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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종 Aug 11. 2023

<여름 상설 공연>

2023년 6번째 책

제목: 여름 상설 공연

작가: 박은지

줄거리징검다리 같은 슬픔을 건너며, 요괴와 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꿈

박은지 시인의 첫 시집 『여름 상설 공연』이 민음의 시 288번으로 출간되었다. 박은지 시인은 201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간결하고 명징한 언어로 여기와 저기, 현실과 환상이라는 대립되는 두 세계를 오가며 “균형 잡힌 사유와 감각을 보여 주는” 시라는 평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박은지 시인은 데뷔 소감에서 “발밑이 무너지거나, 흩어진 나를 찾아 이리저리 뛰거나, 가만히 울면서 오늘을 보낼 때”마다 시의 힘을 빌렸다고 말했다. 박은지의 시는 낭떠러지 끝에 선 듯한 현실 인식으로부터 촉발되는 듯 보이지만, 시에서 드러난 현실은 단지 무력함과 공포만으로 가득 찬 곳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 그러므로 반드시 지켜져야만 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이중의 노력이 필요하다. 현실에 의해 자신이 망가지지 않아야 하고, 현실을 망가뜨리지도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 사실로부터 땅에 단단히 발을 붙이고 ‘먼 곳’을 향하는 박은지의 시적 환상이 펼쳐진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매일같이 펼쳐지는 환상의 무대를 약속하는 제목 ‘여름 상설 공연’은 현실과 환상의 팽팽한 공존을 예감하게 한다. 박은지의 시에서 환상은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마법 같은 순간이 아닌, 바로 여기에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하는 환상이다. 환상적인 세계의 시작과 끝, 시도와 실패를 매일같이 반복할 것을 약속한다. 박은지 시인은 이 약속을 함께하자고 손을 내민다. 벗어날 수 없는 곳에서 가장 먼 곳을, 매일 실패하는 곳에서 가장 불가능한 것을 함께 꿈꿔 보자고.


한달 여 만에 완독한 시집. 사실 여름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사서 얼른 읽어버리려고 했더니만 여름의 한가운데까지 와버렸다. 기대한 것이 하나 있었다면 <여름 상설 공연>이라는 제목에 걸맞은 여름 감성 물씬한 시들이 축축히 묻어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여름 상설 공연>이라는 시가 있었나? 그것도 아니었다. 보통 실려있는 시의 제목 중 하나가 시집 제목도 되는데 쩝. 내 시집은 아니니까~읽기 시작한 거 열심히 읽어나갔다. 박은지 시인의 시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쓸쓸함이 느껴졌다. <짝꿍의 이름>에서 사랑하는 짝꿍을 따라 줍지 못한 이름이 없을 때까지 이름을 줍는 행위라던지, <텐트 앞에서>에서 더 이상 손에 쥘 것이 없어 눈을 마주치는 장면이라던지...그러나 쓸쓸함을 자아내는 건 사랑이라고 두 시를 포함한 여러 시들에서 사랑이 묻어났다. 사랑이란 건 뭘까. 현실과 환상을 허무는 것일까. 사랑에 빠지면 낮과 밤도 사라진다 했으니 말 다 했지 뭐.


그렇게 누군가의 목소리에 응답하며 "잘 살자고/손을 꼭 잡고/그래도 잘 살아야 한다고" 말하며 그 "어깨에 쌓인 먼지를 털어주"는 일이 우리로 하여금 조금 더 걸어갈 수 있게 만든다. 먼 곳을 상상하는 일이 어떻게 가까운 곳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절벽에서 떨어지지 않을 수 있게 하는가. 


해설의 마지막 문장이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문장. 시인이 상상하는 먼 곳이란 어딜까. 우리는 그 먼 곳을 향해 가까운 곳에서 손을 잡고 걸어가고 때때로는 달려가다 넘어지며 밀리기도 한다. 그 모든 게 '나아간다'고 할 수 있으니 오늘도 손을 꼭 잡아본다.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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