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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이동 능력자가 되다

by 김여너
나락도 락이다

알코올 사용장애의 주된 증상 중 하나는 음주량을 조절하지 못한다는 거다. 나의 주량은 소주로 한 병 반 정도 된다. 한 병 반이 나의 맥시멈이라는 뜻이다. 건전한 음주 생활을 했을 때에는 주량을 넘어가면 더는 먹지 않았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술맛이 화학약품 같이 느껴지면 즉시 술잔을 내려놓았다. 다음 날이 걱정되기도 하고, 많이 취하기가 싫었다. 평범했다. 보통의 건강한 성인들의 여느 음주 습관이었다.


하지만 잦은 혼술로 술에 대한 포용력이 넓어지고, 죽도록 마시지 않는 이상 그럭저럭 견딜 만한 숙취가 더는 무섭지 않았다. 게다가 술에 취하면 재밌는 일이 많이 생겼다. 새로운 사람도 만날 수 있었다. 이성이 휘발된 상태로 벌이는 객기들이 무용담이 되어 다음 날 친구와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됐다. 평범한 일상생활에서 술을 마시고 벌어지는 일들이 일탈처럼 느껴졌다. 인터넷 소설 속 에피소드처럼. 나는 그런 가벼운 즐거움에 도취되어 더는 주량을 계산하며 마시지 않았다. 술이 쓰면 그냥 물을 더 많이 마셨다. 비록 내 빈번한 술버릇 중 하나가 블랙아웃이래도, 술 취하면 재밌으니까.


처음에 내 술버릇은 기껏해야 남자친구에게 혀 짧은 소리 하는 거밖에 없었다. 아니면 흥분해서 목소리가 커진다거나, 조심성이 없어진다거나 하는 수준이었다. 취하더라도 집에 들어온 기억은 언제나 있었다. 그러나 주량을 신경 쓰지 않으면서부터 나는 순간이동하는 능력이 생겼다. 분명히 술집이었지만 내 침대 위에서 깨어났다. 마지막 기억은 분명히 술집이 맞았다. 하지만 갑자기 집이라니. 갑자기 내가 마법사라도 된 걸까? 꿈과 희망 따위 진작에 퇴색된 내게 별안간 누가 초능력이라도 준 걸까? 해리포터 내지는 슈퍼내추럴 뭐 그런 건가.


네 아니고.


블랙아웃이라고 일컫는 현상이다. 필름 끊겼다도 동일한 말이다. 다 그런 기억 있지 않은가? 어렸을 적 만화 대여점에서 빌린 책의 결정적이거나 중요한 장면의 페이지가 뜯겨있던 기억 말이다. 어린 나는 몹시 분개했다. 줄거리를 파악하는 데에 지장이 있으니 당연지사였다. 나는 그저 주량만 조금 넘겨서 술을 마신 것뿐인데 페이지를 왕창 뜯겼다. 왕창. 그리고 자주. 그럼 마찬가지로 분개해야 하고, 뜯기지 않게 조심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왜? 정말 왜.


인구수만큼 술버릇도 각양각색이다. 그럼 블랙아웃이 됐을 때 벌이는 행동들도 가지각색이겠지. 나는 블랙아웃이 되면 비도덕적이고 인성 함양이 덜 된 인간이 됐다. 이 사실을 다음 날 친구가 보내온 사진과 말로 전해 들었다. 평소에 나는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다. 가끔 싸가지 없다는 소리를 듣긴 해도 주변에 오랜 시간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스스로를 성자나 완벽한 인격의 소유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믿어왔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튀는 구석 없이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친구의 이야기 속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것의 괴리감을 잊을 수 없다.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고? 내가 그런 행동을 했다고? 마치 인격이 분리된 듯한 기분이었다. 절대 평상시의 나라면 하지 않을 것들이었다. 블랙아웃이 된 나를 맨 처음 보고, 이후에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만난 사람이 되려 차분한 나를 어색해했다.

'하던 대로 해. 왜 그래 적응 안 되게.'

누군가가 그러지 않았던가? 술 취했을 때 나오는 모습이 본모습이라고. 본성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그럼 부도덕한 행위를 했던 내가, 내 인격의 본체인가? 이야기 속 나는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인간 유형 중 단연 1순위였다. 그딴 게 내 본모습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할 수도 없었다. 그냥...... 그냥 술 마실 때 나오는 내 페르소나 같은 거라고 치부했다.


충격을 받았고 반성도 했다. 잠깐이지만 죽어도 다신 술을 먹지 않겠다는 다짐도 했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평일에 회개하는 시간을 조금 가지는 척하다가, 주말만 되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같은 짓을 반복했다. 사실은 나락에 떨어지고 있는 중인데, 그걸 즐거움이라고 포장했던 과거의 내가 한심함과 동시에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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