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서이초 사태 이후 ‘괴물’ 학부모에 너무 몰입해 있어서 모든 학부모가 ‘괴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우리가 겪은 집단적 트라우마가 우리를 그렇게 몰아가고 있어요. 우리는 일상적으로 괴물 학부모를 만나고, 그러한 상황이 작년 교권 사태와 만나면서 우리의 감정을 헤집어 놓고 증폭시켜 놓은 탓이죠. 괴물 학부모를 만나 극단적 선택을 하는 동료 교사를 접하며 공감하고 함께 슬퍼하면서 우리의 마음은 균형을 잡기가 힘들어졌어요. 이해 안 되는 건 아니지요. 우리가 이렇게 기울어진 데는 충분히 그럴만한 상황과 맥락이 있어요.
그러나 마음이 조금이라도 추슬러졌을 때 한 번쯤 되돌아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요. 정말 우리 주위는 그런 괴물 학부모만 있는지를 말이에요. 선한 학부모, 우리에게 힘을 주는 학부모, 우리를 지지하고 응원해 줄 학부모는 정말 없는지를. 그런데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겠어요. 설령 있다손 치더라도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우리는 괴물 학부모에 휩싸여 있기에 그들이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하는 게 훨씬 중요하지 않냐고. 그 또한 일리 있는 말이에요.
하지만 우리 머릿속이 온통 괴물 학부모로 차 있어서 학부모들 모두를 괴물 학부모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학부모를 대할 때 처음부터 부정적인 감정으로 대할 테고 쉽게 좋은 말이 나오지 않을 거예요. 이 부정적인 기운은 고스란히 학부모에게 전해질 테고, 처음에 우리에게 충분히 협조하고 함께할 마음이 있었던 학부모조차 그 기운을 느껴 같이 부정적으로 변하기 쉬울 거예요. 그렇지 않은 학부모조차 우리에게 마음이 돌아서고 점차 괴물 학부모가 될 가능성까지 있게 되겠죠. 학부모의 그 부정적 기운을 우리가 다시 느껴 우리는 학부모에게 더 방어적으로 변하고, 그 방어적 기운을 느낀 학부모는 다시 더 방어적으로 바뀌어 날카롭게 우리를 공격하게 될 거예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악순환이 계속 이어지는 거죠. 이게 과연 옳은 방향일까요?
사실 형 말처럼 대부분 학부모는 선해요. 자식이 볼모로 잡혀있는 듯한 그 속박 때문에 그런 건지는 몰라도 협조적이거나 크게 교사의 교육에 대해 간섭하지 않는 학부모가 대부분이에요. 일부, 정말 일부 괴물 학부모에게는 단호하게 대할 때도 있어야겠지만 그 힘을 대부분의 선하고 협조적인 학부모에게 빼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차라리 그들의 힘을 모아 든든한 우군을 만드는 게 훨씬 좋다고 생각해요.
괴물 학부모의 탄생
하지만 괴물 학부모가 이전보다 많아진 건 확실해요. 교사에게 함부로 막 대하거나 선을 넘는 요구나 민원을 넣는 부모들이 많아진 것까지 부정할 순 없어요. 이런 부모들이 많아진 건 왜일까요?
첫째, 교권의 약화와 관련이 있어요. 예전에는 교사의 처우가 막 좋다고 할 순 없을지언정 학교에서 교사의 권위가 약하지는 않았어요. 아이들도 교사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고(때리니까요) 학부모 또한 마찬가지였어요. 내 아이에게 가해지는 폭력(체벌)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고 그냥 그러려니 했어요. 학교폭력이 일어나도 역시나 그냥 그러려니 하며 ‘애들은 다 그러면서 크는 거지’하고 생각하고 넘겼어요. 이때의 문화가 결코 옳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러나 체벌이 사라지고 교사의 권위가 약해지면서 학생들도, 학부모들도 교사를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교사에게 함부로 대해도 교사가, 그리고 학교가 제재할 수단이 없다는 것을 알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어요.
둘째, ‘내 새끼 지상주의’가 만연한 탓이에요. 소설가 김훈은 중앙일보 2023년 8월 4일 자에 “[김훈 특별기고]'내 새끼 지상주의'의 파탄… 공교육과 그가 죽었다”라는 글을 써 ‘내 새끼 지상주의’라는 말을 널리 퍼뜨렸어요. 이 글을 쓰며 김훈은 공감과 지지도 많이 받았지만, 욕도 많이 먹었어요. 글에서 조국 전 법무부 장관(현 국회의원)을 예로 들며 비판의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에요. 조국을 지지하는 이들은 이 글이 꽤 불편했을 겁니다.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여지가 다분한 조국 관련 이야기는 여기서 특별히 언급하지 않을게요. 다만 그 부분만 뺀다면, 전 김훈의 진단이 꽤 적확했다고 생각해요.
글에서 김훈은 이렇게 말해요.
“‘악성 민원’의 본질은 한마디로 한국인들의 DNA 속에 유전되고 있는 ‘내 새끼 지상주의’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내 새끼’를 철통 보호하고 결사옹위해서 남의 자식을 제치고 내 자식을 이 세상의 안락한 자리, 유익한 자리, 끗발 높은 자리로 밀어 올리려는 육아의 원리이며 철학이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나의 자식이 겪게 되는 작은 불이익이나 훼손을 견디지 못하고 사회관계망 전체를 뒤흔들어 버린다. 교실에서 벌어지는 아이들 사이의 사소한 다툼이 ‘내 자식’을 편드는 부모의 싸움으로 확전 돼 교사를 괴롭히는 사례는 흔하고, ‘내 자식’을 편들며 달려드는 학부모의 태도는 울면서 떼를 쓰는 아이와 같다고 경험 많은 교사는 말했다. 이렇게 해서 ‘내 새끼 지상주의’는 자식을 명품 시계나 고가 핸드백처럼 물신화한다. 이것은 이제 이 난세의 생존술이고 이데올로기다.”
김훈은 내 새끼 지상주의가 ‘한국인들의 DNA 속에 유전’되고 있다고 얘기하고 있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죠. 한국인이라는 특정 민족에 그게 유전되는 문제라면 왜 유독 과거에는 심하지 않았던 문제가 지금 이렇게 크게 터져 나온 걸까요? 자조적인 표현이었겠지만 그의 과장법이 조금 아쉽기는 해요.
유전이라는 분석보다는 사실은 자본주의가 극단적으로 치달으면서 ‘천민화’되는 경향과 맞물리며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저는 봐요. 자본주의의 한계는 명확해요. ‘다른 이들과 함께하는 것’보다는 ‘내가 잘 살고 보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아요. 물론 생존은 중요해요. 그런데 생존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어요. ‘더불어 같이 생존’하는 방법도 있겠고, ‘나만 혼자 생존’하는 방법도 있을 거예요. 자본주의는 볼 것도 없이 ‘나만 혼자 생존’하는 방식을 추구해요.
자본주의의 이런 위험성 때문에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반성하며 수정·보완을 거쳐 현재까지 왔어요. 그러나 반성하는 과정에서 삐거덕거리기도 하며 다시 예전 자본주의로 회귀하기도 해요. 우리의 자본주의는 어떤가요?
너무 빨리 성장에 목매달다 보니 제대로 반성할 기회가 많이 없었어요. 그 결과 탄생한 게 저는 ‘내 새끼 지상주의’라고 생각해요. ‘내 새끼’만 잘 되고 보는 것, ‘내 새끼’에게 조금이라도 흠이 생기는 걸 못 견디는 그런 마음들. 그 결과, ‘괴물 학부모’가 탄생했다고 저는 생각해요.
‘내 새끼 지상주의’의 예
그런데 학부모의 ‘내 새끼 지상주의’는 정말 ‘내 새끼’를 위하는 길인 걸까요? 그리고 정말 아이를 위하는 애끓는 마음으로 그러는 게 정말 맞는 걸까요? 처음 시작은 그랬을 수 있어요. 자기 아이를 위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처음에는 아이에서 시작한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부모의 문제가 돼요. 끝내는 부모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를 학교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어요.
한 번은 그런 경우가 있었어요. 저희 반 여자아이 A와 다른 반 남자아이 B는 같은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서 각각 자기들 무리의 친구들과 따로 놀고 있었어요. 그러면서 놀이터에 있는 놀이 시설을 같이 이용하게 되었는데, 그 놀이 시설에서 충돌이 있었어요. 직접적으로 손으로 때리거나 한 건 없었어요. 다만 여자아이 A는 남자아이 B에 의해 간접적으로 맞았어요. 놀이시설물에 의해 맞았다고 해요. 제가 보기엔 여기에 어떤 특별한 고의가 있었다고 보이진 않았어요. 고의가 없었더라도 잘못은 잘못이지만요.
어찌 보면 쉽게 끝날 수도 있는 사건이었어요. 선생님들이 ‘교육적으로’ 해결하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어요. 그러나 그렇게 쉽게 끝나지 못한 까닭은 오직 ‘학부모’들 때문이었어요. 피해 학부모가 문제를 ‘학폭’으로 넘겼고, 가해(?) 학부모는 아이의 잘못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거든요. 학폭 심의 과정에서 학교 측의 중재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고, 양쪽 부모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죠.
사실 선생님들은 사건 초기에 관련 아이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 이야기를 듣고 사과하는 자리도 마련했었어요. 다툼과 화해의 과정에서 가해, 피해가 나눠지기는 했지만, 양쪽 아이들 모두 조금씩은 잘못이 있었기에 모두 서로에게 사과하는 말을 건넸어요. 그 과정에 사과를 선생님들이 강요하거나 하는 일은 절대, 결코 없었어요. 만약 학부모들의 개입이 없었다면 여기서 사건은 무난히 해결되었을 거로 생각해요. 물론 아물지 않는 상처가 몸과 마음에 남아있지 않는지 계속 살펴봐야 하겠지만요.
그러나 그날 당일 A 아이의 부모님에게 전화가 왔어요. 가해자 아이와 그렇게 한 자리에 같이 있게 하면 어떻게 하냐, 피해 아이 입장에서는 굉장히 두려운 일이다, 사과를 그렇게 함부로 시키면 어떡하냐, 억지로 사과해야 하는 분위기에서 아이가 억지로 사과했다며 따지기 시작하는데, 진땀이 마구 흘렀어요.
가해자, 피해자를 한 자리에 있게 하지 않는 것, 취지는 참 좋아요. 그게 맞는 것 같아요. 그러나 사건의 크고 작음을 따지지 않고 무작정 분리가 답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극심한 폭력에 시달려 벌벌 떠는 아이에게 가해자 아이를 앞에 앉히는 건, 그것 자체로 폭력이고 위협이지요. 이런 경우라면 당연히 가해, 피해 학생을 한 자리에 놓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해당 사건은 그런 사건이 아니었어요. 피해 학생이 자신이 입은 피해를 자기 말로 또렷하게 이야기할 만큼 그 자리는 위협적인 자리가 아니었어요. 선생님들도 여럿이 함께 자리에 있었기에 더더군다나 가해 학생의 위협이 통할 자리가 아니었어요.
학생 간에 다툼으로 문제가 생기면, 각각 분리하여 따로 이야기를 들어봐야 할 순간도 있지만, 함께 모여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서로의 처지를 헤아리며 풀어가야 할 순간도 있어요. 어떤 방법이 더 효과적인지는 학교 안에서 선생님들이 판단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교육적인 해결을 할 수 있도록 믿고 지지해줘야만 해요. 너무 교사 입장에서만 얘기한 걸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학부모의 개입은, 학부모의 요구는, 학교의 교육적인 해결을 충분히 살펴보고 해도 늦지 않아요. 학부모가 어떠한 문제 제기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다만 학부모의 섣부른 개입이, 문제를 훨씬 어렵고 복잡하게 만드는 경우를 저는 너무 많이 봤어요.
저는 그 이후로 그 학부모의 민원 겸 하소연 전화를 수도 없이 받았어요. 퇴근 전, 퇴근 후 가릴 것 없이 전화가 왔거든요. 심지어 한밤중에 통화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통화를 한번 하면 1시간은 기본이었어요. 너무너무 힘들었어요.
문제 상황을 대하는 부모의 태도는 아이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걸 느꼈어요. 곧잘 사과까지 했던 그 A 학생은 다음 날 태도가 바뀌어 자기의 사과가 억지였다는 듯이 말했어요. 사건 전에는 밝고, 명랑했던 그 아이가 그 이후로는 사소한 것에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모습으로 변했지요. 부모의 모습을 닮아가는 그 아이가 저는 너무나도 안타까웠어요.
두 아이 사이의, 아니 정확히 말하면 두 부모의 힘겨루기 후 어떤 결과가 났을까요? 사건이 일어난 게 2학기 말이었고, 종업식을 할 때까지 사건은 끝나지 않았어요. 들리는 말에 의하면 남자아이 B는 학폭에서 몇 호인 지는 모르지만, 처분이 났고, 강제 전학 처분이 난 것이 아님에도 그 아이는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중요한 건, 피해 학생 A 또한 전학을 갔다는 거예요. 별거 아닌 일이 그렇게 크게 번졌으니 이 학교에서의 부정적 기억을 떨쳐 버리고 싶었던 걸까요? 결과적으로 둘 다 전학을 가고 사건이 끝이 난 겁니다.
그 두 학부모는 정말 ‘내 새끼’를 위한 행동을 한 걸까요? 고작 이런 결말을 얻기 위해서 그 두 학부모는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서로를 죽일 듯이 바라보며 달려든 걸까요?
학교를, 선생님을 조금만 더 믿어주세요
너무 안일한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학교에서 일어나는 아이와 관련한 웬만한 일들은 그냥 선생님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교사와 학교가 아이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어떡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정말 큰 일이라면 당연히 따져 물어야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일들은 큰일이 아니에요. 큰일이 아닌데도 학부모들은 큰일로 느껴 직접 개입하는 게 문제예요. 자기 아이 일이니 다 큰일로 느껴지는 건 한편으로 이해는 돼요. 그렇지만 그게 오히려 아이 성장에 방해가 된다면, 부모의 그런 행동들은 멈추는 게 옳아요.
그렇다고 부모가 방관하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에요. ‘직접 개입’을 최소화하라는 이야기예요. 저는 이런 경우를 너무 많이 겪었는데, 정말 뜬금없이 갑자기 학부모한테 연락이 와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우리 아이가 누구 때문에 힘들다.’
‘누가 자꾸 이러저러한 행동을 해서 우리 아이가 불편해한다.’
정작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말이죠. 이럴 때 많은 교사는 자기에게 책임을 돌리기도 해요.
‘아,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내가 관심을 두지 않아 몰랐구나!’
하지만 이건 교사 잘못이 아니에요. 물론 교사가 미리 살펴서 알 수 있었다면 더 좋긴 해요. 그러나 교사가 20명 넘는 아이들의 모든 상황을 다 알 수는 없어요. 그건 사실 불가능에 가까워요.
아이에게 어떤 문제가 있으면 부모가 교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건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교사가 모든 상황을 다 알고 미리 해결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죠. 이런 경우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아이가 직접 스스로 선생님에게 자기의 불편함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게 기본입니다!
물론 소심하고 내성적인 아이라 선생님에게 잘 이야기 못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선생님에게는 차마 이야기 못하고 부모에게만 말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어요. 이럴 때 부모는 바로 선생님에게 전화를 거는 게 아니라, 아이에게 먼저 물어볼 수 있어야 해요.
첫 번째로, 네가 스스로 넘길 수 있는 문제인지(아이들은 때로 해결해 달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냥 공감받고 싶어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로, 넘길 수 없는 문제라면 너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지를 말이지요.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을 부모님이 함께 고민해 주면 더욱 좋아요. 나를 불편하게 한 그 친구에게 직접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지도 함께 이야기한다면 말이죠. 그리고 격려해 주고 혼자서 잘해왔을 때 칭찬해 주고 기뻐해 주면 됩니다!
만약 혼자서 해결하기 힘들다면 선생님에게 직접 아이가 이야기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면 좋겠어요. 선생님의 도움을 받도록 말이죠.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선생님에게 어떻게 얘기하면 좋을지 함께 고민해 주면 좋겠어요. 스스로 선생님에게 얘기하고 문제가 해결됐다면 역시나 함께 기뻐하고 칭찬해 주면 최고의 해결 방법이 될 거예요. 아이가 세상에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자존감을 키워주는 방법이 별 게 아니에요. 그것은 자기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면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부모의 개입은,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았을 때 하는 거예요. 그런데도 많은 부모님이 이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곧바로 개입하려 해요. 교사에게 전화해 고래고래 따지듯 물어요. 모든 부모는 나의 행동이 내 아이의 자립을 방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꼭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봐야 해요.
학교의 재탄생
학부모 문제, 참 어렵습니다. 형이 말한 것처럼 아이들을 위해서, 올바른 교육을 위해서는 학부모와 함께 가야 하는데, 세상에는 정말 함께 가기 힘든 분들이 애석하지만 존재해요. 그런 부모님과는 잠시 거리를 둬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교사들이 개인 번호를 공개하지 않고 소통을 최소화하려는 까닭도 그런 분들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회피하는 방식으로만 치닫지 않았으면 해요. 저는 올해부터 핸드폰 번호를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2주에 한 번씩 학부모 편지로 소통하고 있고, 학급 SNS 커뮤니티에 학급 사진을 올리며 댓글과 좋아요도 많이 달아 달라고 요청하고 있어요. 이런 저의 소소한 노력이, 저의 진심이 그분들께 가닿았으면 정말 좋겠어요.
다시 한번 부탁드리지만, 학교를 선생님을 조금만 더 믿어주시면 좋겠어요. 학교는 생각보다 안전한 곳이에요. 물론 학교 안에서 상처가 되는 다툼이나 갈등이 생길 수 있어요.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극복해내야만 하는 일들이에요. 더구나 학교에서 생기는 다툼이나 갈등은 대부분은 아이들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수준의 일들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아이가 겪고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문제들을 부모가 일일이 개입하고 해결해 준다면,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갈 힘을 아이에게서 빼앗는 결과가 돼요. 이 또한 학부모님께 진심으로 가닿기를 소망하며 저의 ‘학부모 콜라주’ 작품은 여기서 마칠게요.
수많은 현장 교사들의 진솔한 학부모 이야기들이 줄줄이 이어져 형의 이야기대로 학교의 부활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환해졌으면 좋겠어요.
이제 곧 형도 자율연수 휴직 기간을 마무리하고 학교 현장으로 돌아올 때가 되었네요.
어느새 1년이 훌쩍 지나버렸어요. 어땠어요? 형의 캐나다 생활은요.
참 좋은 시간이었다는 형의 편지글은 읽었지만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그리고 어떨 것 같아요? 앞으로 다시 마주하게 될 형의 교실은요.
서이초 사건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우리들의 학교'를 어떻게 품어 안을지 궁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