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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솜사탕 Mar 17. 2022

9화. 새로운 시작

만 28세, 뇌경색 판정받았습니다.│얼렁뚱땅 써보는 투병일기

Start of Something New


 친구와 가족 덕분에 우울한 감정에서 어느 정도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때는 발병 후 2주를 내리 쉬고 3주 차가 되는 월요일, 재택으로 업무 복귀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격리 해제는 되었지만 코로나 증세가 아직 낫지 않아서 아침 일찍 동네 이비인후과에 다녀왔다. 원래는 차를 끌고 다니는데 눈이 이 모양 이 꼴이라 운전을 할 수 없으니, 재활이라 생각하고 천천히 걸어서 다녀왔다.(사실 차를 바꾼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갑자기 눈이 나빠지는 바람에 차는 타지도 못하고 매달 할부금만 꼬박꼬박 내고 있다. 하필 또 집 주차장이 필로티 구조라, 거기에 계속 두니 먼지가 뽀얗게 쌓여 차 색깔을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다...)


 그런데 평소에 자주 다니던 곳인데도 걸어서 10분 거리인 병원에 다녀오는 게 너무 힘들었다.(물론 보통 사람 걸음으로 10분이고, 현재 내 걸음으론 20분 이상 걸리는 거리긴 하다.) 눈에 익숙한 집안이 아니라 탁 트인 곳에 나가 사방을 둘러보며 걷다 보니 어지러움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소파에 털썩 앉은 채로 이것도 이렇게 힘든데 회사는 어떻게 가지 하고 걱정했다.


 곧 업무시간이 되어서 이제 슬슬 일을 시작하려고 퇴원 후 처음으로 컴퓨터를 켰다. 업무가 많이 밀려있어서 동료에게 얼른 (업무에) 붙겠다는 톡을 보내고 쳐다보는데...컴퓨터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과 TV를 곧잘 보던 때라 당연히 컴퓨터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거리감이 달라서인지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당황해서 이리 보고 저리보고 했지만 자판도 화면도 잘 보이지 않았다.(이건 지금도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불빛을 내는 스크린이 일반적인 사물보다 더 잘 안 보인다. 핸드폰을 보는 데에도 시간이 꽤 걸렸었다.)


 당당하게 이번 주부터 복귀하겠노라 선언했는데 막상 이렇게 차디찬 현실을 마주하니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우려하던 일이 현실이 된 것 같아 다시 무너져버렸다. 발병 후에 엄마와 통화하면서 단 한 번도 운 적이 없는데, 이 얘길 전하면서는 펑펑 울고 말았다.(나만 창피할 순 없으니 일러바치는 건데, 이때 엄마도 같이 울었다.) 눈이 돌아오지 않아 제일 두려웠던 것은 원래의 내 일상을 잃는 것이었다. 나는 내 일을 사랑하고, 내 취미를 사랑하고, 내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런 일상을 되찾지 못할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웠다.


 절망감 속에 빠져있던 나는 오늘 내로 넘겨야 하는 업무들을 떠올렸다. 우는 사이 이미 카톡이 여러 개 쌓여있었다. 나는 세 살도 아니고 자그마치 서른 살이다.(제목은 만 28세지만...어쨌든 만 나이 통일법이 통과되기 전까지는 코리안 에이지로 서른이다.) 마냥 울고 있을 나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나한테는 먹여 살려야 할 토끼 같은 강아지가 있다. 뇌졸중 전문 의사가 뇌경색 환자는 가급적 빨리 회사에 복귀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던 유튜브 영상도 떠올랐다.(일을 쉴수록 다시 복귀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점, 빠른 복귀가 우울증 극복에 도움이 된다는 점 등이 이유였다.)


 나는 일단, 어떻게든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2주나 일을 쉰 상태였고, 더 이상 쉬기엔 너무 민폐라고 생각했다. 나는 왜 컴퓨터가 보이지 않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핸드폰과 TV를 곧잘 보게 된 데에는 익숙해졌다는 점이 컸다. 그 얘기는 자주 보면 볼수록 눈에 익어 잘 보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나는 퇴원하고 컴퓨터 화면을 처음 본 것이니 당연히 안 보일 수 있는 거다! 컴퓨터 화면을 자주 보고, 보는 연습을 하면 점점 더 잘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화면 속 글자 크기를 있는 대로 키워놨다. 마치 눈이 침침한 어르신들이 쓰는 효도폰처럼 내가 가진 모든 전자기기의 글자 크기를 키워두었다. 그리고 컴퓨터로 잘 보이지 않는 영상은 핸드폰으로 옮겨 제일 잘 보이는 거리에 두고 시청했다.(직업 특성상 영상을 많이 본다.) 글을 쓸 때는 글자 크기를 키우고 눈을 이리저리 굴려가며 작성했다. 그렇게 그날의 업무는 평소보다 시간이 좀 많이 걸리긴 했지만 끝까지 해낼 수 있었다.(이게 뭐라고 그렇게 뿌듯하던지...)


 복귀 후 첫 업무를 마친 나는 컴퓨터 화면에 익숙해질 겸,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친구들이 치료 기록을 남겨두라며 글을 쓰라고 제안하던 때였다. 뇌를 많이 쓰고 일상을 기록해보는 것, 그리고 새로운 일을 시작해 보는 것이 뇌졸중 재활과 우울증 극복에 좋다고 했다. 나는 얼마 전 나한테 일어난 이 믿을 수 없는 일들을 기록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에게 어디에 글을 쓰는 것이 좋냐고 물어보자 브런치를 추천해주었다. 작가 승인까지는 5일 정도 시간이 걸렸지만, 서랍 속에 미리 쓴 글을 저장해두는 것은 가능했다.


 나는 그날 밤늦게까지 글을 썼다. 아직 몸이 낫지 않았는데도 무식하게 오랜 시간 타자를 쳐서 팔과 어깨가 아프기도 했다. 퇴원 이후 이처럼 무언가가 이렇게 열정적으로 하고 싶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창작욕구를 불태워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나한테 있었던 일들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뿐이니 어려울 것도 없었다. 카톡에 남겨두었던 글들과 사진을 참고해 입원 생활의 하루하루를 기록했다. 지난 2주간 다른 이들이 잘 경험해보지 못했을 법한 경험을 했던 나는 이 내용으로 글을 쓰는 게 너무 재밌었다.


 첫날 한 번에 3편까지 다 쓴 나는, 다음날에도, 다다음날에도 계속 일기를 썼다. 5편쯤 쓰고 나자 컴퓨터 화면을 보는 것이 꽤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TV도, 핸드폰도, 컴퓨터 화면도 곧잘 보였다. (내가 말하는 '곧잘 본다'라는 말은 '보는 것이 가능하다'라는 뜻이지 예전처럼 또렷이 보인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어지러워지면 중간중간 쉬어야 했다. 지금도 글자가 좀 번지고 흐릿하게 보이긴 데 뭐...알아볼 수는 있으니까 그냥 쉬어가면서 글을 쓴다.)


 업무에 복귀한 지 4일 차가 되고, 어느 정도 일기가 쌓이고 나자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브런치의 작가 승인을 기다리며 블로그를 개설했다. 그리고 브런치 서랍에 써두었던 일기들을 블로그에 하나하나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 가족들과 친척들, 친구들, 회사 동료들까지 내 일기를 읽게 되었다. 글을 많이 쓰는 직업이면서도 내가 쓴 글을 남한테 보여주는 것을 썩 즐기진 않아서, 이렇게 공개적으로 개인적인 글을 쓴 것이 처음이었다.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최대한 생생하게 쓰다 보니 내 낡은 잠옷 바지부터 생리현상까지 모조리 공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새로운 취미가 생긴 것 같아 아주 즐거웠다.


 업무 외 시간의 대부분을 글을 쓰는 것에 투자하다 보니, 부정적인 생각에서 많이 벗어났다. 사실 아직 코로나 증세도 남아있어 심한 기침을 하다 구토하기도 하고, 안 보이는 눈으로 이것저것 보려다 보니 어지럼증을 느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전만큼 우울하지 않았다.(그냥 눈이 언제 돌아올까 걱정하는 게 전부다.)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글로 적고 다시 읽어보고 있으면, 제 3자가 된 것 같아 재밌었다. 분명 나에게 일어났던 일인데도, 소설을 보는 것처럼 웃으며 보게 되었다. 사실 지금도 종종 내가 쓴 글을 몇 번이고 다시 읽는다. 나르시시즘의 끝판왕 같지만, 이렇게 전에 힘들었던 일들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고 나면 집에 와 있는 지금이 행복하게 느껴졌다.


 눈이 잘 안 보이는데 어떻게 글을 쓰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사실 처음에는 잘 안 보이는 눈으로 쓰려니 엄청난 오타가 생겼다. 그래서 브런치의 맞춤법 검사 기능을 통해 깔끔히 수정하고, 수많은 퇴고 끝에 업로드했다. 그래서 꼭 브런치에서 먼저 작성하고, 블로그로 옮기곤 한다.(컴퓨터 글자 크기를 엄청나게 키워둔 것도 한몫했다.) 지금은 글을 쓰는 것도 익숙해져서 오타가 많이 줄어들었다. 뭐든 반복이 답인 것 같다. 역시 연습만이 살길인가.


 내가 어린 시절 좋아했던 디즈니 영화 '하이스쿨 뮤지컬' 시리즈 중 1편 초반에 나오는 'Start of Something New'라는 노래가 있다.(사실 하스뮤 1편은 내가 좋아하는 잭 에프론이 직접 부른 게 아니라 다른 가수가 녹음한 것을 립싱크한 것이라 2편, 3편에 비해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요즘의 나는 왠지 이 노래가 자꾸 생각났다.)


 농구에 빠져있던 트로이와 공부에 빠져있던 가브리엘라가 단 한 번도 도전해보지 않았던 분야인 노래를 새롭게 시작하게 되며 진정한 자신을 알아가는 이야기이다. 일상 속에서 대화를 하다가 난데없이 춤추고 노래하는 걸 어색해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봐도 좋을 것 같다.(2006년도에 나온 영화라는 것을 감안해주길 바란다. 매우 오글거리는 저세상 감성의 옷과 헤어스타일, 노래...)


https://youtu.be/zBG-sEGlULs


 블로그보다 유튜브에, 글보다 영상에 훨씬 익숙해져 있던 내가 글을 쓰게 되고, 그것도 내 개인적인 일상을 이렇게 공유하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나한텐 이게 말 그대로 'Start of Something New'였다.


 눈이 안 보이는 것에 집착하고 절망하는 것보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이 날 낫게 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재활의 목적으로 글쓰기를 시작했지만, 글쓰기를 통해 살아갈 동기와 새로운 힘을 얻었다. 짧은 글과 영상이 대세인 요즘 세상에서, 나 혼자 시대를 역행하듯 다시 아날로그로 돌아가 긴 글을 쓰고 또 썼다.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읽어줄 사람이 몇이나 될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글을 읽어줄 다른 사람을 위해 쓰기보다 내 자신을 위해 썼다. 지금의 힘든 시간들을 담은 글들을 훗날 다시 한번 읽어보며 웃을 나를 위해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마 앞으로도 종종 글을 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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