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아빠 없이 장거리 비행을 잘 견딜 수 있을까 염려했지만 아이의 물음표는 비행기에서도 발휘되어 이것저것 다 눌러보고 구경하다 보니 6시간이 훌쩍 지나갔고,창이공항에저녁 10시 넘어 도착을 했다. 창이공항은 입국만 하고 쿠알라룸푸르에서 출국할 예정이기에 늦게 도착하긴 했지만 지구마불 세계여행에서 빠니보틀 편에 나왔던 유명한레인보텍스는 꼭 가고 싶었다. 아직 아이에겐 기운이 남아있어 보이기에(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스카이트레일을 타고 쥬얼창이로 건너갔다. 아쉽게도 인공폭포와 라이트쇼는 이미 끝나버린 상태였다. 장관 같은 폭포를 보진 못했지만 돔으로 된 식물원, 조금 더 과장하면 울창한 숲에 들어서 있는 듯했다. 싱가포르의 첫인상은 싱그러움 그 자체였다. 그곳을 거닐며 감흥을 더 느끼고 싶었지만 어미로 돌아와 마음을 다잡고 자정이 되기 전 숙소에 도착하기 위해 서둘렀다.
'아... 드디어 너와 나의 여행이 시작되었구나. 많은 걸 보여주고 싶지만 그 마음이 앞서 너를 재촉하거나 속상하게 만들지 않도록 노력해 볼게. '
20대만 해도 시간별로 여행 계획표를 짰었다. 플랜 A, B까지 생각하면서. 그런데 막상 여행을 하다 보면 나의 생각처럼 되지 않을 때가 많았으며, 짜인 일정대로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하루에 한두 군데 다니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저질체력 남편과 쉽게 피로를 느끼는 평발 아들과의 여행은 그야말로 아주 여유 있고 편안해야만 했다. 하루 10시간을 돌아다녀도 가보고 싶은 곳은 다 가봐야 하는 나와 그들은 여행스타일이 달라도 너~무 달랐고, 그것을 점점 받아들이면서 나도 그들도 중간지점에 이르렀으리라. 하여 나의 싱가포르 여행 계획도 하루에 1~2군데 들르는 것으로 대략적인 일정만 짜놓았다. 싱가포르의 날씨를 가늠할 수 없었기에 일단 가고 싶은 관광지로 마리나 베이 샌즈, 가든스 바이 더 베이, 유니버설 스튜디오, 사이언스센터, 어드벤처 코브, 동물원, 내셔널 갤러리 등을 염두에 두고 그날그날 날씨에 따라 움직이기로 하였다.
숙소는 캐리어 2개에 아이까지 있어서 가성비를 고려한 저렴한 숙소(싱가포르 물가가 매우 비싼 편이라 가성비 숙소도 20만 원 안팎이다)에서 내리 5박을 했는데 나름 편리한 위치에 있어 아이도 나도 대만족 했다. 특히나 며칠 뒤 아이가 아파 병원을 갈때 도움을 많이 주기도 해서 아이의 이 호텔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한없이 높아졌다.
첫째 날, 싱가포르의 랜드마크인 마리나 베이 샌즈와 가든스 바이 더 베이를 가기로 결정하자마자 서둘러 아이를 재촉해 지하상가에서 카야토스트를 먹이고 지하철을 타러 갔다. 개찰구 앞에서 미취학 어린이의 무료 교통카드를 발급받아줬더니 아이가 입이 찢어진다. 자. 이제 버스 탈 때나 지하철 탈 때 네가 찍고 지나가는 거야. 아이들은 이런 사소한 것 하나도 너무 좋아한다.
지하철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왔더니 너무 덥다. 인터넷에서 매일 검색했던 'IJOOZ'자판기가 눈앞에 보였다. 2~3달러를 결제하면 순식간에 오렌지 4개의 껍질이 벗겨지고 즙이 되어 컵에 담긴다. 싸고 신선하고 달기까지 하다. 신문물을 맛본 아들의 눈이 커진다. 한 모금 남길 줄 알았더니 다 먹어버렸다. 걸어갈 힘을 얻고 다시금 걸어가 본다. 1박에 백만 원 가까이하는 마리나베이 샌즈가 눈앞에 다다랐다. 저 멀리 호수 끝에는 머라이언이 보인다. 찰칵찰칵 일단 다 찍고 본다.
마리나베이몰에서 멤버십카드를 만들면 삼판보트를 무료로 탈 수 있다는 글을 미리 읽었기에 바로 카드를 만들고 보트를 탔다. 삼판 보트를 타면 어제 볼 수 없었던 레인보텍스의 미니 버전을 맛볼 수 있다.
그 또한 이런 느낌이려니 나 자신을 위로하며 한 바퀴 씽 돌고 내렸다. 무료로 즐길 수 있는디지털라이트캔버스에서도 아이는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며 즐겼다.
이제 가든스 바이 더 베이로 가볼까?
쇼핑몰을 나오자마자 금세 덥다. 아이 목에 물을 축인 수건을 감싸주고 모자를 씌워도 땀이 주르륵 난다. 군데군데 놀이터에서 놀며 잘 따라와 주는 아이가 새삼 기특하다.
클라우드 포레스트는 가장 큰 인공폭포가 있는 식물원이었고, 플라워돔은 테마정원이었는데 그나마 클라우드 포레스트가 볼만했다. 플라워돔은 점점 걷기 지친 상태여서 사실 좀 억지로 걸은 기억이 있다. 덥고 시원하고 가 반복되다 보니 금방 지친다.
그 와중에 거센 비가 내렸다.
아이가 아침부터 걷느라 고생했으니 숙소 가기 위해 대중교통을 타러 또 걸으라 하기가 미안해져 그랩을 불렀는데 픽업장소를 잘못 찍었다. 넓디넓은 정원에서 방향도 못 찾겠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뛰고, 안 되는 영어로 통화하고, 결국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간신히 그랩을 타고 숙소에 도착했다.
여행은 참으로 스스로를 피곤하게 몰아세우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열망하는 욕구로 인해 계속 가방을 싸고 푼다.
숙소로 돌아와 잠시 유튜브 시간을 주니 신이 났다. 한동안 쉬다 보니 저녁시간이 다가왔다.
싱가포르에 왔으니 유명한 음식은 먹어줘야지. 오늘은 특별히 나를 위해 칠리크랩을 쏜다. 평상시 같으면 아이가 먹을 음식으로 찾겠지만 그냥 오늘 딱 하루는 나를 먼저 생각하는 저녁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대신 볶음밥도 있으니 양보해 주렴 ㅋㅋ 나의 시커먼 속을 들켜서인가... 10분도 안 되는 식당을 가는데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후드득 비가 떨어진다. 비가 점점 세차 진다. 물을 튀기면서 잰걸음으로 식당을 갔지만, 방금 갈아입고 나온 바지 아랫단은 홀딱 젖어버렸다. 놀리는 것도 아니고 식당에 들어서서 자리에 앉으니 비가 잦아들다가 그친다. 역시 동남아시아의 날씨는 예측불가이다. 양심은 남아있기에 가장 작은 사이즈의 크랩을 시키고 볶음밥과 크런치새우, 번, 그리고 맥주까지 한잔 시켰다. 사실 너무 많은 건 알았지만 다 맛있다고 해서 안 먹어보면 후회할 것 같아 여행 중 처음인자 마지막 플렉스를 해봤다. 결국 크랩만 간신히 먹고 남긴 음식들은 포장해 달라고 해서 다음날 아침으로 해치웠다. 난 낭비가 없는 여자니까!!!
저녁을 먹고 그냥 숙소로 가긴 아쉬어 낮에 갔던 곳을 또다시 간다. 이번에는 저녁에만 하는 마리나베이샌즈 라이트 쇼와 가든스 바이 더 베이 쇼퍼트리쇼를 보기 위해... 블로그 글을 봤을 때는 시간텀이 많진 않지만 충분히 두 가지 쇼를 볼 수 있다고 했기에 일단 라이트 쇼를 보기로 했다. 물 위에서 펼쳐지는 조명과 물줄기의 향연, 무언가 줄거리가 있는 듯 하지만 그건 기억이 잘 안 나고 화려함만으로 이미 시선을 빼앗기 충분했다. 끝나자마자 서둘러 슈퍼트리쇼를 찾아 가는데 이상한 길로 가니 호텔 벨보이분이 친절하게 안내해 주셔서 시간 내에 슈퍼트리 아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멘트 바닥에 내 옷을 깔고 아이를 눕히고 나도 대자로 누웠다. 세 개의 커다란 트리에서 조명이 음악에 맞춰 빛을 낸다. 그 와중에 아이는 쉴 새 없이 재잘재잘 얘기를 한다. 아이의 말을 흘려들으며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이 풍경, 이 광경을 눈에 담았다.
사람의 뇌는 저장공간이 한정되어 있어 매일을 담아둘 수 없기에 동일한 일상의 반복은 기억에서 지워진다고 한다. 특별한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억공간에 저장을 더 많이 할 수 있고, 치매예방에도 좋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의미를 두지 않더라도 난 여행을 좋아하니 지금 이 일을 하지 않았으면 아마 관광가이드를 하고 있지 않았을까도 잠시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