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은바라기
도서관을 나왔다. 쨍한 공기가 새어 나오는 약한 에어컨 바람에 무게를 더했다. 그런 오월이었다. 긴팔을 입기도 반팔을 입기도 애매한 날씨였다. 시험까지 남은 기간 같았다. 새로운 걸 채우기엔 배부르고 알고 있는 것을 다시 맛보기엔 배고팠다.
그런데 눈이 온다. 사월도 아니고 늦봄도 아닌데 하얀 눈이 쏟아진다. ‘내린다’기 보단 마구잡이로 흩날린다는 표현이 맞다. 겨울에 뿌리지 못한 구름 속 찌꺼기가 녹은 건지 유난히 올해는 겨울이 빨리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평소보다 가볍다. 심지어 땅에 닿아도 녹지 않는다. 그 모양 그대로 저마다 생긴 대로 살포시 앉아 있다. 가만히 서 있기는 부끄러우니 손을 내민다. 어떠한 감촉도 느껴지지 않는다. 눈이 아닌 건지, 내가 더 이상 눈을 느낄 수 없는 건지 애매하다.
다음날도 어김없이 같은 시간에 도서관을 나왔다. 공부가 너무 잘 돼서 밖으로 탈출했다. 하얀 종이에 적힌 빽빽한 글자들이 잘 읽힐수록 불안했다. 지금이 여름으로 가는지, 겨울인데 여름이라 속이려고 에어컨이 바람을 뿜는지 알 수 없어 몹시 긴장됐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나는 눈이란 간단한 차가움 마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된 느낌이었다.
어제 떨어진 눈은 형태를 유지한 채 젖어 있었다. 물이 됐다면 모습은 사라져야 눈인데 이들은 단지 젖기만 했다. 아직 젖지 않은 눈들은 공중에서 나풀거렸다. 계절을 확신하고자 눈을 잡기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오늘은 단 하나도 잡을 수 없었다. 도서관 경비 아저씨가 호스로 눈을 향해 물을 쐈다. 불에 타는 벌들처럼 우수수 눈들이 떨어졌다. 그가 유도한 방향대로 한 곳으로 쌓여갔다.
“학생 라이터 있어요?”
호스를 내려놓은 아저씨가 물었다.
“네. 여기요.”
담배에 불을 붙이듯 자동적으로 그에게 라이터를 건넸다.
“고마워요. 잠시만 저쪽으로 가 있어요.”
아저씨는 하나가 된 커다란 눈덩이를 태웠다. 태운다는 것도 사실 거창한 말인 듯했다. 그가 불을 붙이는 순간 눈들은 증발했다. 그 많던 눈송이가 작은 불씨 하나에 사라졌다. 그는 곧장 라이터를 다시 돌려주고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저렇게 오랜 시간 모터도 날개도 없이 날던 눈들이 한순간에 사라진 걸 봤을 뿐인데 어딘가 속상했다. ‘이렇게 쉽게 사라질 거 뭐 그렇게 힘들게 날아왔을까’ 속으로 외쳤다. 왜 나는 사라진 것도 억울해 보이는 저 작은 눈송이를 원망하는지 알 수 없었다. 증오를 한다면 아저씨에게 하는 게 맞아 보였지만 그에게 달려들어 멈추게 할 순 없었다. 그는 전혀 원망스럽지 않았다.
그렇게 가 버리면 지금 내가 여름으로 가는지 겨울로 왔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잖아. 또 그렇게 한 번에 사라지면 어디서 왔는지 물어볼 수도 없잖아. 왜 왔는지도 알 수 없잖아. 나는 아직 물어볼 게 많은데, 너무나 궁금한 게 많은데, 몹시 화낼 것도 많은데 이제 그럴 수도 없잖아.
한동안 눈은 계속 흩날렸다. 도서관 앞은 찜질방이었다. 아저씨는 물로 적시고 불로 태웠다. 혈액이 순환하듯 오월의 공기가 원을 그렸다.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계속 눈송이로 도서관을 테러 중이었다. 결국 아저씨도 포기했다. 날리면 날리는 대로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테러의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단지 밖으로 나와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졌다. 몸에 덕지덕지 하얀 것들이 달라붙는 게 상큼했다. 간질간질한 게 자꾸 반가웠다. 그들이 날아오는 곳을 따라가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가다 보면 멈추게 됐다. 도서관으로부터 가장 멀리 간 눈송이의 기록은 고작 도서관 건너편의 버스 정류장 정도였다.
물론 테러는 오래가진 못했다. 저만큼의 눈을 만드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저것들을 뿌리는 것도, 수많은 눈치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오월의 중순이 넘어가자 눈은 그쳤다. 아저씨는 빗자루를 나와 그것들의 흔적을 쓸었다.
“이제 보이지도 않는데 뭘 쓸고 계세요?”
잠시 앉았던 자리마저 치우려는 그가 나름은 미웠다.
“이리로 와 봐요. 어때요. 보이죠?”
아저씨가 내민 쓰레받기에는 수많은 검은 알들이 팝콘처럼 따가운 햇볕에 튀고 있었다. 씨들이었다. 모인 씨는 도서관 앞 화단에 뿌려졌다. 무얼 위해 이토록 날아왔을까. 그 모습이 허무하다 못해 조금 웃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