 학교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제 생각엔 ‘양육자’라는 낱말이 ‘보호자’보다 훨씬 좋은 느낌이에요. ‘보호자’는 왠지 수동적인 느낌이 강한데, ‘양육자’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느낌이 강렬해요. 새로운 형태의 가족에 대해 우리 사회가 점점 더 수용적이고, 그들이 혹시라도 위축되지 않도록 낱말 하나를 쓸 때도 배려하려는 모습이 바로 변화의 시작이라고 봐요.


우리 사회에 더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생겨날 것이고, 더 능동적인 모습으로 ‘학부모’들이 거듭 태어날 거라고 믿어요. 그래서 낙서 같은 학교가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 부활하는 순간들이 점점 늘어날 거라 소망해요.


마치 ‘콜라주’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의 미술 작품이 기존의 관습을 깨고 무한한 상상력을 예술가들에게 불어넣어 준 것처럼 말이죠.


여기에 노근 선생님의 또 다른  ‘학부모’ 이야기를 붙여주세요.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허물었던 전위예술가처럼요. 선생님의 이야기는 새로운 오브제가 되어 수많은 교사들의 다양한 '학부모 이야기'를 불러올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의 '학부모 콜라주' 작품은 서로 다른 결을 가진 이질적 오브제가 화학작용을 일으켜 끊임없이 의미를 확장하는 초대형 작품으로 재탄생될 거예요. 교사들은 본질적으로 모두 예술가니까요.


2024. 10. 14. 월요일

교사 권 이 근 드림


                     

이전 14화 내가 살고 싶은 세상, 내가 꿈꾸는 교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