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만 사는 정아씨 May 16. 2022

퇴사하겠습니다

나의 퇴사 일기 1


"일을 그만두게 되면 퇴직금이랑 모아둔 돈 다 털어서 여행 갈 거야.
그리고 그 여행 이야기를 책으로 낼 거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했던 이야기이다.


일을 시작한 지 어언 1년 반, 점점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말하는'일 태기'라는 것이 내게도 왔나 보다.



경주로 여행을 다녀왔다.


사소한 것에도 화가 나고 무기력해진 나를 위한 여행이었다.


오늘따라 미세먼지 하나 없어 보이는 파란 하늘과 즐겁게 웃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느꼈다.


출근하는 게 하나도 행복하지 않은 요즘, 

나는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 걸까.


요즘 친구들한테 직장을 그만두고 알바만 하면서 살고 싶단 얘기를 많이 한다. 한 때는 '일 벌이기 선수'라는 말을 들었던 나인데 이제는 아무것도 책임지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나서고 싶지 않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걸까?

.

.

.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진 오늘부터 내 생각을 일기로 남겨보려 한다.


어느 날 갑자기 훌쩍 사직서를 내고 떠나게 될 때,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가 아녔음을 말하기 위해.


2018.10.28




마음이 떠난 사람들은 티가 난다. 다른 사람들 눈에 나도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지금 나는 문 앞에서 문고리를 잡고 서있는 것 같다. 이 문을 박차고 나가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모르지만 이 문을 열고 나가고 싶단 생각만이 강하게 들었다.


야근 후 택시를 타고 오는데 택시 아저씨가 이렇게 늦게까지 일하는 회사가 있냐며 당장 그만두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아직 젊으니까 즐기면서 살라는 말에 정말 그래도 되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미 내겐 그걸 물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2019.03.04




오늘 그만둔다 말하려다 타이밍을 못 잡고 그대로 퇴근해버렸다. 집으로 가는 길, 입사 때 내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의 내 모습과는 너무나 비교되는 당찬 신입사원 때의 내 모습.


열심히 다니며 그래도 잘 버티고 있다 생각했는데, 열심히도 아니고 그저 자리만 지키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끝까지 열심히 하지 못한 내 모습이 부끄럽기도 하고,


또, 그래서 지금 떠나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내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내일은 이야기해야지.

정말 그만둬야겠다고.


2019.03.11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 퇴사에 대한 생각도 이미 확고하고돈에 욕심이 있지도, 지위에 욕심이 있지도 않았기에 조금만 버티고,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라는 말로는 마음이 돌아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만두겠다는 말을 내뱉는 순간, 내 안에서 마지막까지 버티고 있던 무언가마저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하지만 눈물이 나는 그 순간마저 나는 내가 뭘 잘했다고 울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회사 생활에 지쳐 일을 그만두게 만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이런 내 모습이 아닐까.


2019.03.13




친한 친구를 만나 회사를 그만두게 됐다고 말했다. 왜냐고 물으면 뭐라 답해야 할까 걱정했는데 별다른 이유도 묻지 않고 내 선택을 응원한다고 말했다. 나는 사실 이 말이 듣고 싶었던 것 같다.


나를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으로 너무나 행복한 오늘. 

행복하다. 이런 사람들이 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성공한 인생이라고 느낄 만큼.


그리고 고마움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 내가 얻은 이 힘과 위로에 대한 고마움을 진심으로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2019.03.14




대표님과 퇴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긴 이야기 끝에 퇴사는 확정됐다. 하지만 생각만큼 마음이 후련하진 않다. 끝까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이고 떠나는 게 아니어서일까.


하지만 후회는 없다. 다 타버린 성냥에 다시 불을 붙일 수 없듯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처음처럼 열심히 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


2년 동안 정든 회사를 떠날 생각을 하니 너무나 슬프지만, 너무나 슬프게도 조금의 미련도 남아 있지 않다.


2019.03.20




퇴사 D-5


퇴사를 하면 마냥 좋을 줄 알았는데, 사실 아무런 준비 없이 내지른 것이어서 퇴사 후 무엇을 해야 할지 조금은 막막하기도 하다. 배우고 싶었던 영상 쪽을 배우기 위해 학원을 다녀야 할지, 원래 계획대로 여행을 떠나야 할지 고민 중이다


살던 집도 정리해야 하고, 부모님께도 말해야 하고, 매달 빠져나가는 각종 보험금, 적금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걱정이 되지만 그래도 내가 한 선택을 후회하고 싶지 않기에,


퇴사가 내 인생에 또 다른 전환점이 될 수 있도록 잘 준비해나가야지.


2019.03.24


 




오늘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하루였다. 생각해보면 열심히 살았다고 하기에 난 너무 게을렀고, 나태했다. 노는 것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였다고 자부할 수 있지만 내 미래와 인생을 위해서 진심으로 무언가에 열중한 적이 있었던가.


그러므로 나는 '퇴사'를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열심히 무언가를 해보려는 시도로 정의하기로 했다.


사실 처음엔 퇴사 후 여행이 한 때 여행작가라는 꿈을 꿨던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지만 이젠 이것을 어떤 후회도 남지 않을 선택의 결과로 만들고 싶다.


무섭기도 하다. 이게 잘 한 선택일까 걱정도 되고 두렵기도 하지만 그래도 해보려 한다. 그리고 이 선택을 내 인생 최고의 선택으로 만들 것이다.


2019.03.25




오늘은 마지막 회식이었다. 사람들에게 내 마음을 담은 편지를 적어 선물했다. 홀가분하고 행복하다. 이제 지하철을 타고 매일 아침 향하던 이곳을 다시는 올 일 없겠지만, 그래도 내 인생에 2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 했던 이 공간을, 그 시간들을 난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퇴사 D-2,

그래, 이제 나는 무엇을 하면 될까?


2019.03.27




퇴사  D-1,

내일이면 정말 마지막이다.


오늘 퇴근 후 운동하고 걸어오면서 그동안의 시간들을 되돌아봤다.


많은 것이 변했고, 변하고 있었다. 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던 아주 오래된 맛집도 간판이 바뀌고 새로운 식당으로 바뀌었고, 퇴근 후 걸어갈 때마다 지나갔던 덕수궁 돌담길도 공사 중이었다.


어떤 노래 가사처럼 머물러 있는 것들일 줄 알았는데,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었다.


이제 나도 변해야 한다. 나의 새로운 시작과 함께.


2019.03.28




현재시간 AM 12:28

평소 같았으면, 내일 출근 생각에 뒤척일 시간이지만 이젠 아니다.


내일은 퇴사하고 맞는 첫 월요일,

늘어지게 늦잠을 자도 된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그런 걱정은 잠시만 접어두고 이 여유를 즐겨 보자.


2019.04.01


작가의 이전글 나는 뭐하는 사람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