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이후로 매년 4월 중순이면 특별한 일이 없더라도 마음이 힘들다는 동료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세월호 때문이지요. 앞으로 우리 교사들에게는 7월이 그러한 시기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조용히 국화꽃을 준비하겠다는 선생님의 편지글을 보며 저는 또 가슴이 아려옵니다. 아무리 꽃 쟁반을 꾸며 돌아가신 선생님께 바친다 한들 선생님은 우리 곁에 없어요. 남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다시는 이러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잘못된 것을 찾아 하나씩 고쳐나가야 합니다.
현대인의 존재론적 아이러니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행위가 과연 합당하기는 한지 모르겠어요.
서로 모순된 말처럼 들릴 것 같지만 이것은 마치 평범한 우리가 지구 위기에 대응하는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학교에서 기후 위기에 대해 가르치고 지구를 지키기 위한 실천 방법에 대해 열심히 토의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환경 파괴적인 삶을 사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고, 깊은 자괴감에 빠지고는 합니다.
환경을 위해 종이컵 대신 텀블러를 사용하는 행동은 이제 학교에서는 상식처럼 실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새로운 디자인에 대한 욕구가 발동해 자꾸 새 텀블러 제품을 구매하여 자주 텀블러를 교체하는 모습을 둘레에서 발견하기도 합니다. 텀블러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가 종이컵이나 플라스틱 컵의 경우보다 10~20배 이상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곤 하지요.
또한 저는 ‘대지에 입맞춤을’이라는 넷플릭스 환경 다큐멘터리를 시청한 후 아이들과 함께 텃밭 활동의 의미를 재구조화하여 실천하고 있어요. 그런데 수확한 채소와 함께 마무리 활동으로 삼겹살을 구워 먹고 돌아온 날 밤에 생각했습니다. 축산업으로 배출되는 메탄이 지구 열탕화(Global Boiling, 이제 ‘지구 온난화’라는 용어로는 현재 위기 상황을 설명하기 어렵다고 합니다)에 끼치는 폐해를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굳이 돼지고기를 먹으며 텃밭 잔치를 해야 했던가?
네, 알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비판에 빠지기 시작하면 우리의 존재 그 자체가 악이며, 우리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된다는 것을요.
그렇지만 이러한 반성은 기본적인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 교사들의 태도는 제가 ‘에스컬레이터 증후군’을 언급하며 말씀드렸듯이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 반대편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편 가르기’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편 가르기식 행위의 극단은 대한민국 정치 현실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어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로를 나락으로 이끌며 끊임없는 진영 다툼 끝에 결국은 배척과 환멸의 막장 드라마를 쓰게 될 것이 분명하니까요.
태양과 바람의 우화
서두가 너무 길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의 답장을 읽은 후 고민 끝에 제가 다다른 곳은 ‘태양과 바람의 우화’였습니다. 잘 아시듯이 길 가는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존재는 광폭한 ‘바람’이 아니라 따스하게 품어 안는 ‘태양’ 임을 이솝우화는 보여주고 있지요.
‘반드시 너의 외투를 벗겨 버리겠다!’라는 태도가 아니라 서로 공존하기 위해 상대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진정으로 서로가 원하는 세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태도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본질적인 힘이라는 단순한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요컨대 지금처럼 학교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잘못된 부분을 언급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대안이 정답이라고 어깨에 힘을 잔뜩 주며 깃발을 세울 게 아니라,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 학교 교육 공동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에 이르기 위해 부족한 게 무엇인지 서로를 살피는 태도를 먼저 견지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지난 편지들에서 교대 이야기를 통해 제가 부정적으로만 표현했던 교대생과 초등교사에 대한 비판적 내용들은 거두어야 할 듯합니다. 그저 우리의 현재 모습에 대한 뿌리가 무엇인지 잠시 비춰보는 여러 거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아무리 ‘대한민국 학교는 죽었다’,라고 주장해도 근대식 학교의 기본 틀은 엄연히 존재할 것이고(AI를 비롯한 디지털 혁명이 아무리 세상을 뒤바꾼다 해도 말입니다), 우리 교사들은 그 안에서 아이들의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변화를 이끌어야만 하는 존재들이니까요.
‘태양과 바람의 우화’는 선생님께서 지난 편지에서 언급하신 첫 번째 비판 내용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체벌은 교실에서 사라졌지만, 여전히 교사들은 권위적인 태도와 방식으로 아이들을 지도한다는 말씀을 듣고 요즘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는 손웅정 감독의 아동학대 고발 사건이 떠올랐어요. 손웅정 감독은 태양이었을까요, 바람이었을까요.
아마 손웅정 감독은 태양과 바람의 경계를 조심스럽게 넘나들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나 체육지도자들이 지닌 근원적 갈망은 늘 양날의 검이 되어 우리를 번뇌하게 만듭니다.
‘조금만 더 하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조금만 더 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가르치는 사람들은 항상 이러한 생각을 포기하지 못한 채 ‘조금만 더 하면’이라는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 줄타기에서 실패하거나 성공하거나 또는 비난받거나 칭송받기도 합니다.
혹은 학생(선수)들이 교육 목표(승리)를 성취하거나 아니면 비록 목표(승리)를 이루지는 못했으나 학습(훈련) 과정에서 내적 성장을 이루었다는 위안을 느끼면서 늘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받고 정체성을 강화하고 싶어 합니다.
어쨌든 목표 도달이든 내적 성장이든 반드시 학생의 변화가 전제되어야만 합니다. (만일 이 변화를 갈망하지 않는 교사라면 한국에서 꽤 편한 직업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문제는 그 변화를 위해 필요한 ‘조금만 더’의 방식이 선생님의 말씀처럼 권위적이고 위압적인 예전의 방식으로 쉽게 빠져들게 된다는 겁니다. 그게 즉각적으로 동기부여를 일으키고, 집중력을 빠르게 끌어올리기 쉽기 때문이며,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얻게 될 확률이 높다고 믿기 때문일 겁니다.
자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른바 ‘지옥’ 훈련을 버텨낸 후 결국 원하는 목표를 이루게 된다는 스포츠 영화는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현실 속 한계를 극복한 실제 인물들의 이야기도 언론을 통해 화려하게 조명되곤 하지요. 그래서 교사나 체육지도자들은 매번 태양과 바람 사이 어디쯤에서 서성이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태양도 바람도 아닌 변화의 방법이 있을까요?)
예전 편지에서 선생님께서는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속의 권위적인 교사 모습을 이야기하며 분통을 터트렸지요. 이번에 저는 일본 학교 드라마인 ‘여왕의 교실’ 속 교사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2005년에 일본에서 제작 방영된 이 드라마는 ‘바람’을 넘어선 ‘태풍’에 가까운 제왕적 교사에 대항하여 성장하는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2013년엔 이 일본 드라마를 원작으로 MBC에서도 고현정 주연 드라마로 제작 방송한 적이 있지요)
워낙 논쟁적 주제가 많은 드라마이지만 ‘마야’라고 하는 교사에 대해서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초임 때는 노근 선생님이나 제가 그랬던 것처럼 물러터지고 착한 교사 그 자체였어요.
그런데 한 학생에게 바닥까지 처참하게 배신당하고, 사랑하는 아들을 사고로 잃으면서 남편으로부터 이혼당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마야’는 현실은 우리가 책에서만 꿈꾸던 이상적 세계가 아니라 불가해한 부조리 그 자체라고 인식하게 되지요.
자, 이제부터 ‘마야’의 교사상이 극적인 변화를 맞이해요. 교사인 자신 스스로가 세상을 닮은 부조리가 되어 학생들로부터 자신을 극복하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불가해한 세상을 닮은 벽이 되어 자신을 뛰어넘으라고 외치는 ‘마야’의 모습은 무시무시한 ‘바람’과 같습니다.
하지만 ‘마야’는 아무도 모르게 학급 아이들의 가정환경에 대해 속속들이 파악하느라, 그리고 자신의 강압적 지도 방식으로 위축된 아이들의 심리 상태가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지 노심초사하며 마치 스토커처럼 아이들을 관찰하느라 밤에 잠도 자지 못합니다.
이러한 숨겨진 모습은 드라마 후반부에 보이면서 시청자들에게 교사 ‘마야’의 참모습에 대해서 그리고 아이들의 진정한 성장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고 있지요. 드라마 속 아이들은 선생님의 진짜 속마음을 이해한 후 이전처럼 어리광을 부리거나 늘 핑곗거리를 찾으며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모습에서 환골탈태하게 됩니다.
자신의 일상 정도는 스스로 책임 있게 계획하며 실천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하며 도전하는 모습으로 성장하는 드라마 속 6학년 아이들의 모습은 많은 교사에게 감동을 경험하게 할 것입니다.
물론 현실에서 ‘마야’와 같은 ‘바람’이 된다면 바로 그 순간 아동학대로 기소 및 처벌될 게 분명합니다. 드라마에서도 ‘마야’는 학부모 민원으로 징계받아 사직을 종용받게 되니까요.
선생님께서는 초임 교사 시절엔 ‘태양’으로 시작해서 잠시 ‘바람’이 되었다가 이제는 학급 긍정 훈육법에서 말하는 ‘친절하며 단호한’ 교사로 정체성을 찾아가고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여기에서 ‘단호함’은 엄격해야 할 부분에 대해 흔들리지 않은 태도를 말하는 것이지 호통을 치거나 화를 내는 게 아니라고 말씀하셨어요. 맞습니다, 너무나도 옳은 말씀입니다.
제가 2021년 아동학대로 학생으로부터 신고당했을 때 상황도 바로 정확히 이런 부분이었어요. 교사도 사람이기 때문에 인간적 감정에 휘둘려 화가 나는 상황이 분명히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 어느 순간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아야만 교단에 설 수 있게 되었어요. 제 경우도 수학 학습에 도무지 참여하지 않으려는 아이에게 ‘또래 교사’인 친구로부터 도움을 받도록 했으나, 그것마저도 여러 차례 거부하는 상황이 생기자 그만 폭발하고 말았지요. (그때 저는 시간을 두고 다음 기회에 다시 새롭게 시작하며 분위기를 전환했어야만 했습니다)
그 아이는 저에게 호통을 듣고, 제가 음악 시간에 사용하는 지휘봉으로 배를 찌른 것에 기분이 나빠져서 곧바로 경찰서에 신고했다고 했습니다. 경중의 차이는 있겠으나 손웅정 감독과 코치들이 아동학대로 고발당한 상황과 아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론을 통해 알려진 바에 따르면 손 감독도 “시대의 변화와 법에서 정하는 기준을 캐치하지 못하고 제 방식대로만 아이들을 지도한 점을 반성하고,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훈련에 몰입할 수 있도록 또 다른 방법을 찾도록 하겠다”라고 견해를 밝혔습니다.
하지만 선생님, 교사가 아무리 엄격하고 단호한 모습을 견지한다고 한들 막상 학생이 변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교사들은 법을 위반하지 않으면서 아이들의 심리 상태를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혼내는 기술’이라도 연마해야 할까요? (이것이 혹시 선생님이 말씀하신 교사의 카리스마일까요?)
그리고 변화와 성장을 위해 반드시 동반하게 되는 고통과 힘겨움에 대해서 우리 어른들은(교사를 포함하여)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요? 현재는 ‘너 이거 하면 너 원하는 거 해줄게’와 같이 물질이나 감각적 유희를 보상하는 방식이 대부분이죠.
하지만 보상의 유혹이 사라지면 자신이 왜 그걸 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망각하게 되어버립니다. 종국에는 ‘이것은 내가 원한 게 아니야!’라며 허무함으로 절규하게 만드는 사례를 둘레에서 목격하곤 했어요. 물론 교육적 경험으로 체험하게 하는 방법도 다양하게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학생들의 예민한 정서적 피해의식에 대해 우리 교사들이 어떻게 대처해야만 하는 걸까요?
칠판에 붙여진 경고 스티커에도 아이가 기분이 상하면 아동학대가 되어버리는 오늘의 현실은 선생님 말씀처럼 ‘시궁창’ 그 자체입니다. 이것은 ‘권위적으로 호통치는 태도’와 ‘친절하며 단호한’ 태도 사이의 문제로 설명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측면이 있어요.
서이초 사건 이후로 교사들이 주장했듯이 반드시 법적으로 보호받는 훈육 방법이 마련되어야 하고, 지속적인 문제 행동으로 인해 학급 전체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학생에 대한 분리 조치 및 치료 지원이 법적으로 보장되어야만 합니다.
저는 오늘의 학교는 그 자체로 거대한 정신병동과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또한 문제 행동 학생의 학부모에 대한 대응은 담임교사가 아니라 관리자나 상담 전문가에게 맡기도록 하는 법적 기준이 반드시 마련되어야만 해요. 서이초 사건이 다시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늘의 교사는 학생의 역량 개발과 정서 함양을 위한 수업도 해야 하고, 그 수업 연구를 위해 전문적 교사 학습 공동체에도 참여해야 하고, 어마어마한 행정 업무(잡무)도 해야 하고, 학생들 간의 다툼도 해결해야 하고, 학생들의 잘못된 습관이나 행동도 고쳐주는 생활지도도 해야 하고, 학생 및 학부모 상담도 해야 하고, 거기다 악성 민원 대응까지 해야 하는 슈퍼 히어로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교사도 인간입니다. 학급 긍정 훈육법이나 비폭력 대화, 감정 코칭과 같은 이른바 회복적 생활지도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상황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교사 출신 법률 전문가들이 지적하듯이 이것은 ‘교사의 생존권’ 문제입니다.
“교실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상황에 대해서 더 이상 상식이 통하지 않고 무조건 법의 잣대로만 공격당하는 학교에서 교사가 살 수 있는 최소한의 법적 보호를 보장해 달라!”
학생 지도의 어려움에 관해서는 다음 편지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나누기로 하고, 이제는 선생님의 두 번째 교사 비판 내용에서 제게 질문한 내용에 대해 답해볼게요.
교사들의 전체주의 문화, 다시 말해 옆 반이 튀는 걸 불편해하는 문화를 말씀하시면서 제 경험을 물어보셨지요.
아시듯이 저는 신규 교사로 초임발령을 받을 때부터 다른 신규보다 대략 10살이 많은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부장 선생님을 제외하면 같은 학년 선생님들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솔직히 눈치 보는 일이 덜했어요. 그렇다고 제가 나이로 위력을 행사했다는 건 절대 아닙니다.
더구나 초임발령 후 1년 반 만에 전출 간 충남은 저와 연결된 어떠한 인연의 끈이 없는 곳이어서 눈치를 볼 필요가 전혀 없었죠. 대한민국은 혈연, 학연, 지연을 빼면 해골과 같다는 생각을 늘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저는 승진을 원하지 않아서 관리자의 합당하지 않은 요구에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고요. 더구나 제가 전직 취재기자라는 딱지는 관리자나 원로교사들이 저에게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경계심을 가지게 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저는 신규 때부터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전부 다 했어요. 학교에서 할 수 없는 것들은 주말 동안에 제 사비를 털어서라도 영화관, 스케이트장, 수영장, 지역 축제, 지역 도서관, 주말 산행 심지어 찜질방까지 학급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지요.
2010년에는 시골 학교에서 선생님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화관에 와봤다는 6학년 아이를 만난 적도 있어요. 이런 저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물론 농담처럼 슬쩍 “왜 이렇게 열심히 해”라고 건네는 선배 교사들은 있었지만, 저는 “그냥 얘들이랑 노는 게 좋아요”라고 답하면 그걸로 그냥 끝이었어요.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교직인데 누구 눈치 보면서 아이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렇다고 선생님께서 언급한 ‘뭐든지 함께 하거나 아니면 하지 않거나’를 요구하는 전체주의 교직 문화를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저도 초임 때는 잘 몰랐지만, 경력이 쌓여가면서 절실히 느꼈던 부분이니까요.
그것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옆 반에서 들려오는 민원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는 국가 수준 교육과정, 지역 수준 교육과정, 학교 수준 교육과정을 일사불란하게 엮어가려는 교직 문화에 더 큰 문제의식이 있어요.
준비기간까지 포함해서 5년 동안 동료 교사들과 함께 혁신학교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저는 의미 있는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그 시간을 돌아보면 첫 1~2년에는 교육 철학 및 아동관, 학교 교육의 방향 등에 대해 함께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인 교육의 틀을 갖추기 위해 구체적 교육 활동을 학년성에 맞춰 수준을 달리하여 조직하고 전 학년이 모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3년 차엔 인사 발령으로 새로운 교사들이 들어오면서 전환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교사마다 좋아하고 잘하는 분야가 다르고, 관심 분야가 다양하기에 전체적인 교육 목표와 방향만 일치한다면 구체적인 학급 활동은 담임교사가 자율적으로 계획하고 실천하도록 했습니다.
물론 저를 포함하여 초창기 멤버들은 약간의 상실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며 학교 교육 철학을 구현하기 위한 교육 활동을 기획하고, 그것을 마을 교육 자원과 연계하기 위해 사람을 만나는 일은 행복하긴 했지만 정말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같은 방향성을 가진 다양한 교육 활동은 학교를 훨씬 더 풍요롭고 역동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서로 이질적인 활동이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긍정적 시너지는 기대 이상이었어요. 동료 교사 사이에 자기 계발에 대한 추동력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학부모들의 교육 활동에 대한 만족도가 상당했습니다.
결과적으로 4년 차를 맞이하는 해 3월에는 면 단위 학교였던 우리 학교 학생 수가 40명 이상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근무하는 지역의 면 단위 학교 학생 수는 보통 30~40명 수준이니까 면 단위 규모의 학교 하나를 만들었다는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그야말로 대성공이었지요. (학교여, 발산적 생태계를 구축하라!)
하지만 혁신학교 근무를 마치고 옮긴 학교에서는 선생님 말씀처럼 모든 학년이 똑같은 학교 교육 활동에 참여하도록 암묵적으로 강요받았습니다. 예전 편지에서도 언급했지만, 이것은 교사 회의를 통해 진행되기 때문에 일견 민주적 의사결정의 결과물로 보이지만 제가 보기엔 부장 교사나 원로교사들의 의지대로 결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더 처참한 것은 개별교사의 성장과 발전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지역 교육지원청이나 시도 교육청의 역점 업무 추진 방향에 초점을 맞춰 학교 교육 방향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우리는 시키는 대로만 가르쳐야 하는 공무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참, 서글픕니다.
교육청에 종속되지 말자고, 10년 가까이 동료 교사들을 아무리 설득해도 ‘쇠귀에 경 읽기’처럼 바뀌려고 하지 않는 모습은 더 절망적이지요. 교육청은 이름 그대로 개별 학교 현장의 교육활동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고, 교사들을 법적으로 보호하는 역할을 강화해야 하는데, 아직도 말단 학교를 마치 수족 부리듯 하고 있어요.
2022 개정 교육과정의 큰 축 가운데 하나가 저출산으로 인해 줄어든 개별 학생에 대한 맞춤형 교육 강화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학교 현장 말단에서 아이들을 직접 만나고 있는 담임교사만의 특화된 교육활동을 지지해야만 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선생님이 교사 비판에서 지적한 것처럼 교사들의 겸직(N잡)에 대한 욕구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게 아니겠습니까? 시키는 대로만 가르쳐야 한다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게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참, 먼저 교직 사회에서 보이는 교사들의 모습을 교대 시절 교육학 시간에 배웠던 교사관(성직관, 전문직관, 노동직관)을 통해서 정리하신 부분은 꽤 인상 깊었어요. 선생님 말씀대로 노동직관으로 지나치게 치우친 오늘의 교사들 모습 속에서 가장 소중한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지적은 너무나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이러한 흐름이 상당 기간 지속해서 강화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론 너무나도 당연한 변화라는 생각까지 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교사는 가르치는 자로서 끊임없는 자기 계발과 연마를 포기해서는 안 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교사들은 학교 밖 사람들이 그토록 부러워하는 방학 동안 자기 발전을 위해 꾸준히 연수받는 것이기도 합니다.
비록 겸직이라는 어감이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다양한 관심 분야로 확장된 교사의 역량은 다시금 학급 아이들에게도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새로운 에너지가 될 거라고 봅니다. 무엇보다 시키는 대로만 가르쳐야 하는 답답한 교직 현실에서 교사들이 비로소 숨 쉴 수 있는 해방구를 찾으려는 강렬한 욕구의 표출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교직 사회나 학급 아이들에게 부정적 영향이 아예 없을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이것은 서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어쩌면 자본주의라고 하는 무한 욕망 구조 안에서 실존하는 현대인들이 겪는 필연적인 아이러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투철한 환경운동가라 할지라도 전기도 수돗물도 없는 깊은 산골에 들어가 살지 않는다면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반환경적인 소비 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모순 속에 우리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윤동주 시인의 ‘참회록’ 구절처럼 끊임없이 마음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으며 자신을 비추며 살아야만 합니다.
어느 순간 내가 내지른 ‘부끄러운 고백’이 나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설령 발목을 잡았다고 할지라도 얼른 잘못을 고백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존재들을 짓누르지 않고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그 거울 안에서 오롯이 교사와 아이들이 함께 성장하는 모습이 충만하도록 말입니다.
노근 선생님, 혹시 제가 왜 이렇게 열심히 아이들과 노는 활동에 집중하는지 아세요? 저에게는 제가 정말 닮고 싶은 롤모델인 선생님 한 분이 계십니다. 초등학교 6학년 담임 선생님이었던, ‘김남권’ 선생님이시죠.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라고 고백했던 서정주 시인처럼 교사로서의 제 모습을 만든 건 팔 할이 바로 ‘김남권’ 선생님이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나중에 이 선생님에 관해 말씀드릴게요)
두 차례에 걸쳐 우리의 동료인 교사에 대해 비판했는데 솔직히 저는 노근 선생님이 꿈꾸는 교사상은 어떠한 모습인지 궁금해졌어요. 저처럼 롤모델인 선배 교사가 있다면 답장에서 꼭 이야기해 주면 좋겠어요.
아마 그 이야기 속에 우리가 가 닿아야 할 궁극적인 교사의 모습이 숨겨져 있을 테니까요.
곧 서이초 선생님의 1주기가 다가옵니다. 저는 이번 주 내내 촛불을 켜고 묵주를 들고 기도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