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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법모자 김시인 Jan 21. 2024

詩詩한 일상 21

11살의 나에게

11살의 나에게



창경궁이 창경원이었던 시절, 저 오래된 한 장의 사진이 45년 전 내가 그곳에 갔었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나래시조 총회를 마치고 몇몇 분과 창경궁을 걸었다. 간간이 비가 내렸고, 바람도 불었다, 그러나 온몸을 웅크리게 하는 겨울 추위는 아니어서, 적당히 차가운 공기가 오히려 청량감을 안겨 주었고, 모처럼 만난 반가운 얼굴들과 걷는 걸음이라 목소리도 걸음도 들떴다. 깡마른 겨울나무에 꽃이 피는 상상을, 여린 연둣빛 잎을 틔우는 상상을 하니 그때의 풍경들이 그려지기도 했다.



초등학교 4학년, 선생님께서 '통일에 관한 글짓기'를 해 오라는 숙제를 내주셨다. 한 번도 글짓기를 해 본 기억이 없었고, 더구나 원고지 7장을 채워야 한다는 선생님의 엄포는 무서운 압박감이었다. 그때 나는 무슨 말을 써 원고지 7장을 채워 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방학 때 학교를 갔는데, 운동장에서 친구가 나를 불러 세우더니 니가 글짓기한 게 어디 당선되었다고, 교장 선생님께서 니가 오면 교장실로 데리고 오라 했다며 나를 교장실로 이끌었다.


생애 첫 글짓기, 혼자 방바닥에 배를 깔고 그 난감했던 시간을 채우던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다. 어떻게 내 글이 뽑히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나는 여름방학 때, 국토통일원에서 전국 초•중•고 학생을 초대하는 2박 3일 일정에 초등부 경남대표로 초대받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면소재지도 나가본 적이 없는 촌 가시내의 서울 나들이는 온통 낯섦과 두려움 투성이었다. 2박 3일 동안 통일전망대도 가고, 롯대제과도 방문하고, 국립묘지도 참배하고 저곳 창경도 갔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몇 달 뒤 학교로 저 사진이 와서 담임 선생님께서 전해주셨다. 내게는 초등학교 시절의 몇 안 되는 소중한 사진이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문학을 향한 나의 동경은. 그러나 그 동경은 늘 아팠다. 마음껏 동경할 수 없었고 마음껏 다가가지 못했으니까. 나는 쉽게 포기했고, 아니 해 보지도 않고 포기했다. 네 현실로는 이룰 수 없는 꿈이라고, 나 자신이 나에게 그렇게 속삭였으니까.


대학을 가지 못한 내가 시시했고, 대기업이나 금융 계통에 에 취직하지 못한 내가 시시했고, 부자가 아닌 내가 시시했다. 문학에 대한 동경은 먼 나라의 꿈처럼, 애써 외면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밑불을 온전히 깨트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오래, 멀리 오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창경궁을 거닐며, 열한 살의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네가 품었던 동경은 시시하지 않았다고.


얼마 전 '데미안'과 '싯다르타'를 다시 읽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싯다르타'와 '데미안'과 '데몬'이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들은 결국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일 수 있는 내면의 자신이라는 것을. 그리고 스스로를 '할 수 없다'고 믿었기에, 그런 현실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음을. 

우리는 때로 '데미안'이며 '싯다르타'다. 또 때로는 '데몬'이고 또 때로는 수많은 싱클레어들이다. 우리는 이미 완성된 존재인 '붓다'가 우리 자신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외부에서 그를 찾고자 방황한다. 자신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있다면,  외부 환경과 타인이 내 삶에 아무런 결정권이 없음을 알게 된다. 우리 모두는 그 여정 속에 있다.


열한 살의 내가 잡았던 문학이라는 줄, 그 줄을 부여잡고 춤추리라, 비명과 환호, 고통과 즐거움의 롤러코스트에 몸을 맡기고 그 순간을 살리라 결심해 본다. 11살의 나에게 이제 안심해도 된다고, 그러니 수줍게 웃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데미안

#싯다르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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