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많이 지쳐있었다. 아이 한 명 키우면서 엄살이 심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 두 살 때 허리 디스크가 재발하면서 바닥에 앉으면 허리가 찢어질 듯이 고통이 밀려왔고, 그러다 보니 별 뜻 없이 한 아이의 행동에도 어른의 잣대를 들이밀어 쉽사리 화를 내고는아이가 잠들면 미안해하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승진 시기가 다가오면서 번아웃이 오기도 하고, 모든 일에 무기력해졌다.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다. 답답한 가슴을 열 곳이 필요했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다. 나를 갉아먹는 일상생활에서 멀어지면 회복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언제가 될지 모른다는 초조함과 더불어아이에게 좀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은바람까지합쳐져 나의 등을 밀었다.
신혼 때 루브르 박물관을 간 적이 있다. 박물관에 철퍼덕 앉아 스케치북을 펴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학생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우리나라 박물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모습을 보고 나도 아이가 태어나면 이곳에서 머무르며 자유분방함을 맛 보여 주리라 다짐했었다. 그래서 임신했을 때부터 난 아이가 초등학교를 가면 한 달 정도 유럽에 가서 살다 오겠다며 남편에게 은근슬쩍 운을 떼어놨었던 터였지만 막상 실천에 옮길 수 있을까 막연하였다.
출근길에 친구와 통화를 하다가 아들과 함께 말레이시아를 간다는 얘기를 들었다. 평상시 같으면 잘 다녀와로 끝났을 대화였지만, "나도 갈까?""그래. 같이 가자." 하면서 갑자기 일이 진행되었고, 이미 비행기에 어학원, 숙소를 다 예약해 놓은 친구의 일정과 비슷하게 비행기와 숙소, 아이가 다닐 어학원을 예약하였다.프랑스에서 말레이시아로 나의 여행지가 바뀐 것은 아쉽긴 하지만 프랑스는 나의 로망이었고 말레이시아가 현실에 좀 더 가까웠다.
친구는 우리보다 먼저 도착하는 일정이었고, 아이와 나는 싱가포르에 도착하여4박5일 여행을 하고 버스로 이동하여 쿠알라룸푸르로 가서 친구네 아이와 몇 주간 어학원을 보내고 마지막에는 말레이시아 다른 지역을 여행하는 일정이었다.
막상 예약을 하고 나니 온갖걱정이 밀려들었다. 평상시에도 두통을 달고 사는 걱정인형인데 낯선 곳을 아이와 가려니 여행 중에 혹시나 아이가 아프면 어쩌지 하는 불안과 예약은 제대로 된 것일까, 위험하진 않을까등의 온갖 근심걱정이 나를 짓눌러 출발 전 두 달여간은 체한 듯이 가슴이 답답하고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럼에도난 여행이 좋다. 그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과 체험을 해볼 수 있거니와, 평상시의 나라면 남의 눈치를 보느라 하지 못했을 행동도 할 수 있다. 하루를 잘 보내고 숙소에 무사히 도착할 때면 왠지 모르게 나 자신이 뿌듯해지기도 한다. 주체성을 회복하는 기분이랄까.
여행은 정말 참으로 신기한 매력이 있다. 낯선 곳에서의 두려움, 언어 전달의 어려움으로 인한 답답함, 숙소로 돌아왔을 때 밀려오는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낯선 곳에서 받을 수 있는 에너지와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김영하 작가는 여행을 하는 이유가 다시 편안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함이라고 했다. 일상에 지쳐 여행을 떠나지만 다시금 평안함을 느끼기 위해 일상으로 돌아오게 되는 일탈의 과정을 겪으며 우리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슈퍼트리쇼
드디어출발일이 다가왔다. 욕심쟁이엄마의사심이 가득 찬 여행이 시작되었다.
아이야, 이번 여행을 통해 너만의 작은 세상을 만들어보렴. 나도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볼게.
아차차... 공항버스에서 마실 커피와 양념들을 집에다 그냥 두고 나왔네. 흠.... 여행을 잘 다녀올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