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편지에서 사실 다루기로 한 ‘교사 비판’ 얘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 이번에는 제가 조금 서둘러 형에게 편지를 보내고자 합니다.
하, 교사 비판이라……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작년 7월 18일 서이초 선생님의 안타까운 죽음 이후 우리 모두는 집단적 우울감에 빠졌습니다. 함께 토닥토닥하며 위로하기도 하고, 똘똘 뭉쳐 30만에 달하는 교사들이 광장에 모여 뜨겁고 슬픈 함성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교권 5법 개정에 성공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문제가 온전히 해결된 건 아닙니다. 물론 그 수가 줄어든 건 확실하지만 주위에는 여전히 도를 넘는 아이들과 학부모들로 인해 괴로워하고 고통받는 선생님들의 이야기가 들립니다.
괜히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제 귀에 직간접적으로 들리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와중에 교사 비판은, 차마 하기 힘든 일이긴 합니다. 상처받은 분들께 또 한 번 생채기를 내는 일이 아닌가 하는, 죄송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가 지금 어려움에 처해 있어 똘똘 뭉쳐 있는 상황이더라도 우리 안의 문제점을 무작정 억누르거나 말하지 못하게 하는 건 장기적으로 이로울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외부의 적에 더 힘 있게 맞서기 위해서라도 우리 안의 문제를 차분히 돌아보는 건 필요합니다. 전략적으로도 빌미를 주지 않을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조심스러우나 그래도 용기를 내어 꺼내 보고자 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교사들의 문제 중 하나는 ‘여전히 권위적인 방식과 태도’로 아이들을 대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반발하실 분들이 꽤 있을 걸로 압니다. 가뜩이나 체벌도 사라지고 제 세상이 된 듯 어떤 지시나 통제도 따르려고 하지 않는 아이들이 늘어가고 있는데, 그나마 좀 무섭게 하고 혼을 내야 따를까 말까 하는데, 그걸 가지고 ‘권위적’이라는 표현으로 매도해야 하겠느냐 하는 반발 말입니다.
그런 말들도 저는 충분히 이해가 가긴 합니다. 저 또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수없이 들었던 생각이거든요. 좋게 좋게 대하면 끝없이 기어오르는 아이들, 그나마 무섭게 해야 말을 듣는 아이들을 수없이 봐왔으니까요.
체벌에 의존해 아이들을 지도했던 문화에서 체벌이 사라진 건 교사들에겐 아노미 상황이었을 겁니다. 일대 혼란이었겠지요. 저번에도 말씀드렸듯이 그 빈 공간을 치열한 고민으로 채웠어야 했어요. 교육 당국은 아무런 대책 없이 체벌을 없앴을 게 아니라 그것을 대체할 만한, 나름 교육적인 훈육제도,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생활지도 방법을 만들어냈어야 했어요.
그러나 그러지 않았지요. 교사들은 이제 아무런 힘도 없는,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가 돼 버렸습니다. 체벌을 할 수 없으니(거듭 말하지만, 체벌이 사라진 건 우리 교육이 한 단계 나아간 거라고 생각합니다) 넘치는 카리스마로 아이들을 제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도박적 성격이 있습니다. 내가 카리스마를 나름 매력적으로 잘 발휘해서 아이들을 끌고 올 수 있으면 다행인데, 그게 실패해서 겉으론 무서운 거 같은데 아이들은 속으론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 경우도 있거든요. 빈틈이 보이는 사이로 아이들은 반항을 하기 시작하고, 그럼 오히려 더 큰 교실 붕괴로 이어지기도 하지요. 선생님을 우습게 보고 대드는 게 일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건 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저는 중고등학교 시절 선생님들의 폭력적인 행동과 말, 권위적인 태도가 신물이 날 정도로 싫었습니다. 거기에 역사 속 현대사의 어두운 독재 정권을 치를 떨며 비판했던 터라, 저는 민주적인 교사, 친근한 교사, 권위적이지 않은 교사가 되고 싶었지요. 그때는 ‘민주적인 교사’가 어떤 교사인지, 어찌 보면 깊은 고민도 없이 치기 어리게 첫 교단에 섰던 것 같아요.
결과는 어땠을까요. 정말 처참했습니다. ‘권위적이지 않겠다!’라는 다짐 말고 아무런 준비도 없었던 저는, 곧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친절하고 부드럽게만 대하니 아이들은 지켜야 할 선을 넘고 또 넘었습니다. 허락 없이 제 물건을 만진다든지, 저한테 따지듯이 얘기한다든지, 보란 듯이 핸드폰을 켜서 사용한다든지(초등학교에서는 핸드폰을 학교에서 꺼 놓는 게 보통이지요) 하는 일들이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한 선택은 뭐였는지 아시나요?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아니라, 제가 학창 시절 당했던 방식으로, 소리치고 호통치는 방식으로 돌아가는 거였습니다. 몇 번 말해도 조용해지지 않는 아이들을 보고 소리치고 명령했습니다. 그렇다고 애들이 말을 잘 들었을까요. 화도 내 본 사람이 한다고 초창기의 저는 모든 게 미숙했습니다. 아이들은 제 빈틈을 파고들어 교묘하게 말을 안 들었습니다. 제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하지만 시간이 흘러 다행스럽게도(?) 저의 화내는 모습이 비교적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이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어떤 순간에 어느 정도로 화를 내야 할지 완급조절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 마음속 자괴감이 사라지지는 않았었지요. 무언가 마음은 계속해서 허했고 찝찝했고 불편했습니다. 아이들과 만나는 게 충분히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예전보다 아이들이 나를 무시하는 건 줄어드는 것 같긴 한데, 나도 아이들도 서로를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고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였습니다. 아이들과 어떻게 만나는 게 좋을지,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학급 운영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많은 공부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연수를 듣기 시작했고 배우고 또 배웠습니다. 배움은 조금씩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만족할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미약하나마 예전처럼 화를 내는 게 기본이 되는 모습으로 아이들을 만나지는 않았습니다. 아이들을 ‘존중’하면서 만나는 방법들을 앞서 실천하고 계셨던 많은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조금씩 바뀌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위에서 주저리 떠들었던 이야기를 들은 많은 교사들의 험악한 소리가 들립니다. 너만 잘났냐고, 그래서 당신 교실은 얼마나 잘 굴러가고 있냐고. 사실 부끄럽지요. 그래도 화를 덜 내는 대신 ‘학급긍정훈육법(PDC)’에서 말하는 ‘친절하며 단호한’ 모습으로 바뀌려고 노력 중입니다. 화내는 걸 줄이고 그 자리에 ‘친절하며 단호한’ 걸 넣는 방향으로요.
아마 많은 분들이 또 그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요즘 아이들은 가뜩이나 지켜야 할 것들도 안 지키고 자기 멋대로인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혼낼 때는 혼도 나고 그래야 하는데 ‘존중’만 하면 아무것도 못 가르칠 거라고. 일부 수긍이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존중’하며 가르친다는 것이, 아이의 잘못을 눈감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단호함’을 보여야지요. 그리고 책임질 수 있게 해야지요. 여기서 중요한 건 ‘단호함’이 곧 ‘권위적으로 화내고 호통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지요. 안타깝게도 많은 선생님들에게 지금 제가 얘기한 문제의식이 가닿기는 의외로 참 힘든 것 같아 이제 말을 좀 줄여야겠습니다.
당연히 아이들을 존중하며 큰 소리 내지 않고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많다는 걸 압니다. 그러나 제가 보고 들은 현실에서는 여전히 무섭고 엄하게 하는 것을 기본으로 두고 가르치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으십니다. 무서워야 할 때도 있고 엄해야 할 때도 당연히 있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그게 기본값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사가 힘이 없어 점점 주저앉는 시대에 교사들 힘 빠지게 하는 소리만 나불댄 것 같아 참 조심스럽고, 상처받을 선생님들이 계실까 죄송하기도 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진짜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교사 비판 두 번째는, 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전체주의 문화’입니다. 전체주의 문화라고 하니깐 뭔가 대단한 것 같은데, 쉽게 표현하자면 ‘옆 반이 튀는 걸 보아 넘기지 못하는 문화’입니다.
혹시 형은 그런 적 없으신가요? 형 반만의 특색 있는 무엇을 하려고 할 때 같은 학년 선생님들의 떨떠름한 표정을 본 경험 혹시 없으신가요? 형은 작은 학교에 주로 계셨고 혁신학교에 계시다 보니, 어쩌면 의외로 그런 경험이 없을 수도 있겠네요. 저도 그렇다고 뭐 대단하게 학급 운영을 특색 있게 운영한 건 아닐 뿐만 아니라 정말로 좋으신 동학년 샘들을 많이 만나 특별히 저희 반 학급 활동을 하는데 지장이 있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민이 되었던 순간들은 종종 있긴 했습니다.
예를 들어 여름이 되어 덥고 또 더운 날, 저는 아이들과 꼭 물총놀이를 합니다. 나름 환경을 생각한다고, 물총의 크기 차이, 질적 차이로 나타나는 ‘계급별 격차’를 없애겠다고, 누구나 똑같이 500ml 페트병을 재활용해 사용하도록 하지요. 뭐 어찌 보면 크게 대단한 활동은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눈치가 보이는 건 사실입니다. 선생님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 중 하나가 “옆 반은 이런 거 하는데 우리 반은 왜 안 해요?”라는 아이들의 항의성 발언이거든요. 혹여 내가 이런 활동을 함으로써 옆 반에서 아이들의 항의성 발언이 나온다면 여간 미안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물총놀이를 하기 전에 눈치 보며 옆 반 선생님들께 허락을 구하듯 해도 되냐고 묻고 한 적도 있습니다. 사실 허락받고 할 일은 아닌데 말이지요. 다행히도 동학년 선생님들은 당연히 해도 된다고 말씀해 주셔서 안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별일 없이 넘어간 경우가 많지만, 함께 공부 모임을 하는 선생님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른 동학년 선생님이 직접적으로 불편함을 내비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혼자서 그렇게 ‘참교사’처럼 가르치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요.
언젠가부터 제일 무서운 게 ‘민원’이 돼버린 세상이지요. 아이들의 민원(“옆 반은 저거 하는데……”)도 무섭고 보호자의 민원도 무섭고 모두 무섭습니다. 선생님들이 본인 뜻대로 교육을 펼치기가 참으로 어려운 세상이 되었지요. 그러다 보니 옆 반이 하는 활동이 튀지 않기를 바랍니다. 불똥이 튀어 제발 나에게 민원이 오지 않
기를요.
하지만 이런 모습이 제대로 된 모습은 아닙니다. 옆 반이 하는 활동이 튄다고 고깝게 보지 말고 좋은 활동이라면 나도 익혀 우리 반에도 적용해 보려고 노력하는 게 훨씬 좋은 모습이 아닌가요. 지금은 무언가 시기 질투하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되어 참 보기가 안 좋습니다. 이 역시 모든 학교에 모든 동학년이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런 경우보단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사 생활하면서 은근히 한 번쯤은 다들 느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뭐든지 함께 하거나, 아니면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를 고르기를 강요하는 전체주의 문화가 우리 안에 도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교사 비판 세 번째는, ‘교육자보다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우선하는 태도’입니다. 이 또한 참 조심스러운 부분입니다. 교육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는데, 교육을 하라니요. 조금만 열심히 하려고 하면 오히려 민원이 들어오고 심지어 아동학대 신고까지 들어오는 판인데 누가 교육을 하려고 하겠어요? 이건 또 뭔 소릴까요.
예를 들면 이런 거지요. 아주 비근한 예로, 아이들 활동한 사진을 부모님들께 보여드리고 싶어 열심히 찍어 학급 SNS(학부모 밴드, 클래스팅, 하이클래스 따위)에 올렸어요. 그런데 이걸 보면서 학부모는 ‘우리 선생님 바쁘신데 사진까지 올려주셔서 감사하다’가 아니라(물론 그런 분들이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 우리 아이 사진은 없냐’, ‘왜 우리 아이 사진은 이렇게 이상하게 나왔냐’, ‘우리 아이만 왜 이렇게 멀찍이 떨어져 있냐.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니냐’고 꼬투리를 잡으며 민원을 넣는 거죠.
아주 최근 뉴스를 하나만 볼까요? 2024년 6월 25일에는 이런 내용의 기사가 떴어요.
“전북교총에 따르면 사건은 지난 3월 전북 군산시의 한 중학교 1학년 교실에서 벌어졌다. 당시 학생 간 욕설이 오가는 다툼이 발생했고 이에 A 교사 등은 “서로 잘못이 있으니 사과하고 끝내자”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욕설을 들은 학생이 사과하는 것을 거부했고, 학생 학부모는 A 교사 등 2명을 아동학대로 경찰에 신고했다.” (“‘서로 사과해’ 중학생 싸움 말린 교사, 아동학대 혐의로 송치”, 2024.6.24. 서울신문)
아직 판결이 나지 않은 사건이라 속단하긴 힘들고, 혹여나 교사의 미숙한 대처가 분명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어디 이게 아동학대로 신고할 일인가요? 게다가 경찰은 이 건을 아동학대로 보아 검찰에 송치까지 한 상태입니다. 교권 5법이 통과됐어도 여전히 현실은 이렇듯 시궁창입니다. 대체 학교에서 우리가 무슨 교육을 할 수 있을까요?
많은 교사들이 그래서 더욱 움츠러들고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교육을 하면서 생기는 스트레스를 교육 외적인 것에서 찾으려 하지요. 아이들을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이 직업을 가지면서 누릴 수 있는 복지를 최대한 누려보자는 쪽으로 흐르게 되지요. 그리하여 교사하면서 다른 일을 하는 ‘겸직’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습니다. 교직 외 소득을 창출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에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어요. 심지어 ‘교사 N잡 백서’라는 책까지 나올 정도니까요. (제가 이렇게 언급함으로써 이 책에 대한 오해를 줄 수도 있을 것 같아 말씀드리지만, 이 책 목차를 살펴보니 교육과 관련한 N잡 내용이 상당합니다. 그래서 마냥 비판할 수만은 없는 책이지요. 다만 현 상황을 잘 나타내는 제목이라 가져왔습니다.)
그러면서 교육과는 점점 멀어지는 교사들이 늘어나는 현실인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 몰입하는 시간을 밀어내는 대신, 나 자신의 복지와 워라밸만 챙기려는 교사들이요.
앞서도 말했지만 이런 경향성을 무작정 비판할 수만은 없을 것 같아요. 이건 사실 교사관 중 ‘성직관’ 혹은 ‘전문직관’ 대 ‘노동직관’의 대립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우리는 성직이 아니다. 교육할 수 있는 환경이 하나도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뭘 어쩌란 말이냐. 우리가 먼저 살 수 있어야 교육이고 뭐고 할 수 있는 것 아니냐. 교사가 행복해야 아이들도 행복하다.’
이런 아우성들이 넘쳐납니다.
저는 위의 교사관이 딱 한 가지로 정립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상호 대립이 아니라 상호 보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성직관’(혹은 전문직관)을 우선시한다고 해서 ‘노동직관’을 버리면 안 되고, ‘노동직관’(혹은 전문직관)을 우선시한다고 해도 ‘성직관’을 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먼저 ‘노동직관’을 살펴보면, 우리 교사의 일을 하나의 노동으로 보는 관점이죠. 아직도 ‘교사가 어떻게 노동자냐?’라고 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교사가 노동자라는 건 이제 어느 정도 일반화된 상식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도 정당한 노동(아이들을 가르치는 노동)을 하고 ‘임금’을 받잖아요. ‘전교조’가 탄생하고 활동한 시절만 해도 ‘교사가 노동자야?’하는 기울어진 시각이 많았지만, 이제는 ‘교사노조연맹’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노조들이 있고 일반화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우리가 노동자로서 안정된 교사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여러 여건과 환경이 갖춰져야 하는 건 너무 당연한 겁니다. 우리의 처우와 대우가 너무 열악한데 그저 무작정 ‘아이들을 가르치는 건 숭고한 일이니 잔말 말고 아이들을 가르쳐라’라고 하는 건(일종의 극단화된 ‘성직관’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저 희생일 뿐이죠. 그것도 강요된 희생이요. 강요된 희생으로 이루어진 교육이 얼마나 튼튼하겠어요. 얼마나 보람차겠어요. 얼마나 의미가 있겠어요.
어느 한쪽으로 쏠린 관점은 건강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작년 서이초 사건의 반작용으로 많은 사람들의 교사관이 ‘노동직관’으로 꽤 많이 치우쳐진 느낌입니다. 그동안 교사들이 자신들의 노동권에 크게 관심도 없었고, 노동자로서의 자의식이 부족한 측면도 있었기에 어느 정도 치우쳐도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여러 가지 극단적인 사건으로 인해 급격하게 치우치다 보니 건강하게 균형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어쨌든 중심이 되어야 할 건 ‘교육’이고 ‘아이들’이어야 하는데, 그리고 그 중심을 굳건하게 유지한 상태에서 우리의 노동권을 이야기해야 할 텐데, 지금의 현실을 보자면 많은 교사들이 그 중심을 놓아버린 느낌이거든요. ‘아이들’은 온데간데없이 무미건조하게 ‘직업인으로서의 교사’로만 남으려고 하고 있어요. 아이들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교육적인 활동은 줄이고, 민원만 없게 만들고, 월급만 따박따박 받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조퇴를 쓰며 내 생활만 즐기는 그런 교사의 모습으로요. (이런 모습을 마냥 욕할 수만은 없겠지요.)
물론 ‘아동학대 고소’의 위협에 일상적으로 노출된 교사의 처지에서 ‘아이들을 생각하라’ 거나 ‘교육적 관점을 놓치면 안 된다’ 따위의 말이 어디 들어오겠습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요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안전하게 가르칠 권리를, 맞지 않을 권리를, 고소당하지 않을 권리를, 자살하지 않을 권리를, 시민들과 정부를 향해 외치고 또 외쳐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모든 것이 교육을 위한 것임을, 아이들을 위한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 깊이 그 뿌리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구호에, 우리의 요구에 진정으로 힘이 실릴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학교에는 두 가지 모습이 공존해요. 학부모와 아이들의 도를 넘는 행동들로 말할 수 없이 고통받는 교사의 모습과, 다른 한편으로는 아이들에게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거나 무관심한 교사의 모습으로 알게 모르게 상처받는 아이들의 모습이요. 두 가지 다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하나의 모습에 집중하느라 다른 모습을 외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교사도 학생도 상처받고 있는 학교를 바꾸기 위해 우리 교사들이 먼저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결국 우리 교사들은 아이들이 없으면 존재 의미 자체가 사라지는 사람들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