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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솜사탕 Mar 13. 2022

7화. 지구로 귀환하다

만 28세, 뇌경색 판정받았습니다.│얼렁뚱땅 써보는 투병일기

DAY 7 : 입원 마지막 날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어제부터 수액 말고도 해열소염진통제 약을 먹기 시작했는데, 그 약 덕분인지 오늘은 그나마 컨디션이 괜찮았다. 나는 아침 일찍부터 혹시 퇴원 소식이 들리진 않는지 귀를 쫑긋 세우고 두리번 댔다. 그건 다른 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코로나 병동으로 옮겨진 지 일주일이 넘은 두 환자(내 옆자리와 대각선 할머니)는 이제 이곳을 벗어나 일반 병동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환자들이 가득한 일반 병동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코로나 바이러스 수치가 어느 정도인지 철저히 체크해야 했다. 두 분은 어제 저녁에 코로나 검사를 했는데, 그 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 회진 시간이 되고, 제일 먼저 병실 문을 연 것은 내 담당 의사들이었다. 주치의 선생님은 방호복을 입은 채 내가 오늘 집에 갈 거라는 이야기를 건넸다.(제일 늦게 들어온 환자가 제일 먼저 탈출한다는 소식에 다른 병실 메이트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몇 가지 주의사항과 퇴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 의료진이 병실을 나가자, 조용히 엿듣고 있던 병실 메이트들의 입이 열렸다. 대체 우리 검사 결과는 언제 나오냐는 이야기부터, 저 아가씨가 나가는 걸 보니 우리도 오늘 나갈 것 같다는 둥 온갖 토크가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옆자리 환자는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밝은 표정으로 오늘 일반 병실로 나가자마자 가족을 불러 머리부터 감을 거라며 해맑게 웃었다. 다들 일반 병실로 돌아가 자유의 몸이 되면 하고 싶은 일들을 늘어놓느라 수다가 끊이질 않았다.


 나는 집에 가기 위해 며칠 전 격리 해제가 되어 자유의 몸이 된 남동생을 불렀다. 확진자의 몸으로 원무과에 가 퇴원 수속을 밟을 수 없으니 동생이 대신 와서 수속을 하고 날 집에 데려다 주기로 했다. 1층 통제구역에서 날 바로 태워야 하기 때문에, 무슨 첩보 작전처럼 동생이 끌고 오는 차종과 색깔, 차량 번호 등등 자세한 정보를 간호사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그리고 보험 청구에 필요한 서류나 약을 처방받는 일에 대해 여기저기 전화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딴 얘기지만 실비 보험이 없었다면, 난 이미 알거지가 되었을 것이다. 여러분 모두 실비 보험 드세요!)


 그러던 중, 한 간호사가 들어와 다른 병실 메이트들이 목을 빼고 기다리던 코로나 검사 결과를 전해주었다. 양손을 맞잡고 쉽게 얘기를 꺼내지 못하며 머뭇대던 간호사는 어렵게 입을 떼었다. 두 분 모두 나아지긴 했으나, 전염력이 아예 없을 만한 수치는 아니어서 아직 일반 병동으로 옮길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간호사의 말에 집중하던 대각선 할머니는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며 애꿎은 머리카락만 쓸어 넘겼고, 내 옆자리 환자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미 일주일 이상 동고동락해 사정을 잘 아는 간호사는 덩달아 같이 눈시울이 붉어졌고, 휴지를 꺼내 눈물을 닦아주며 껴안고 달랬다. 그렇게 한참을 같이 울다가, 조금만 더 힘내자는 말과 함께 간호사가 병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병실 안에는 옆자리 환자의 훌쩍이는 소리만이 맴돌았다. 아무도 나에게 눈치를 주지 않았지만, 나는 왠지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들어온 지 이틀밖에 안 되었는데 이 와중에 나 혼자 집에 가게 된 것이 너무나도 죄송할 지경이었다.(나는 코로나 바이러스 측면으로만 봤을 때, 고령의 환자들만큼 위급한 환자는 아니었고, 가뜩이나 코로나 병실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러한 환자는 집으로 보내 자택치료를 하게 되어있었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도 울고 계신 옆자리 환자 분께 휴지를 건네드렸다. 그분은 휴지로 눈물을 닦으며 여느 때처럼 따뜻한 목소리로 "고마워"라고 답하셨다. 잠시도 쉬지 않고 수다가 들려오던 이 병실이 유일하게 조용하던 순간이었다.

 

 일반 병실에 입원해있는 것 역시 고역이지만, 코로나 병동은 차원이 다르다. 문 밖으로 고개조차 내밀 수 없고, 창문을 포함해 사방이 꽉 막힌 이곳에 있다 보면, 그나마 복도라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일반 병실이 마치 천국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거동이 불편한 환자에게는 간병인을 둘 수 없는 이 곳이 더욱 힘들다. 간호사가 있긴 하나 바이러스 때문에 상주할 순 없으니, 물 한 잔을 마시려 해도 호출기를 눌러야 했다.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어차피 같은 병원 안인데 여기 며칠 더 있나 다른 병실에 있나 그게 그거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곳에서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힘겨운지 알고 있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내 맞은편 환자가 분위기를 바꿔볼 겸, 나에게 질문을 건넸다.(내가 먼저 말을 건 적은 있어도, 나에게 한 번도 말을 건 적이 없었는데, 아마 어떤 병명의 환자이길래 이렇게 빨리 집에 가는지 궁금했던 것 같다.)


 "아가씨는 뭐 때문에 입원했어?"


 "저 뇌경색이요."


 그 한 마디에, 조용하던 병실이 다시 시장통마냥 와글와글 시끄러워졌다. 세 분 모두 '세상에 마상에 아이고 저런' 이런 단어들을 내뱉어내며, 곧잘 걸어 다니길래 그렇게나 큰 병인지 전혀 몰랐다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눈물을 흘리던 옆자리 환자마저 눈물을 뚝 그치고는 분개하며 이게 다 백신 때문이라고 소리를 쳤다. 나이가 몇인지, 어디서 어쩌다 쓰러졌는지, 백신은 뭘 맞았는지, 마치 기자회견을 하는 것처럼 쉴 새 없이 질문이 쏟아졌고, 한순간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나는 물의를 일으킨 톱스타의 심정으로 하나하나 진중히 답해드렸다.


 내 얘기를 모두 듣고 난 병실 메이트들은 골든 타임을 놓치지 않고 치료를 잘 받아 천만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 옆자리 환자는 나에게 혹시 8층(뇌졸중센터)에서 오지 않았냐며, 내 담당 의사 선생님의 이름을 댔다. 정확한 이름 석자에 그분이 맞다고 대답하자, 자기도 그 선생님에게서 치료를 받았다며 역시 우리 모두 백신 부작용이라고 말을 쏟아냈다. 그분이 계시던 병실에 나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 여자 환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백신을 맞고 뇌출혈이 터지는 바람에 눈이 보이지 않아 입원했다고 했다. 나 역시 백신 부작용 외에는 의심할 만한 원인이 없다며 동조했다.


 숨겨왔던 나의 병명이 드러나 와글와글 시끄러워진 것도 잠시, 퇴원 때문에 간호사들이 계속해서 날 찾아왔다.(사실 숨기려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나, 딱히 드러낼 이유도 없었다.) 내가 확진자이기 때문에, 입원할 때 입고 온 옷을 입고 나갈 수 없으며, 동생 보고 새로운 옷과 신발을 가지고 오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얼른 동생에게 전화해 아무 옷이나 대충 챙겨 오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당시 동생을 제외한 가족 모두가 확진되어 격리 중이라, 유일하게 자유의 몸인 동생이 모든 가족의 손과 발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렇게 동생을 기다리는데, 다시 간호사가 들어와 이야기를 전했다. 생각해보니 아무리 격리 해제된 완치자라고 하더라도 동생은 일반인이고 나는 확진자이기 때문에 동생과 접촉할 수 없다고 했다.(자차로 데리러 올 수 있는 가족이 있으면 부르라고 해놓고는, 이미 동생이 거의 다 와갈 때쯤에야 이 이야기를 전달받아서 어안이 벙벙했다.) 그래서 동생이 창구에서 옷만 전해주고, 원무과에 들러 퇴원 수속을 밟고 나면, 나는 방역 택시를 불러 집에 따로 가야 한다고 했다. 여기까지 온 동생을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웠지만, 일단은 집에 가는 것이 우선이니 알겠다고 하고는 전달받은 방역택시회사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이 병원에서 우리 집은 그리 멀지 않았지만, 서울시에서 경기도로 넘어가는 거라서 그런지 택시 회사에서 12만 원이라는 요금을 불렀다. 나는 그냥 무조건 네네 대답하고는 택시를 불렀다. 퇴원을 하려니 챙겨야 할 게 얼마나 많던지, 정신이 하나도 없어 그 액수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던 것 같다.(알아보니 특수목적 택시이기 때문에 보통 10만 원 정도 든다고 한다.)


 잠시 후, 동생이 가져온 옷이 간호사를 통해 전달되었고, 나는 황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그 위에 파란색 방호복을 입어야 했다. 방호복을 본 적은 많지만 입어본 것은 처음이었는데, 입는 법을 몰라 헤매고있자 간호사가 도와주었다. 방호복은 생각보다 너무 덥고 숨이 턱턱 막혔으며, 내가 내쉬는 숨에 페이스 실드가 자꾸 뿌얘져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의료진들은 하루 종일 이걸 입고 일을 하다니...!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다 입고 나자 간호사가 들어와 내 짐을 다시 한번 이중 포장했고, 내가 들고 있던 서류와 핸드폰마저 확진자의 짐이라 외부로 노출될 수 없다는 이유로 꽁꽁 포장되었다. 삽시간에 소통할 핸드폰마저 볼 수 없게 된 나는, 동생이 퇴원 수속을 한 건지 안 한 건지 조차 모른 채 답답한 방호복 속에서 대기해야 했다. 쌕쌕거리는 내 숨소리만 크게 울려 퍼지는 방호복을 입고 있자니, 마치 우주선 속 우주인이 된 기분이었다.


 나의 부산스러운 퇴원 과정을 모두 지켜보던 병실 메이트들은 자기들까지 정신이 없어 죽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각선 할머니는 간호사들을 붙잡고 "우리는 일반 병실 갈 때 저거 안 입어도 되는 거지?" 하며 불안한 표정으로 재차 확인했다. 맞은편 환자는 저런 꼴을 하고 집에 가느니 그냥 여기 있겠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동네 사람들이 저게 뭐냐고 기겁을 할 거라며 말이다. 확진자의 퇴원 과정은 너무너무 복잡했고 100M 밖에서도 알아볼 듯한 이 방호복은 숨이 막혔다.


 끝없는 대기에 지쳐갈 무렵, 한 간호사가 와서 진행상황을 말해주었다. 확진자가 바깥으로 나가려면 지나가는 통로 전체를 일일이 출입 통제해야 하고 그 과정만 30분 가량 걸린다고 했다. 동생이 퇴원 수속을 마쳤고, 택시 역시 도착했으나 통제 과정에 시간이 걸리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했다. 이 얘길 들은 나는, 나 하나 때문에 여러 명이 고생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내가 얼른 나가야 더 위급한 환자가 이곳에 와 치료받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복잡한 심경을 한 채 대기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오후 3시가 넘어갈 때쯤, 드디어 간호사가 문 밖으로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병실 메이트 한 분 한 분마다 인사를 드렸다. 페이스 실드가 습기로 뿌얘진 탓에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계신 쪽으로 고개를 숙여 건강하시고 안녕히 계시라는 인사를 전했다. 대각선 할머니는 여기서 씻지도 못하고 답답했을 텐데 가자마자 감기 걸리지 않게 따뜻한 물로 싹 씻으라는 얘길 해주셨고, 맞은편 분은 앞으로도 건강하란 얘길 해주셨다. 내 옆자리에 계셨던 분은 특유의 따뜻한 눈빛으로 "가서...다시는 여기 오지 마" 라는 말을 담담히 건넸다.(방호복을 입고 뚝딱이던 때라 말귀를 제대로 못 알아먹고 "이제 격리 끝나면 다시 외래 진료 와야죠ㅎㅎ" 하는 바보 같은 답변을 드렸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다신 이렇게 아프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아직까지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인사다.)


 간호사 분들과도 인사를 나눈 나는, 그렇게 다신 나올 수 없을 것 같던 코로나 병동의 문 밖을 나섰다. 페이스 실드의 창을 통해 밖을 바라보자, 머물던 우주 기지에서 문을 열고 나와 지구로 향하는 우주선에 타기 위해 이동하는 우주인이 된 것 같았다. 습기로 뿌옇게 변한 시야 사이로 곳곳에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경호원들이 보였고, 내 짐을 낑낑 들고 가는 이송 기사님의 뒤를 쫓아 열심히 따라갔다.(응급실에 실려왔을 때 입고 있던 롱 패딩부터 친구가 두고 간 노트북까지... 온갖 짐이 다 있어서 무거울 만도 했다.) 도착한 곳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입구가 아니라, 병원 뒤쪽에 있는 외부 출입구였다. 그 출입문 밖은 꼭 병원이 아니라 공장 같은 모습이었는데, 병원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저장하는 창고와 이를 병원 내부로 옮기는 지게차들이 가득했다.그리고 그 사이에 검은색 밴 한 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인천공항이라고 쓰여있는 것을 보니 공항에서 자주 보이던 콜밴이었다.

 

구글링 해서 가져온 사진. 방역 택시는 이 차와 비슷하게 생겼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공항에 오가는 사람도 적을 텐데, 그 때문에 일자리를 잃은 콜밴 기사들이 이제 방역 택시를 운영하고 계시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나처럼 방호복을 챙겨 입은 기사님이 내려 트렁크에 짐을 실었고, 나는 뒷자리에 올라탔다. 내부는 일반 밴과 다르게 운전석과 뒷자리가 투명한 창으로 분리되어있었다. 출발 전, 기사님은 나에게 정확한 주소를 물으셨고, 나는 "OO동이요!!!! OO동!!!" 하고 수십 번을 외쳤지만, 둘 다 방호복을 입고 있어 잘 안 들리는 데다가 그 사이에 가림막까지 있어 기사님이 정확한 주소를 알아듣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나갈 때 주차비 2천 원을 요구하는 주차요원 때문에, 기사님이 나보고 퇴원 서류를 달라고 했으나 핸드폰까지 깡그리 포장당해 트렁크에 넣어진 마당에 나한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상황을 들은 직원이 그냥 차단기를 열어주었고 무사히 병원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가뜩이나 방호복 때문에 덥고 답답한데 가림막까지 쳐진 차를 타고 이동하려니 멀미가 났다. 페이스 실드는 이미 습기로 가득 차 창밖을 쳐다봐도 바깥이 잘 안 보일 지경이었다. 그래도 드디어 집에 간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우주복을 입고 드디어 지구로 귀환하는 우주선에 올라탄 것이다. 얼른 도착해 이 우주복을 집어던지고 지구의 공기를 들이마시고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역 택시가 익숙한 동네로 들어섰다. 평일 늦은 오후라 그런지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나는 갑자기 이런 꼴을 하고 집 앞에 내려야 한다는 것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내릴 때 근처에 사람이 있기라도 하면, '어머 저기 확진자 나왔나 봐'하고 쳐다볼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우리 집 앞 골목에는 주차된 차 몇 대만 있을 뿐,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빠르게 차에서 내려 기사님이 건넨 짐을 받았다. 짐이 생각보다 너무 무거워 낑낑대고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 드디어 페이스 실드를 벗어던졌다.


 드디어, 그렇게나 바라던 집이었다. 막상 오면 너무 좋아서 팔짝팔짝 뛸 것 같았는데, 이미 기나긴 퇴원 과정으로 너무 지쳐버린 나는 그냥 모든 것을 빨리 정리하고 쉬고 싶었다. 무사히 귀환한 것을 자축할 틈도 없이 나는 얼른 방호복을 벗어 쓰레기봉투에 넣기 시작했다. 같이 사는 친구에게 혹시나 옮길 수도 있으니, 바이러스가 있을 만한 것은 모조리 다 버렸다. 그리고 이중 삼중 포장된 짐을 풀어 하나하나 살균 소독제로 꼼꼼히 소독하기 시작했다. 눈이 완전히 돌아온 것도 아니고, 돌아오는 차에서 멀미까지 한 상태로 소독하려니 힘들어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병원에서 사용하던 것들은 단 한 개도 빠짐없이 소독하고, 버릴 물건을 모아 묶어두었다.


 그리고 나서 제일 하고 싶었던 샤워를 했다. 내가 눈을 감으면 똑바로 서 있지 못한다는 것을 이때 깨달았다. 머리를 감을 때도 넘어질까봐 한 쪽 눈씩 번갈아 뜨며 감았다. 과정이 어찌됐든 나는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음에 감사해했다. 깨끗히 씻고 나서 마스크와 니트릴 장갑, 손 소독제, 살균물티슈 등을 챙겨 방에 들어갔다. 병원에서 잘 때 잠이 안 오면 종종 집에 누워있는 상상을 했었는데, 그러다 눈을 뜨면 집이 아닌 병원인 게 너무 싫어서 역효과가 나곤 했다. 이제는 상상이 아니라 진짜 내 이불 속에 몸을 눕힐 수 있었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이 밀려왔다.(누가 보면 한 몇 달 입원해있다 나온 줄 알겠네.)


 그제서야 핸드폰을 찾아 카톡창을 열었는데, 동생에게서 왠 사진 한 장이 와있었다. 사진을 본 나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낑낑대며 짐을 들고 집에 들어서는 나의 모습


 동생 녀석이 내가 걱정되었는지 집에 들어가는 모습이라도 보려고, 퇴원 수속 후 몰래 우리집으로 향한 것이었다. 먼저 도착해 차 안에서 기다리다가 집앞에 왠 밴 한대가 멈추길래 누나인가 싶어 쳐다보는데, 내가 저런 모습으로 내렸다고 했다. 동생은 차 안에서 줌을 당겨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맨 나의 모습을 찍었고, 덕분에 방호복을 입은 내 모습이 흐릿하게나마 사진으로 남게 되었다. 이 사진은 지인들에게 내가 퇴원했음을 알리는 용도로 쓰였고, 카톡방은 곧 'ㅋㅋㅋ'으로 도배되었다.


 나는 여전히 후각과 미각을 잃은 상태였지만, 그래도 무사히 집에 돌아온 기념으로 뭔가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서 초밥을 시켜먹었다. 아무런 맛도 없이 식감만 느껴지는 마당에 물컹한 초밥은 굉장히 잘못된 선택이었지만, 그래도 병원의 저 콜레스테롤 처방식이 아니라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저녁이 되고 퇴근해 돌아온 친구가 강아지 유치원에서 데려온 솜이를 내 방안에 살짝 넣어주기도 했다. 강아지는 코로나로부터 안전하다고 하지만, 내새끼를 혹시 모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던 나는 마스크와 장갑을 철저히 챙겨입고 솜이와 조우했다. 후각이 돌아오지 않아 그리웠던 솜이 냄새는 맡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눈앞에 솜이가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다. 솜이 역시 영문도 모르고 엄마가 집에 들어오지 않으니, 그동안 날 많이 찾았다고 했다. 솜이는 날아갈 듯이 꼬리를 흔들고, 한시도 내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사실 일주일 정도 못 본게 다이긴 하나, 그 때의 우리는 마치 이 영상만큼이나 절절했다.


https://youtu.be/vgkiJkG3oJE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주인과 1년 만에 조우한 반려견 이야기

(사실 투머치라 생각해 일기에 쓰지 않았으나 병원에서 이 영상을 보며 솜이 생각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제 집에 돌아왔으니 남은 것은 회복 뿐이었다. 아직 돌아오지 않은 눈도, 코로나 증세도 얼른 낫길 바랐다. 오늘 퇴원하느라, 또 소독하느라 힘을 많이 쓴 탓인지 몸살 기운이 몰려왔다. 오늘 무리한 탓일거라 생각하며 얼른 약을 챙겨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나는 숨막히는 우주를 떠나 지구로 무사히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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