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지금은 이런 상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전의 우울한 감정을 글에 드러낼 때마다 지인들에게 걱정 어린 연락이 많이 오지만, 현재는 이 감정에서 벗어나 많이 나아졌음을 밝힌다. (너무 걱정 마세요)
입원 생활이 너무나 힘들었던 나는, 퇴원이 마치 인생의 최종 목표인 것 마냥 그것만 바라보며 살았다. 그래서 막상 퇴원을 하고 나니, 모든 여정이 끝난 것처럼 여겨졌다. 투병생활을 끝내고 모든 병이 완치된 사람처럼, 눈도 곧 나을 거고 머지않아 행복한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지만 인생은 역시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지.)
나는 퇴원한 당일 밤부터 엄청나게 아팠고, 삼시세끼 먹는 진통제를 가뿐히 이겨버리는 코로나 바이러스에게 격리 기간 내내 두들겨 맞고 있었다. 병원에 있을 때는 거추장스러운 수액 링거를 하루빨리 떼어버리고 싶었는데, 막상 맨 몸으로 집에 오니 수액을 맞을 때와 맞지 않을 때의 몸 상태가 확연히 달라서 그 위력을 절실히 느꼈다. 아무리 코로나라고 해도 이게 이렇게까지 안 나을 일인가 싶었지만, 입원 4일 차에 확진되었으니 이미 면역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에서 걸린 터라 이겨내기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매일 아침 먹는 자궁내막종 치료약과, 아침저녁으로 챙겨 먹어야 하는 뇌경색 약, 그 외 하루 네 번이나 챙겨 먹어야 하는 코로나 약까지. 하루 다섯 번씩 약을 챙겨 먹어야 했고, 그 종류와 시간도 가지각색이라 병원에서 뽑아준 복약지도서를 부엌 냉장고에 붙여놓고 참고해야 했다.(지금이야 이미 다 외워버려서 그냥 먹지만, 약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이걸 봐야만 때 맞춰 먹어야 할 약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약을 통째로 받아온 탓에 하도 헷갈려서 아침/점심/저녁/밤으로 기호를 표시했다. (아니 잠깐, 사진을 올리다가 이제서야 알았는데, 나 자몽을 먹으면 안되는구나...??)
나는 끊이지 않는 기침 가래와 코 막힘, 몸살 등, 코로나 바이러스를 온몸으로 느끼며 격리되어 있었고, 집 나간 후각과 미각이 돌아오지 않아 뭘 먹든 병원 밥보다도 못한 음식처럼 느껴졌다. 퇴원한 날부터 며칠간은 매일 하루에 1kg씩 빠질 만큼 거의 뭘 먹지 못했고, 하루 종일 누워만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신체적인 아픔보다 더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돌아오지 않는 눈에 대한 절망감이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집에만 오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로만 알았던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예전 같지 않은 눈 상태를 느낄 때마다 눈물이 났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양 눈을 번갈아 떠보며 시력을 체크했고, 흐릿하게 번진 천장이 보일 때면, 그냥 다시 눈을 감고 다시는 뜨고 싶지 않았다.
그중 제일 견디기 힘든 점은 내 얼굴을 핥아주는 솜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너무 가까운 물체는 어지럽고 흐릿해 잘 보이지 않는데, 유솜사탕은 늘 코앞까지 다가와 뽀뽀를 해주기 때문이었다.) 솜이가 들이댈 때마다 그 귀여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마치 라이온 킹에서 심바를 안아 올리는 원숭이 라피키처럼 팔을 쭉 뻗어 들어올린 뒤 얼굴을 보곤 했다. 그리고 놀아달라고 장난감을 물고 올 때마다, 기력이 없어 놀아주지 못하는 것이 너무 미안했다.
솜이 얼굴이 보고 싶을 때면 이렇게 솜이를 들어 올려 거리를 두고 쳐다보았다.
구조가 익숙한 집 안에서는 무리 없이 생활할 수 있었지만, TV를 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조차도 인물이나 자막이 빠르게 움직이는 예능 프로그램 같은 것은 보기 어려웠다. 제일 많이 본 것은 딩고의 '킬링보이스'다. 사운드가 메인인 영상이라 그냥 들으면 되는 데다가, 화면에 나타난 인물이 거의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서서 노래를 부르니 보기 편했다. 배경 역시 아무런 소품 없이 원색의 조명뿐이라 안 보일 일이 없었다.
가장 많이 본 영상은 가수 윤하의 킬링보이스인데, 조회수가 290만 대일 때부터 보기 시작한 게, 어느덧 310만 회가 다 되어가니 그중 1만회 정도는 내가 보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많이 보았다.(*비유적인 표현일 뿐이며 실제로 한 IP가 만 번을 본다 해도 그렇게 집계되진 않는다.) 2007년에 발매한 앨범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오랜 시간 윤하의 노래를 좋아했는데, 이번 킬링 보이스에 나온 노래들 역시 너무나도 좋은 노래가 많아서 거의 하루 종일 틀어놓았던 것 같다.(잇츠라이브도 이렇게 본 적이 없는데... 조금 찔리긴 했다.)
혹시라도 관심이 있다면 꼭 한번 보길 바란다.(모든 곡이 명곡이다!) 이 영상에서 가장 내 가슴을 후벼 팠던 노래는 단연 '답을 찾지 못한 날'이다.(14:07초에 나온다.) 아침마다 눈을 떠서 보이지 않는 눈에 절망했던 나에게 너무나도 와닿는 노래였다. 그래서 이 노래가 나올 때면 눈물이 났다.(노래는 또 왜 이렇게 잘하는지...) 눈이 돌아오지 않아 일상생활도, 사회생활도 하지 못할까 봐 무서웠던 나에게 이 영상이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사실 나는 이때 내가 우울증 증세를 보인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그냥 뭘 먹기도 싫고, 보기도 싫고 해서 하루 종일 잠만 잤던 게 전부다. 물론 자꾸 노래를 틀어놓고 울거나, 눈이 안 보이는 것에 대해 자책하기도 했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조금이라도 머리가 아프거나 손이 저리기라도 하면, 이대로 잠들었다 영영 깨어나지 못할까봐 무서워 잠을 설치기도 했다.(자다가 몸이 마비되었는데, 가족들이 자는 줄 알고 그대로 두었다가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뇌경색 환자의 사례를 인터넷에서 종종 본 탓이었다.) 나는 이러한 두려움과 절망감 속에 깊이 빠져들어갔다.
그런데 같이 사는 친구는 그런 나를 절대 가만히 두지 않았다. 친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절망 속에 빠질 때마다 달려와 날 건져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감정에서 빠져나오는 데 친구가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솜이를 돌볼 힘도 없어서 강아지 유치원에 좀 맡겨달라고 부탁했었는데, 친구는 단 한 번도 솜이를 유치원에 맡기지 않고 내 곁에 두었다. 처음엔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대체 왜 그러나 했는데, 알고 보니 솜이도 없이 혼자 있을 내가 더욱 심한 우울감에 빠질까 봐 솜이를 곁에 둔 것이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고 싶은데 됴됴됴됴 하는 발소리와 함께 뛰어와서 얼굴을 핥아대는 솜이가 귀찮았지만, 그 덕에 어두운 방 안에서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날이 많았다. 내 상황을 전혀 알 턱이 없는 솜이가 해맑게 놀고 있는 것을 볼 때면 웃음이 지어졌다. 그리고 그런 솜이를 잘 보기 위해 눈을 이리저리 굴려보기도 했다.
친구는 주 6회 출근을 하면서도, 출근 전에 집 청소를 하고 내가 밥을 굶을까 봐 그날 먹을 식사를 차려놓고 나갔다. 어느 날은 된장찌개와 시금치를, 어느 날은 새콤한 걸 먹어야 미각이 돌아온다는 얘길 들었다며 골뱅이무침을 해주기도 했다. (딴 소리지만, 이 친구는 슈퍼 유전자를 가진 건지 뭔지 병실에서 확진자인 나와 두 끼를 같이 먹고도 확진되지 않았다. 퇴원 후 집에 돌아와 격리했을 때도 철저히 방역하긴 했지만 한 집살이를 하는 게 걱정이었는데, 무려 7번의 검사에서 모두 음성이 나왔다. O형이라 그런가?)
당시 본가에 있던 아빠, 남동생, 엄마, 외할머니까지 정말 모든 가족이 코로나 확진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엄마는 본인의 몸이 아파 치료중이면서도 따로 떨어져 있는 날 걱정해 이것저것 택배로 보내곤 했다. 그렇게 받은 식재료 중에 소고기가 잔뜩 있어서 친구와 4일 내내 소고기 파티를 하기도 했다.
친구가 차려준 밥상 (feat. 이를 탐내는 솜이 코)
미각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는데도 정말 맛있었던 골뱅이무침
엄마가 기운을 차려야 한다며 잔뜩 보내준 소고기
나는 친구의 요리와 엄마의 지원 덕분에 점차 기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역시 사람은 먹어야 사나 보다. 처음엔 아무 맛이 나지 않았던 고기도 하루가 다르게 맛이 조금씩 느껴졌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답을 찾지 못한 날'과 같은 노래에 빠져있었던 나는 종종 tv나 핸드폰으로 비슷한 음악을 들었는데, 친구는 방 안에 있다가도 금세 뛰쳐나와 "내가 우울한 노래 듣지 말랬지!"하고 노래를 꺼버렸다. 아무리 작게 틀어도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는 바로 튀어나와 분위기를 바꿨다. '답을 찾지 못한 날'을 듣고 있으면, "원래 이 세상에 답이란건 없어!"하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처음엔 너무 과장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어이가 없었고, 나중엔 그 과장된 행동이 오히려 웃겼다. 내가 우울감에 빠질까 봐 걱정하는 친구의 맘이 느껴져서 고마웠다. 이렇게까지 신경 쓰게 만든 게 미안하기도 하고 너무 고맙기도 한 나날들이었다.
친구는 실없는 농담을 해 나를 웃겨줄 때도 많았다. 나는 '뇌경색'이라는 단어가 도통 입에 붙지를 않아서 말을 하려다가도 종종 '뇌색..뇌색경...' 이라고 버벅댔다. 친구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뇌섹녀야 뭐야"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나와 친구는 이 아무것도 아닌 말장난에 한참을 웃었다. 안녕하세요 만 28세, 뇌섹녀 판정받은 사람입니다.
입원 생활을 쓴 일기 중에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라는 부제를 단 회차가 있다. 내가 어떤 모습이든 평소와 똑같이 꼬리를 흔들며 날 사랑해주는 솜이와 우울이란 바닷속에 잠겨 있던 나를 건져 올려준 친구, 그리고 몸은 떨어져 있어도 늘 응원과 위로를 보내주는 가족들과 지인들로부터 살아갈 힘을 얻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그건 아마 수천 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사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