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취 페르소나와의 공존은 한동안 계속됐다. 마치 게임에서 로그아웃 하고 나면 그것과는 상관없는 현실의 삶이 있는 것과 비슷했다. 취해서 어떤 개망나니 짓을 하더라도 다음 날이 되면 나는 평범한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했다. 눈을 뜨기 힘들어도 제때 출근했고, 직장 동료와도 평탄했고, 친구 관계도 이상 없었다. 취중 상태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내 일상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알딸딸한 게 기분 좋은 건 사실이지만 그것만을 위해 위험을 감수해야 돼?
애초에 만취 페르소나가 등장할 때까지 절제 없이 과음하는 것이 문제였다. 블랙아웃은 잦아졌고 일상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경각심은 흐려졌다. 이젠 전날의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또 그랬구나' 수준의 담담한 반응만이 전부였다. 가끔 나는 길바닥에 쓰러져있기도 했다. 친구가 찍어준 그 사진을 보고도 그냥 웃어넘겼다. 알코올이 판단 능력까지 마비시킨 걸까? 젊은 여자가 취한 채로 길바닥에 엎어진 건 아무리 우리나라 치안이 안전하다 한들 흉흉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요즘 같은 때에 분명히 위험한 일이다. 게다가 필름이 끊긴 상태에서 타는 택시가 안전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럼에도 오로지 도파민, 알딸딸함이 주는 즐거움 때문에 조금도 절제하지 못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듯이 이제 알코올이 슬금슬금 내 일상까지 침범해 오는 것도 모르고.
가장 먼저 일어난 일은 취한 상태로 남자친구와 다투다 헤어진 것이다. 그는 내가 자신에게 시비를 걸었다며, 이런 일들이 피곤해서 견딜 수 없다고 했다. 독립을 하고 가장 의지되던 사람이 그였기에, 그런 그에게 내가 만취 페르소나를 꺼내 들고 시비 걸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내가 어떤 워딩을 사용하고 어떤 태도로 그에게 말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갈기갈기 찢긴 기억 몇 가지만이 잔해처럼 남아 그날의 상황을 대충 파악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 그건 갈등 상황에 있어 아무런 방패도, 핑계도 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사랑했던 남자친구와의 마지막 기억조차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상태로 맞이했다. 방바닥에 들러붙어 눈물을 쏟았다. 아무리 되새김질해도 떠오르지 않는 상황이 죽도록 답답했다. 이별을 말할 수준의 시비를 내가 걸었다고? 믿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이별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또 술을 마셨다.
그 뒤로 일어진 일들은 연이은 친구들과의 불화다. 오랜 시간 함께했던 친구부터 안 지 얼마 되지 않는 친구까지. 전부 술에 취해 말다툼을 하고 의절했다. 그리고 전부 희끗했다. 이성과 비이성 사이를 핑퐁질 하며 힘 풀리는 눈으로 마주한 그들의 화난 표정과 눈물만이 기억의 전부였다. 그니까 왜 싸우게 된 거지. 물을 수도 없었다. 그나마 당시 자리에 있었고, 다투지 않았던 친구에게 물었다. 그 애도 취해서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했다. 그냥.
'네가 좀 막말했던 것 같아.'
지난 기억을 돌아보며 이제는 저 말조차 낯설지가 않았다. 또 기억 없는 채로 상대에게 상처를 줬구나.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필름이 끊기기 전 사소한 이야기를 하며 웃었던 상대의 얼굴만이 기억에 남았다. 시간을 돌리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겠지만, 되돌리고 싶은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왜 자꾸 이런 일이. 연초에 본 사주에서는 올해는 시비수와 구설수가 있으니 신변에 조심하라고 했다. 근데 그것의 원인이 뭔데. 시비수와 구설수가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아니면 술에 취해서 다른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건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약간의 숙취는 있었어도 문제없이 근무하던 직장의 근태도 나빠졌다. 적어도 출근 전 날은 과음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새벽까지 술집에서 배회하고 겨우 몇 시간 자고 출근했다. 그리고 숙취가 심하다는 이유로 당일 연차를 쓰고 퇴근하기 일쑤였다. 계속해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심리가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무기력했고 우울했다. 습관처럼 하던 일을 수행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어떠한 의지도 열정도 없이 삶이 권태로워졌다. 무엇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제는 기분 좋으려 마셨던 술이 점차 내 일상까지 기어들어와 나와 내 일상을 좀먹기 시작했다.
나의 인성이나 성품의 문제라고 치부하고 자책하다가, 불현듯 이 모든 것의 원인이 술은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모든 원인이 술은 아니겠지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주변의 정신과를 검색해 봤다. 술을 줄여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