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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솜사탕 Mar 17. 2022

10화. 옥순이 이야기

만 28세, 뇌경색 판정받았습니다.│얼렁뚱땅 써보는 투병일기

'옥순이'를 위하여


 뇌경색 발병 후 3주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일주일 만에 95%까지 회복한 눈은 그 상태에서 더 이상 좋아지지 않았다. 물론 거기까지 회복한 것도 정말 다행이긴 하지만... 눈이 그대로라 낙담한 아침을 3주째 맞이한 나로서는 빨리 예전으로 돌아오길 바랐다. 집안처럼 익숙한 공간에서는 움직임이 자유로웠지만, 바깥에 나가면 묘하게 느껴지는 어색함과 일그러진 모습에 어지러움을 느꼈다.(웃긴 건 챙이 있는 모자를 쓰고 나가 시야가 가려지면 어지럼증이 덜했다.)


 먼 곳을 볼 때 왼쪽 눈은 또렷이 잘 보이고 오른 눈은 안경을 안 쓴 것처럼 흐리게 보이는데, 두 눈을 동시에 뜨고 세상을 바라보면 묘하게 이상한 필터를 끼고 보는 느낌이 났다.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아이들의 장난감 거울이나, 중국산 싸구려 거울을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거울을 보면 세상이 일그러져 보이고 굉장히 어지럽다. 나는 마치 모든 것을 그 거울을 통해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시력이 나빠진 것은 아니라서 다 알아볼 수는 있지만... 말로 표현하기 너무나도 어려운 느낌이 든다.


 투병일기 3화를 읽은 사람이라면 내가 괴사 해버린 뇌세포를 '옥순이'라 이름 붙이고, 이 세포를 죽인 뇌경색을 '옥순이 살인사건'이라 부른다는 것을 알 것이다. (모른다면 이 링크로 가서 3화를 보고 오길 바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회차이다. )


https://brunch.co.kr/@343354eb10b54eb/4


 하필 많고 많은 이름 중에 옥순이인 까닭은, 내가 입원 전 시트콤 '순풍 산부인과'의 선우용녀 캐릭터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 회차에서 선우용녀가 '옥순이와 빡순이' 개그를 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그게 어찌나 웃기던지, 같이 본 친구와 배를 잡고 웃었다.


https://youtu.be/3KUdz9_8DFQ

옥순이와 빡순이 개그는 이 영상 8분 38초쯤에 등장한다.


 아무튼, 내가 그렇게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뇌경색이 마치 소설 속 해프닝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뇌세포를 괴사시킨 뇌경색은 범인을 찾지 못해 미제로 남겨진 살인사건이고, 시야 담당 뇌세포였던 옥순이는 그 사건으로 인해 세상을 떠난 것이다.


 투병일기에 쓰인 내용은 단 한 글자의 거짓도 없이 모두 실제로 나에게 일어났던 일인데도, 글로 써놓고 읽어보면, 마치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그냥 '뇌경색'보다 '옥순이 살인사건'! 이 얼마나 흥미로운가! 나는 이 끔찍한 병이 마치 가벼운 해프닝인 것처럼 앞으로도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가족들 사이에서는 이미 옥순이 얘기가 많이 회자되었는데, 엄마가 이런 톡을 보내기도 했다.

마치 실존인물의 명복을 비는 듯한 진지함에 엄청나게 웃었다. Pray for 옥순...


  지난 회차에서 내가 쓴 글이 길어 찬찬히 모두 읽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엄마는 모든 글을 단 한 글자도 빠짐없이 읽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쓴 글마다 한글자 한글자 꼼꼼히 읽은 엄마는 종종 전화를 걸어 감상평을 들려주곤 했는데, 얼마 전 통화를 하다 옥순이 얘기가 나왔다. 내가 눈이 95%까지 나아진 이후 그대로 멈춰있다고 말하자, 엄마가 세포들이 빨리빨리 안 배우고 있나 보네라고 답한 것이다. 나는 그 얘길 듣고, 사실 세포들은 매일 엄청난 노력 중인데 옥순이가 하던 일이 어려워 완벽히 배우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거라는 얘길 꺼냈다. 그리고 이 과정을 시험과 합격에 빗대 얘기했다. 이 내용을 짧게 소설 형식으로 묘사해보겠다.




연필과 종이가 만나 사각대는 소리만 들려오는 이곳은 시야 담당 부서.

여러 명의 세포들이 업무 담당 자격을 얻기 위해 시험 응시 중이다. 이곳의 담당자였던 옥순이는 얼마 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타살이라는 의혹 아래 조사가 계속되었지만, 범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공석이 된 옥순이의 자리를 메꾸기 위해 다른 세포들이 빠르게 해당 업무를 배웠지만, 3주가 넘게 지나도록 합격자가 나오질 않았다. 100점 만점이 합격 커트라인인 시험에서 95점을 맞은 응시자가 있었지만 아직까지 그게 최고 점수였다.

 시험 감독관을 맡은 두 세포는 열심히 시험 문제를 푸는 세포들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이번 시험 역시 합격자가 없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말이야... 옥순이가 일 하난 참 잘했었는데..."

감독관들은 부서 왼쪽 끝, 비어있는 자리를 쓸쓸하게 쳐다보았다. 옥순이가 생전에 사용하던 자리이다.

오늘도 합격자가 나오지 않는다면, 세포들은 또다시 공부를 시작해 다음 시험을 준비하게 될 것이다.




 엄마와 나는 저런 상상을 하며 깔깔댔다.(이 글을 쓰다 느낀 건데 난 정말 INFP 그 자체다. 제일 잘 하는 것 : 쓸데없는 상상하기) 눈이 회복되지 않아 우울했었는데, 이제는 내 머릿속에서 세포들이 이렇게나 노력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조급하던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언제든 돌아오지 않는 눈에 대한 걱정이 날 집어삼키려 할 때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생각했다. 옥순이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세포들. 그게 몇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꼭 100점을 맞는 응시자가 등장할 것이라 믿는다.(그렇게 되고 나면 그 아이의 이름은 빡순이라 지을까나)


 현실이 너무 버겁고 힘들다면, 이를 가볍고 재밌는 것들로 비유해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도 방법이다. 그럼 지옥 같던 현실이 디즈니나 투니버스가 될 테니까. 나는 오늘도 옥순이와 세포들을 생각하며 힘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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