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치명적 단점이 있다. 바로 골 결정력 부족. 뭔가를 시작은 하는데 완성시키지를 못한다. 그럼 왜 완성을 못 하냐, 돌아보면 짐작되는 부분이 있다. 완급 조절을 못하기 때문이다. 마라톤을 뛰면서 5분 전력질부 페이스로 달리니 체력이 남아있을리가 없다. 그래서 항상 이것저것 깔짝거리기만 하고 완성시키지 못해 결과물은 없는 요란한 빈수레 엔딩을 맞는다. 슬프게도..
나는 노력하지 않는 겁쟁이 완벽주의자이다. 잘하고 싶은데 잘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스트레스만 받다가 지쳐 포기한다. 할 수 있는만큼 해본다, 일단 쓰고 고쳐본다는 선택지에 익숙하지 않다. 이런 성향은 글쓰는데 최악이다. 내가 평생 글을 쓴다고 해도 완벽할 수 없는데, 일단 써야 앞으로 나아가는데 쓰질 않으니 머릿속으로 했던 생각이 전달되지 않는 거다. 석사 논문 쓸 때 이 성향이 가장 극에 달했다. 논문 안 쓰고 도망갈까 백만 번도 더 고민했다. 아주 못나고 구린 스스로를 견디는 게 가장 힘들었다.
이런 성향은 요가할 때도 드러난다. 나는 요가를 할 때 온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스타일이다. 요가 선생님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어깨 힘 빼세요, 숨 내쉬면서 골반 힘 푸세요." 근력이 필요한 자세는 그나마 따라하는데 힘을 빼야 하는 자세는 영 잡지 못한다. 힘을 풀면 더 많은 동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쉽지 않다. 일을 끊임없이 하는 성향도 비슷한 맥락이라 생각한다. 몸에 잔뜩 힘을 주고 긴장하고 있다보니 아주 작은 일도 크게 받아들이고 심각하게 생각한다. 딱딱한 나무가 부러지기 쉬운 것처럼 나도 쉽게 우울해 하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가 많다. 내 삶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잔뜩 긴장한 뚝딱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언제쯤 조금 봐줄만한 사람이 될까. 나이가 먹으면, 경력을 쌓으면 좀 나아질까? 구린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방황할 때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과 인터뷰하며 놀란 적이 있었다. 선생님 같이 한국에서 손꼽히는 무당도 스스로가 못나고 구리게 느껴질 때가 있다고 하셨다.
내가 유명하고, 사람들이 나를 잘 나간다고 하지만 내가 나를 돌아보면 너무 빈깡통인 거야. 그럴 때는 숨어들어가고 싶어. 어느 순간에 진짜 사라지고 싶을 때 있다? 그냥 존재만 그냥 사라지고 싶어. 그런데 내가 숨어 들어가면 과연 즐거울까? 아닐 것 같아. 차라리 여기서 부대끼면서 이겨낼 것 같아.
선생님의 솔직한 말은 공감되면서도 나를 돌아보게 했다. 유명한 무당도 스스로 꼴보기 싫을 때가 있고, 나처럼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구나. 그런데 버티는 거구나. 그냥 버티는 거. 뛰어나서 버티는 게 아니라 버텨서 뛰어나다는 말처럼, 존버의 힘도 길러지긴 하는구나 싶은 마음이다. 선생님의 버팀, 존버의 중요성은 작두에도 적용된다.
사람들에게 장군의 위엄을 보여줘서 무당을 신뢰하게 만들어야 하잖아.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작두를 갈아서 위에 올라가는 거야. 내 마음속의 장군을
믿는 것. 그 믿음으로 올라가지. 신을 믿어서 올라가지만 칼날이 닿는 순간에는
서늘함이 느껴져. 그 다음부터는 참는 거야.
선생님이 존버할 수 있는 힘은 신에게서 나온다. 내가 모시는 신에 대한 믿음. 그 믿음이 무섭고 힘든 위기를 이겨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모든 힘이 신에게서 나오는 건 아니다. 신과 함께 믿음의 쌍두마차를 이루는 인물이 있다. 선생님 인생의 방패막이, 인생의 조언자가 있냐는 질문에 선생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 삶의 조언자는 나야. 내가 열심히 모시는 신과 나.
언제부터인가 내 새해 목표는 가볍게 살기가 됐다. 해가 바뀌어도 목표는 항상 똑같다. 무엇이든 가볍게, 가볍게 털어버리기. 너무 깊게 고민하고 혼자 몸에 힘을 잔뜩 주고 굳어있지 말고 조금은 유연하게, 여유를 가져보기. 나는 20대를 잔뜩 긴장한 뚝딱이로 살면서 한번도 나를 믿어본 적도, 나를 믿어보려 시도해본 적도 없다. 이제 조금씩 다르게 살아보려 한다. 내 자신을 인생의 동반자로 삼아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나아가다 보면 언제가를 나를 믿을 수 있는 날이 오리라 생긱한다.
잔뜩 긴장한 뚝딱이를 내려놓고 가볍게 살아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