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워홀기 1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2019년 10월 31일.
인천에서 광저우를 경유해 브리즈번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나는 호주에 왔다.
살면서 이렇게 긴 장거리 비행은 처음인지라 비행기에서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비몽사몽으로 내려, 브리즈번의 분위기를 채 느껴 보기도 전에 함께 가는 친구의 친구 소개를 받아 호주의 작은 시골 마을이지만 워홀러라면 다 안다는 '스탠 소프'라는 곳으로 가게 됐다.
비록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친구의 친구라는 작은 연이 있어 안심이 돼서였을까, 난 출국하는 그날까지 아무런 정보도 찾아보지 않고 워홀을 갔다. 심지어 내가 갈 곳인 스탠 소프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 곳인지도 몰랐다. 브리즈번이랑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도, 하지만 차를 타고 3시간 정도 더 가야 한다는 것도 출국하기 전에 알았으니까.
그리고 가자마자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말에 ‘그럼 가서 바로 돈 벌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초기 자금도 넉넉히 들고 가지 않았다. 가기 전에 친구들과 만나서 맨날 술이나 먹고, 호주 가서 브이로그를 찍겠다는 야심 찬 계획으로 카메라도 사고, 면세점에서 쇼핑도 하고 흥청망청 쓴 덕분에 내가 호주로 들고 간 돈은 1100불. 당시 환율로 100만 원 남짓 되는 돈을 가지고 아무 정보도 없이 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 무모할 수 있었을까 싶지만 나도 모르겠다. 그땐 그랬다.
처음엔 세컨드 비자까지 따야 할까 싶었지만 어차피 ‘돈 바짝 벌어서 여행 가자!’가 우리의 목표였기에 바로 농장으로 갔다. 처음 일한 곳은 스탠 소프의 이스턴 컬러라는 곳이었는데 딸기 농장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농장 생활을 시작했다.
인생은 실전이다…
호주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거라는 말만 믿고 열심히 돈 벌어서 여행 갈 생각만 했지 그 일이 얼마나 힘들지는 생각지 못했다. 그저 다 사람이 하는 일인데 별다를 게 있겠냐며 만만하게 봤다. 하지만 역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처음 한 농장 일인 딸기 픽킹은 일 자체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그리고 여러 가지 농장일을 해보고 이제야 돌이켜 보니 딸기가 제일 쉬웠던 것 같다. 이동할 때 트롤리를 끄는 게 조금 버거웠지만 바누아투라는 나라에서 온 흑인 친구들이 많이 도와줬다. 내 트롤리가 웅덩이에 빠지면 와서 빼주고, 마지막에 남는 딸기가 있으면 항상 나에게 줬다. 그리고 호주 햇볕이 세고 더운 것도 있었지만 농장 일 할 생각 하면서 덥고 힘들 거란 걸 예상 못 한건 아니니 그 또한 괜찮았다. 다만 생각과 다르게 힘든 게 있다면 그건 바로 돈이었다.
딸기 픽킹은 시급이 아닌 능력제였는데 그 말인즉슨, 시간만 채운다고 돈을 벌 수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따는 딸기 양만큼 돈을 벌 수 있는 것이었다. 잘하는 사람들은 주에 1000불, 2000불도 우스웠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농린이였고, 그렇게 힘들게 돈을 벌어 본 적도 없었기에 쉬엄 쉬엄하다 보니 정말 못 벌었었다. 이럴 거면 한국 가서 아르바이트하는 게 났겠다 싶을 정도로 못 벌었다. 하다 보면 주 1000불은 그냥 번다고 듣고 왔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농장 생활을 하면서 내가 가장 힘들었던 점은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 여기서 열심히는 그냥 좀 열심히가 아니고 정말 돈에 대한 집념이 있는 게 아니면 할 수 없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해야 많이 벌 수 있었다. 잘하는 사람들은 둘 중 하나였다. 돈에 대한 욕심이 있거나, 승부욕이 정말 세거나. 나는 그 둘 중 아무것도 해당되지 않았다. 물론 돈을 안 벌고 싶은 것도 아니고, 1등 하기 싫은 것도 아니지만, 그런 이유가 내게도 동기부여되진 않았던 것 같다.
사실 농장에서 여유로운 시골 살이를 하는 것에 대한 로망을 꿈꾸며 온 것도 있었는데, 현실에선 다들 똑같이 생긴 형광색 농장 옷을 입고 낚시 모자 쓰고, 마스크 쓰고, 눈만 내놓은 채 죽어라 딸기만 따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너무 아무것도 모르고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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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시 딸기를 따러 간다면 그때보단 훨씬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만 다시 스탠 소프에 가고 싶진 않다. 하지만 딱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워홀러라면 거의 다 가봤다는 전설의 헬불쳐를 못 간 것, 그것 하나는 조금 아쉽고, 내가 거길 갔으면 어땠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힘들다는 말은
내가 간 2019년은 스탠 소프의 흉년이었다보다. 우박, 비, 태풍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딸기 팜에 쉬는 날이 많아지고, 일을 가더라도 픽킹보단 다른 잡일을 하는 날이 많았다. 나는 딸기를 따는 것보다 그런 잡일이 더 싫었다. 잡초를 제거하고, 조그만 가위로 엉켜있는 줄기를 정리하는 일들을 했는데.. 일단 잡초가 도무지 손으로 뽑히지가 않는, 거의 사람 머리끄덩이 잡고 한 명 들어 올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깊게 뿌리 박힌 잡초를 다 뽑아야 한다. 뽑다가 도저히 안 뽑혀서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던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뭐라는 건가 싶었는데 갑자기 농장 관리자가 오더니 ‘정아 씨, 그만하시고 가서 쉬고 계세요. 저 남자 애가 농장주 둘째 아들인데 방금 정아 씨 보고 일 안 한다고 뭐라 해서…’
어이가 없었다. 아니, 일하면서 하늘도 못 보냐고. 진짜 내가 무슨 노예인 줄 아나. 짜증은 났지만 사실 한편으론 좋았다. 어차피 힘들기만 하고 돈도 얼마 안 되는데 땡볕에 일하느니 트롤리에서 낮잠이나 자야겠다 하고 모자를 얼굴에 얹어 햇빛을 가리고 자고 있었다. 그리고 한두 시간쯤 지났으려나? 일이 다 끝났는지 친구들이 와서 나를 깨우며 말했다.
“뭐야 자고 있네. 야, 괜찮아?”
“으음.. 뭐가?”
친구는 내가 갑자기 쫓겨나서 울고 있을 줄 알았다고 했다. 미안. 난 오히려 좋았는데.
그리고 픽킹을 하게 돼도 딸기 상태가 거지 같았다. 정말 거지 같단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비랑 우박에 딸기가 뭉개지고 흙먼지에 뒤덮여 있었다. 물론 그런 딸기는 따도 다 버려야 한다. 그럼 안 따면 되지 않냐고 하겠지만 일단 따긴 따야 한다. 그래야 그 자리에 새로운 딸기가 날 수 있기 때문에 안 따고 그냥 지나가면 또 안 땄다고 뭐라 한다. 그래서 돈도 별로 못 벌고, 힘들기만 하고, 일하는 날도 며칠 안되다 보니 같이 일하던 동생이 쉬는 날에 캡시컴 픽킹 알바를 간다고 해서 따라가게 됐다.
처음엔 캡시컴이 뭔가 했는데 파프리카였다. 파프리카랑 똑같은 건진 모르겠지만 생긴 거나 맛은 똑같다. 어쨌든 이 캡시컴 픽킹을 하면서 나는 농장일이 정말 힘든 일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농장 일 오래 한 사람이 우스갯소리로 딸기는 사무직이라고 한 말이 사실이구나 싶었다. 내가 했던 캡시컴 픽킹이 개인이 아닌 팀으로 하는 거여서 더 힘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랑 비슷한 수준의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거기서 오래 일한 사람들이어서 엄청 빠르고 쉬지 않고 일하기 때문에 그 속도에 맞춰 따라가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같이 간 동생 두 명은 원래 일을 잘해서 인지 힘들다고 하면서도 쭉쭉 치고 나가는데 나는 기어가면서 겨우 그들을 따라만 갔다. 바켓 채우기도 힘들고 넘겨주기도 너무 힘들고, 거기다 비도 오고, 발은 푹푹 빠지고, 처음으로 호주에 온 게 맞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힘들다는 말을 함부로 해선 안 되겠다 싶었다. 내가 지금까지 딸기 따기 싫다고 징징 댄 건 아무것도 아니구나. 이게 진짜 힘든 거구나 싶었다.
“야.. 너네 안 힘들어?”
“힘들긴 한데 아예 못 할 정도는 아닌데?”
“난 못하겠어…”
“누나, 돈 벌어야죠! 이스턴에서 얼마 벌어요?”
“몰라… 나 그냥 집에 가고 싶어.”
“저 내일도 올 건데 누나 안 올 거예요?”
“응. 안 와. 아니 못 와.”
그렇게 절대 안 간다고 했던 캡시컴인데 역시 나도 돈 앞에선 어쩔 수 없었던 걸까. 그렇게 힘들어서 다신 안 간다고 했던 곳을 그 뒤로도 쉬는 날 몇 번 더 나갔다. 힘들긴 힘든데 확실히 딸기보다 돈은 많이 벌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번은 캡시컴이 아닌 쥬키니팀으로 갔는데 이번엔 패킹이라고 쉽게 생각했던 나에게 뒤통수를 때리는 날이 있었다.
춥고, 서럽지만…
내가 한 쥬키니 패킹은 패킹장에서 하는 패킹이 아닌 트랙터 같은 걸 타고 가면서 픽킹 팀이 따서 올린 쥬키니를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패킹하는 일이었다.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달라 조금 당황했지만 그래도 막상 해보니 농장일에서도 이렇게 쉬운 일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쉽고 편했다. 그런데 왜 항상 나에게는 이런 시련이 오는 건지. 갑자기 비가 오고 바람이 엄청 불더니 쥬키니 씻는 곳에서 나오는 물이 비바람과 섞여 튀면서 입고 있던 옷이 다 젖어 버렸다. 처음엔 그래도 ‘더운 것보단 추운 게 났지’라고 생각했는데 비가 그치고 바람만 엄청나게 불더니 옷이 마를만하면 다시 비가 내리고 바람은 계속해서 불면서 이 말도 안 되는 추위에 점점 정신을 놓을 것만 같았다. 냉동창고에 갇히면 이런 느낌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맨날 픽킹만 해서 옷도 얇게 입고 갔더니 걸칠 옷도 없는 상황이었다. 덜덜 떨면서 일하다가 급기야 쥬키니 박스를 뜯어 그 안에 들어가서 패킹을 했다. 물론 내 몸이 다 가려지지도 않는 그 작은 박스가 무슨 도움이 됐겠냐만은 그땐 그렇게라도 해야 살 것 같았다.
갑자기 너무 서러워졌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러고 있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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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일을 마치고, 긴장이 풀린 건지 화장실이 너무 가고 싶었다.
“여기 화장실은 어디 있어요?”
“아 여기 화장실 없는데…”
“네? 그럼 화장실 가고 싶을 때 어떻게 해요?”
“남자들은 그냥 뒤돌아 서서…”
“……..”
환장할 노릇이었다. 픽킹은 더워서 땀을 엄청 흘리다 보니 물을 2통 넘게 마셔도 화장실 갈 일이 없었는데 이날은 추워서인지 마신 거라곤 물 세 모금이 전부였는데 금방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밭이다 보니 사방이 훤히 뚫려 있어서 어디 숨어서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최대한 남들이 안 보이는 곳에 가서 볼일을 보고 왔다. 바로 뒤에는 큰 젖소들이 50마리 있고 풀밭 사이로 언제 뱀이 나올지도 모를 그런 곳에서 비 맞은 생쥐 꼴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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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패킹하던 친구가 돌아가는 차 안에서 오늘은 자기 워홀 역사상 역대급의 날인 것 같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워홀 중에서 역대급이 아니라 살면서 이렇게 춥고 서러운 적이 있었나 싶었다.
“와, 언니 오늘은 제 워홀 역사상 역대급인 거 같아요.”
“….”
“저 지금 겨울에 흠뻑쇼 갔다 온 거 같아요.”
“… 흠뻑쇼는 재밌기라도 하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정말 이런 경험들도 내 인생에 도움이 될까? 나중에 잘 갔다 왔다는 생각이 드는 그런 값진 경험들일까? 내가 이걸 해서 얻는 게 뭐지? 돈? 하지만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잖아.’
이런 온갖 생각들을 하다 집에 도착했고, 집에 와서 씻고 나니 또 ‘그래도 날씨만 좋았으면 일은 개꿀이긴 했어, 그렇지?’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농장 일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런 생각으로 1년, 2년 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코로나의 시작
스탠 소프 시즌이 끝나가고 이제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할 때가 됐다. 원래는 카불처라는 곳으로 가서 또 딸기를 딸 생각이었지만 카불처 시즌까지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었다. 그래서 생각한 곳이 골드 코스트였다. 골드 코스트는 우리나라의 해운대 같은 곳인데 카불처랑 가깝기도 해서 골드 코스트에서 지내다 카불처로 이동하면 딱이었다.
그런데!
코로나가 터졌다…
한국에서 코로나 얘기가 조금 나올 때만 해도 그냥 신종플루 같은 건 줄 알고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있는 곳은 시골이었고, 뉴스를 보는 편도 아니라 이렇게 심각한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점점 더 심해지더니, 호주에서도 시티 쪽은 락다운 얘기까지 나오고 있었다. 락다운이 되면 시티에 살아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진다. 외출도 제한되고, 내가 꿈꿨던 낮에 바다 가서 서핑하고 저녁엔 바에서 맥주 한잔 하는 그런 생활은 전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기대했던 골코살이는 물 건너갔고, 그럼 어디로 가야 할까 부랴부랴 찾던 중 보웬이라는 곳을 알게 됐다. 그리고 같은 곳에서 살면서 친해진 동생의 지인이 보웬에서 함께 일할 사람을 찾는다고 했다. 결국 아무런 선택지가 없던 나는 그들과 함께 보웬으로 떠났다.
2021.0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