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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만 사는 정아씨 May 29. 2022

워홀... 이거 맞는 거죠?

나의 워홀기 2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보웬은 내가 있던 곳인 스탠 소프와 같은 '퀸즐랜드' 주에 있는 곳이었지만 넓디넓은 호주 땅에서 같은 주에 있다고 가깝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착각이다. 스탠 소프에서 보웬은 거리만 약 1,200km로 차로 쉬지 않고 달려도 15시간이 넘게 걸리는 아주 머나먼 곳이었다.  



우리는 차가 없었기 때문에 스탠 소프에서 브리즈번 공항까지는 친구가 차로 데려다주고, 브리즈번에서 타운즈빌까지는 비행기를 타고 갔다. 그리고 또 타운즈빌에서 보웬까지 차를 타고 들어가야 했는데, 그래서 따로 픽업을 구해야 했다.  


그런데 하필 이때 코로나가 한창 심할 때여서 승용차에 2명 이상 타면 벌금을 낸다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픽업해주기로 한 사람이 갑자기 연락이 와 픽업이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모든 게 예정돼 있어 그 픽업 말고는 방법이 없었고, 결국 픽업비를 더 내는 방안으로 겨우 설득해서 갈 수 있게 됐다.


그래도 갈 수 있는 게 어디냐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지만 이젠 집이 문제였다. 코로나 때문에 워홀러 유입이 없어 셰어 하우스 자체가 거의 없다고 했다. 집 구하기가 제일 쉬웠던 스탠 소프 때와 달리 이번엔 각종 단톡방과 페이스북 등 여기저기를 뒤져 겨우 집을 구할 수 있었다. 태국인 아줌마가 마스터인 집이었는데 사진으로 봤을 때 낡아 보이긴 했지만 깔끔해 보여 인스펙션 없이 바로 입주하겠다고 했다.  




비록 떠가기 전까지 힘들었지만 그래도 보웬은 바닷가 동네이고, 스탠 소프보다 큰 곳이라고 해서 기대를 많이 했었다. 호주에 와서 처음으로 새로운 곳에 간다는 설렘을 안고, 공항에서 내려 다시 차를 타고 가면서 차창 너머로 보이는 야자수 같은 큰 나무들과 하얗게 색칠된 아기자기한 집들은 나를 더욱 기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차에서 내려 집을 본 순간, 나는 다시 스탠 소프로 돌아가고 싶었다. 우리가 살게 된 집은 생각보다 더욱 낡은 나무집이었고, 쓸데없이 집은 크고 넓었으나 방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침대 하나 달랑 있고, 책상은 커녕 옷장도 없었다. 심지어 내 방 문은 제대로 닫히지도 않는 미닫이 문이었다.


'아, 내가 뭘 기대했던가.'




크기만 더럽게 큰 그 집은 총 10명이 살 수 있는, 나름 2층 집이었다. 방도 많고, 주방과 화장실도 여러 개 있었다. 2층에는 함께 온 동생들과 태국인인지 베트남인지 알 수 없는 아저씨들 2명이 살았고, 1층에는 같이 간 친구와 나, 그리고 다른 한국인 남자 2명이 살았다. 여자라곤 나 하나밖에 없는 집이었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함께여서 무섭진 않았다.


한 번은 밥을 먹다 주방에 도마뱀이 들어왔는데 도마뱀을 쫓아내느라 냉장고를 뒤집고 난리도 아니었다. 더운 곳이라 그런지 도마뱀을 자주 보긴 했지만 매일 봐도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녀석들이었다. 도마뱀뿐만 아니라 개미도 많고 각종 벌레들이 많았다. 그래서 저녁에는 빨래를 걷으러 밖에 나가지도 못했다. 내가 낮에 빨래를 돌리고 널어놓고, 저녁에 친구한테 걷어 달라고 했다. 빨래 너는 곳 바닥이 잔디였는데 도마뱀이랑 벌레들이 있을 것 같아 무서워서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니 참 웃기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정말 스트레스였다.


아래층에는 주방이 2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우리끼리만 쓸 수 있어서 그 점은 좋았다. 하지만 방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주방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다행히 우리는 밥솥과 프라이팬, 냄비 하나씩은 챙겨 왔기에 그릇 몇 개만 세컨드 샵, 우리말로 하면 중고장터에서 구매했다. 첫날에 칼이랑 도마도 없어서 감자 껍질을 숟가락과 가위로 자르고. 그 집에 사는 동안 참 많은 해프닝이 있었다.




보웬이 스탠 소프보다 큰 동네인 건 맞지만, 그래서 차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스탠 소프는 조금만 걸어가면 마트랑 카페, 가게들이 한 곳에 몰려 있어서 차가 없어도 크게 불편하지 않았는데 보웬은 마트-타운/카페-한인마트/바다 이렇게 나뉘어 있어서 뚜벅이인 나로선 너무나 불편한 곳이었다. 그래도 같이 간 동생이 차가 있어서 같이 다닐 땐 괜찮았지만 혼자 걸어서 카페도 가고, 바다 산책도 매일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 여기서 뭘 기대하나.'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들


내가 보웬을 오게 된 이유는 머신 토마토 일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온 거였다. 머신 토마토는 트랙터에 앉아 토마토를 따는 거라 엄청 쉽기 때문에 그 일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이 먼 곳까지 온 것이었는데 갑자기 우리 보고 플랜팅을 해야 한다고 했다.  


플랜팅이라니...  

농장일 중에서도 돈 못 벌고 힘들기만 한 걸로 유명한 그 플랜팅을..?


심지어 단가도 엄청 낮았는데, 토마토 플랜트 198개를 심으면 4불을 받았다. 4불은 우리나라 돈으로 3500원이다. 그땐 농장 슈퍼바이저가 그래도 여기 단가가 좋은 거라고 말했는데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랑 얘기하면서 198개에 4불을 받았었다고 하면 다들 깜짝 놀라는 걸 보고 역시 슈퍼바이저 말은 믿으면 안 된다는 걸 느꼈다. 허리 한번 안 피고 하는 7년 차 베트남 애들이 겨우 최저 시급 정도 나온다는데 이게 말이 되는 단가인가.


슈퍼바이저는 여기 농장주가 나쁜 놈이어서 베트남 애들이 시급 정도 나오니까 다른 워커들도 할 수 있다 생각하고 측정한 단가여서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그건 7년 동안 여기서 이 일만 한 사람들인데. 장난하나 싶었다. 이것도 지나고 생각해 보니 슈퍼바이저가 중간에 떼먹은 거 아닌가 싶긴 하지만, 뭐 아무튼.


그래도 어쩌겠나? 여기까지 온 이상 해야지. 나름 열심히 하긴 했지만 우리 시급을 따져보니 12~15불 정도였다. 말도 안 되는 시급이기도 했고, 스탠 소프에서 시급 40불 찍다 이렇게 받으니 더 작게 느껴져서 힘들었다.


그리고 덥고 힘든 건 어떻게든 참겠는데 제일 참을 수 없었던 건 바로 개구리였다. 플랜트를 심으려면 비닐로 덮여있는 땅을 손으로 찢고 구멍을 파서 플랜트를 심고 흙을 덮어줘야 했다. 그런데 한동안 비가 엄청 와서 밭에 개구리들이 엄청 많았다. 작은 청개구리가 아닌 정말 두꺼비 같은 까만색 큰 개구리. 아니, 개구리가 아니라 두꺼비라 하는 게 맞겠다.


플랜트를 심으려고 비닐로 손을 집어넣는 순간 그 두꺼비 등이 만져질 때. 그 끔찍한 느낌은 지금 생각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남자 애들도 깜짝 놀라던데 작은 벌레에도 기겁하는 나는 어땠을까. 정말 입에서 욕이 나오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밖에 안 들었다. 플랜팅이 힘들어서 보다 개구리가 너무 싫었다.  


만약 이게 나 혼자 개인으로 하는 일이었으면 플랜팅은 못하겠다 하고 집에 갔겠지만 2명이서 한 조로 해야 하다 보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래도 위안을 삼자면 우리가 항상 2등이었는데 1등은 경력자이고 토마토 탑픽커들이었다. 그래서 같이하는 친구는 계속 혼자만의 승부욕에 사로 잡혀 1등을 따라잡아야 한다며 열심히 했는데, 사실 나는 플랜트 판을 집어던지고 그냥 집에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른 농장에서 플랜팅 했다는 사람들 말을 들어 보면 맨손으로 하지도 않고 땅에 구멍도 뚫려 있다는데 내가 한 곳은 비닐조차 안 뚫려 있는 곳이 태반이었고, 도구도 없고 그냥 맨손으로 땅을 파서 넣어야 했다. 그런데 보웬 햇빛은 정말 뜨겁고 덥다. 비 온날이 아니면 땅이 촉촉하지도 않고 메말라 있는 땅이어서 더 힘들었다.


그리고 농장주도 이상한 사람이었다. 항상 화가 나있고, 소리를 질렀다. 슈퍼바이저도 농장주가 와서 난리를 치면 영혼이 나간 표정이었다. 플랜트 뿌리가 제대로 안 박혀 있다고 갑자기 멀쩡한 플랜트를 다 뽑아버리고 다시 심으라고 했다. 나중에 슈퍼바이저가 와서 다 뽑혀 있는 내 플랜트를 보더니 제대로 박아도 저렇게 손으로 막 뽑아 버리면 다 뽑힌다고. 그냥 무시하라고 했다. 농장주가 매일 오는 건 아니지만 올 때마다 이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고 가니 농장주가 오면 다들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상한 놈들은 그냥 무시하고 신경을 안 쓰는 성격이긴 하지만 이게 바로 그 '갑질'인가 싶어 기분이 매우 더러웠다.




플랜팅이 끝나면 약을 뿌린다. 옆에서 베트남 애들이 하는 걸 보면 아주 쉬워 보였는데 막상 해보니 이것도 힘들었다. 조그만 알약 2~3개를 플랜트 구멍 사이에 넣어줘야 하는데 구멍이 작다 보니 허리를 숙여서 넣어야 했다. 그리고 이 알약에 독성이 있어 맨 손으로 하면 절대 안 된다고 했다. 호주 애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안 되는구나 싶어서 장갑도 두꺼운 걸로 두세 겹씩 끼고 일했다.  


나중에 터득한 방법은 안 쉬고 한 번에 쭉 가는 게 그나마 덜 힘들다. 쉬면서 가면 더 힘들어진다. 베트남 애들이 왜 그 긴 로우를 안 쉬고 한 번에 가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로우 하나가 트럭을 타고도 5분을 가는 길이인데 땡볕 더위에서 허리도 못 피고 계속 약을 넣다 보면 머리가 띵해진다.




약을 뿌리고 나면 스틱을 박아줘야 한다. 토마토 플랜트가 자라면 그 스틱에 줄을 감아서 세워줘야 하기 때문이다. 스틱을 박는 것도 엄청 쉽다는 슈퍼바이저 말만 믿었는데 역시 슈퍼바이저 말은 절대로 믿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일단 스틱 자체가 엄청 무겁다. 쇠 스틱인데 그걸 여러 개씩 건네받다 보니 너무 무거워서 받는 순간 휘청거렸다. 5~6개 정도 주면 하겠는데 9개씩 주는 사람도 있어서 그럴 때마다 너무 화가 났다. 무거워서 휘청거리는 내 모습도 자존심 상하고, 힘드니까 짜증이 났다. 나중에 내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슈퍼바이저가 스틱 건네주는 사람에게 여자는 조금씩만 주라고 했는데 그 말도 자존심 상하고 화가 났다.


그리고 이 스틱을 주는 트랙터 바닥에 쇳가루가 가득해서 바람이 불면 쇳가루가 날린다. 첫날엔 그냥 받다가 그게 다 눈으로 들어가서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날부턴 스탠 소프에서 일하면서 받은 고글을 쓰고 갔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들 2


토마토 플랜트가 자랄 때까지 이제 그 팜에서는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밭에 비닐을 까는 일이 있었는데 슈퍼바이저가 그건 여자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스틱 박는 것도 했는데 더 힘들게 있겠냐고 했지만 친구가 하루 다녀오고 나서 그건 절대로 내가 할 수 없을 거라고 했다.  


100킬로 정도 되는 비닐을 두 명이서 양쪽으로 들어 트랙터에 꼽는 일인데 손이 낄 수 있어서 위험하기도 하고, 일단 나는 그걸 들 수도 없을 거라고 했다.


그래서 쉬는 동안 쥬키니 픽킹 알바를 했다. 처음으로 벨트를 차고 하는 픽킹이었다. 만약 누가 나에게 농장 일을 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게 뭐냐고 물어본다면 플랜팅과 쥬키니 픽킹이라고 할 것이다...




첫날은 또! 비가 왔다. 비 때문에 밭이 진흙으로 엉망진창인 데다 발이 계속 푹푹 빠지니까 너무 힘들어서 그냥 신발을 벗고 했는데 난 쥬키니에 가시가 있는지 몰랐다. 진흙에 발이 빠져 양말까지 벗겨지니 나중엔 발등이 다 긁혔다. 긴팔을 입고 했지만 쥬키니 가시에 손목도 긁히고, 바켓은 또 왜 그렇게 무거운지.  


바켓이 반이상 차고 나면 너무 무거워서 얼른 채우고 싶은데 딸 쥬키니가 없으니 결국 그 바켓을 들고 계속 걸어야 했다. 잘하는 사람들이 쥬키니가 많으면 덜 힘들다고 해서 ‘그게 무슨 소리야, 많이 따면 더 힘들지’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차라리 바켓을 빨리 채우는 게 허리에 무리가 덜 가는 것 같다.


첫날은 20 바켓도 못 땄던 것 같다. 하지만 하다 보니 가시에도 적응이 되면서 그냥 쉬엄쉬엄하면서 50 바켓을 땄다. 물론 그 당시 기준으로 하루에 100 바켓은 따야 잘하는 거였지만, 나는 하다가 힘들면 그냥 아이스박스 깔고 앉아서 쉬고 중간만 가자는 생각으로 했다. 슈퍼바이저는 계속 우리가 쥬키니 없을 때 온 거라고 하던데 스탠 소프도 그렇고 내 첫 농장 생활은 다 시기적으로 운이 없었나 보다.




그리고 쥬키니를 따면서 나보다 농장일을 못하는 사람도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유럽 애들이야 원래 열심히 안 하니까 그렇다 쳐도 가끔 알바 오는 남자들도 나보다 못 따는 걸 보고 농장일 하면서 바닥 쳤던 자존감을 그 사람들을 보면서 겨우 끌어올렸던 것 같다. 물론 그래 봤자 나도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픽킹 끝! 패킹 시작


그렇게 쥬키니 알바와 각종 농장 잡일을 하면서 힘들어도 해나가는 내 모습에 혼자 대견스러웠던 와중에, 워홀 첫 현타가 제대로 왔다.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도 들고, 농장일 한 것 중에 지금이 가장 힘든데 돈은 제일 못 버니 이게 맞는 건가 싶었다. 토마토 픽킹을 시작하게 되면 주에 2000불씩 번다고 했지만 쥬키니 픽킹을 해 보니 그렇게 맨날 토마토를 딸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토마토 픽킹을 시작하기 일주일 전쯤에 그만두겠다고 말했다.


토마토 농장을 그만두고 이번엔 칠리 농장에 갔다. 칠리는 쥬키니 보다 가볍기도 하고, 워낙 힘든 걸 하다 가서 인지 전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처음 워홀 오기 전 생각했던 이상적인 농장 일과 가까웠다. 작은 팜이어서 일도 많이 하지 않고, 외국인 친구들과 수다 떨면서 적당히 일하고, 놀면서 일했다.  


하지만 일하는 시간이 짧은 만큼 돈 벌기엔 알맞지 않은 곳이었다. 일하는 사람도 없고, 한국인도 없어서 농장 생활 처음으로 1등도 해봤지만 의미 없는 탑픽커였다.




점점 더 워홀의 의미는 잃어가고, 재미도 없고, 힘만 들고, 막막했다. 그래서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다 팩킹쉐드에 지원하게 됐다. 물론 이미 시즌이 시작된 지 한참 지나 사람을 다 구했다고 들었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지원서를 보내 놓고 만약 7월까지 지금과 달라지는 게 없다면 시티를 가든, 한국을 가든 이 호주살이를 결판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딱 7월이 되는 날. 지원했던 팩킹쉐드에서 연락이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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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끝이 날 것 같았던 내 워홀 생활은 또 다른 시작을 맞이하게 됐다.


2021.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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