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떠난 자리에 내가 남았다.

3부 : 슬픔의 단가, 4장

by 여우비

2015년 9월.

전역을 한 달 앞둔 어느 날,

아침 점호가 끝나자마자 중대장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한영락 병장, 조부님 부고 연락이 왔다.

청원휴가 다녀와.”


그 말이 귀를 통과했는데도,

의미가 머리에 닿지 않았다.

입이 먼저 반응했다.

“잘못 들었습니다.”


그건 확인이 아니라 부정이었다.

믿고 싶지 않은 말을 되감는 버릇처럼.


“할아버지 돌아가셨다고.”

중대장님의 목소리는 일정했다.

위로나 여운은 없었다.

그는 그저 ‘사실’을 전했다.


나는 짐을 싸고 위병소를 나섰다.

군화 밑창에 묻은 흙이

오늘따라 무겁게 느껴졌다.

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들판이

이상하게 멀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니…’


오래 치매를 앓으셨지만,

형과 나를 알아보실 땐 눈빛이 또렷했다.

“오메, 막둥이 왔냐? 뒤통수 파야쓰겄다. 국자 가져오니라.”

뒤통수가 볼록하다고

볼 때마다 그렇게 농담하셨다.

그 말의 억양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게 할아버식 표현의 ‘보고 싶었다’는 말이었던 것 같다.


엄마는 몇 달 전 말했다.

“할아버지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시대.

휴가 나오면 한번 들러.”

그땐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전역하고 가면 되죠 뭐.”

그 한 달이, 영영이 될 줄은 몰랐다.


장례식장에 들어섰을 때

당연히 와 있을 거라 생각한 아버지는 없었다.

그리고

당연히 안 올 거라 생각한 엄마는 와 있었다.


상복을 입은 엄마는

누구보다 조용히 움직였다.

조문객을 맞고, 음식을 내왔다.

그 모습이 낯설었다.


“엄마, 왜 오셨어요?

안 오셔도 괜찮잖아요.”


엄마는 잠시 나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외할아버지 장례식 때,

너희 아버지는 사흘 내내 술만 마셨다.

발인 날엔 취해서 잠들었지.

그래서 왔다.”


“복수하려고요?”


“그래. 마음의 빚을 남기려고.

돈은 갚을 수 있지만,

마음의 빚은 갚을 수 없거든.”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국화를 내려놓았다.

그 손끝이 조금 떨렸다.


나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연기를 내뿜자

건물 입구 쪽에서 낯익은 그림자가 보였다.

검은 나팔바지, 길게 늘어진 뒷머리.

아버지였다.


몇 년 만의 재회였다.

미움보다 반가움이 먼저 올라왔다.

“아빠!”

손에 담배가 들려 있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아버지의 시선이 내 손끝에 닿았다.

‘아이씨, 혼나겠네.’


그는 성큼 다가왔다.

“너, 담배 피우냐?”

“네… 잘못했어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고개 들어.”

“…”

“눈 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제 성인인데,

피워도 되는 거 아니에요?”


내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

아버지는 한참을 나를 보다가 말했다.

“누가 뭐라 했냐. 적당히만 펴라.”


그 말이 이상했다.

분노 대신 묘한 온기가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오늘의 아버지에게선 술 냄새가 나지 않았다.


“할아버지한테 인사는 했냐?”

“네, 드렸어요.”


아빠는 바지 주머니를 뒤져 작은 통 하나를 꺼냈다.

“이거, 네 엄마 무릎 아프니까.

약국에서 좋다고 하길래 사봤다.”


“나 이제 술 안 마신다.

엄마랑 다시 잘해보려 해.

나 달라질 거야.

네가 좀 도와줘라.”


바보 같았다.

엄마의 무릎은 걱정하면서,

정작 엄마의 상처는 한 번도 돌보지 못한 사람.

그 모순이, 이상하게도 미워지지 않았다.


그 순간,

그는 다시 ‘아빠’ 같았다.

말투가 느려지고,

눈빛이 잠시 따뜻했다.


하지만 그 말,

‘달라질게.’

평생 들었던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그래도 믿어줘라.

봐, 오늘은 술도 안 마셨잖아.”


“며칠 전엔 마셨을 거잖아요.”


아빠는 잠시 웃었다.

그 웃음이 서글펐다.

믿기 싫었지만, 믿고 싶었다.

그때의 나는, 아직 아들이었다.


“네, 알겠어요.

이제 들어가요.”


“엄마, 아빠 왔어요.”

내가 말했다.


엄마가 아버지를 봤다.

아버지가 엄마를 봤다.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엄마의 눈엔 오래된 그리움이,

아버지의 눈엔 닳아버린 미안함이 있었다.

그 두 시선이 엇갈리는 순간,

시간이 잠시 멈춘 듯했다.


“막둥이 왔냐, 얼른 인사드려라.”

큰아빠의 말에

아버지는 신발을 벗고 들어갔다.


영정 앞에 두 번 절을 하고

한참을 일어서지 못했다.

어깨만 천천히 들썩였다.

누군가가 울고,

누군가는 혀를 찼다.


잠시 후,

그는 술병을 들었다.

소주를 가득 따르고

조용히 마셨다.

불과 십 분 전,

“술 끊었다”라고 말하던 사람의 손이었다.


나는 이미 알고있었다.

아버지의 다정함은 늘 잠깐이었고,

그 잠깐이 나를 무너뜨렸다.


그날,

아버지는 내 옆에 있었다.

지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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