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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에서 병원 가봤니?

병원빨이 최고의 약

by 인생여행

싱가포르 도착한 지 세 번째 날은 유니버셜을, 넷째 날은 사이언스센터에서 오후를 보내고 저녁에는 유람선을 타고 머라이언과 마리나 베아 샌즈를 다시 구경했다.

다섯째 날은 동남아시아에 왔는데 물놀이 못 시켜준 게 맘에 걸렸던 차라 워터파크를 가기로 했다. 싱가포르는 환경친화적인 나라라 그랩비와 버스비의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우리나라 택시비도 요즘 많이 올라서 10분만 가도 만원이 족히 넘어가는데 싱가포르는 체감정도가 우리나라의 2배 정도는 되는 듯하다. 그래서 가능하면 버스를 이용했는데, 센토사섬에 있는 워터파크에서 영업종료 될 때까지 신나게 놀고 모노레일을 타고 나와 숙소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가는 길이었다. 비보시티 앞을 지나 버스정류장으로 가는데 바닥분수에서 노는 아이들을 보더니 자기도 놀고 싶어 사슴 눈을 한다.'이미 물놀이를 했는데...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날이니 좀만 더 놀아라' 바닥분수가 깨끗할 것 같지 않아 그다지 내키지는 않지만 아이가 그리 놀고 싶어 하는데 매정한 엄마는 되고 싶지 않았다. 30분을 놀고 이제 가자 하며 젖은 옷을 갈아입혔다. 그런데 옷을 갈아입자마자 또 장난을 치며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갈아입힐 옷도 없는데 말이다. 점점 짜증이 몰려왔다. 이제 가자를 수십 번 외치고서야 아이는 분수에서 나왔다. 이미 몸은 홀딱 젖은 상태였고, 에어컨으로 인해 시원하다 못해 서늘한 버스를 타야 했다.

아까 더 이상 들어가지 말라고 말리지 못한 나 자신을 후회하며 대충 물기를 닦아주고 버스를 탔다. 추울 듯하여 젖은 수건이라도 감싸고 한 팔로 꼭 안고 탔다. 오늘만 잘 지나가기를 바라며 숙소로 들어갔다. 7시도 안 된 시간인데 아이가 피곤하다며 잠이 들었다. 아플 때 외에는 초저녁 잠을 자는 아이가 아니었기에 느낌이 싸했다. 내일 말레이시아로 대여섯 시간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데.. 이 근처에 병원이 어디 있었더라... 아이 저녁은 어떻게 하지... 순간 수만 가지 걱정이 몰려들었다. 제발 물놀이에 피곤해서 잠깐 잠이 든 것이길 간절히 빌며 아이의 상태를 지켜보았다.

바닥분수에서 생쥐꼴이 된 아이

9시쯤 되어 일어난 아이의 상태가 좋아 보이질 않는다.

"엄마 나 배가 아파. 너무 아파."

배를 부여잡고 소리를 지른다.

"많이 아파? 약 먹고 좀 있어볼래? 아님 병원 가야 할 것 같아?"

"너무 아파. 병원 가야 할 것 같아."

"그럼 빨리 가자"

"내복 차림으로 어떻게 가. 옷 갈아입어야 해."

그렇게 아픈 와중에도 내복 차림은 부끄러워하는 걸 보니 아직은 괜찮나 싶기도 하면서 어이가 없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좀만 안 좋다 싶으면 병원을 가는 편이기도 하고 내일 오전에 버스를 타야 했기에 9시가 넘었지만 일단은 진료를 봐야겠다 생각이 들어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히고, 한국에서 가져온 상비약도 먹였다.

아이를 부축이며 호텔 카운터로 갔는데 아이는 배가 많이 아프다며 카운터 바닥에 주저앉았고 호텔리어는 지금 진료 보고 있는 병원을 알려주며 택시를 불러주었다. 감사하게도 아이 옆에서 같이 부축해 주고 토할 것 같다고 하자 맥도널드에 가서 비닐봉지도 구해줬다. 감사함을 표하며 택시를 타고 근처 병원으로 갔다.

아이의 배를 가리키며 "He is sick"이라고 응급 상황을 알렸다. 배 아프다가 영어로 뭘까? 영어를 중학교 때부터 배웠으니 그래도 30년인데 히 이즈 식으로밖에 표현을 못하다니 정말 많이 쪽팔린다. 특히나 다급할 때는 아주 원초적인 단어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이는 그사이에도 배를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았고, 바로 베드를 안내해 주어 아이를 눕힌 뒤 의사 선생님을 기다렸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금세라도 큰일이 날 것 같았던 아이는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이거 혹시 병원빨이니...'

한참을 기다리다가 오신 의사 선생님께 파파고로 아이의 상태를 알려주자 배를 눌러보시더니 일단 주사를 맞고 상태를 보자고 하신다. 선생님이 나가시고 주사를 바로 들고 와주시겠지 기다렸는데 계속 오시질 않는다. 우리나라의 빨리빨리가 그립다. 언제 놔주나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이가 이제 배가 괜찮단다. 어?? 그냥 집에 가야 하나.. 그... 그래..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사는 맞자. 한 시간쯤 후에 오신 의사 선생님은 아이 허벅지에 주사를 놔주었고 주사 맞고 난 후 상태를 봐야 한다며 기다리라셨다.

난 그렇게 세 시간을 넘게 보조의자도 없는 병원의 어느 방 침대 옆에 서 있었다. 다행히도 아이가 중간에 호전되어 기다림이 지루하다는 푸념도 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우리 아들은 아플 때 호텔 직원이 자기를 도와준 것이 너무 고맙다며 자기는 이 숙소가 너무 좋고 다음에도 또 오고 싶다고 했다. 나 또한 도움을 받으니 호텔에 대한 사랑이 샘솟았다. 내 마음속 저장.




여행을 할 때 리뷰를 많이 찾아보는 편이다. 짧은 여행 중에 그나마 맛있고, 가성비 좋고, 기억에 남는 곳을 가고 싶으며, 모험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제한된 시간에 적당한 금액으로 한정된 곳을 가볼 수밖에 없기에 내가 간 곳이 그중 최고는 아니더라도 나에게 좋았으면 그것이 최고의 여행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싱가포르 여행도 나에게는 베스트였다. 물론 유명한 사파리나 국립 박물관 등 유명한 곳을 가보지 못한 것이 아쉽고, 슬링 칵테일도 너무 마셔보고 싶었다. 아쉬움이 있어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싱가포르에 대한 느낌은 쾌적했고, 친절했으며, 즐거웠다.

떠나기 전 마지막 남은 돈을 털어 아이와 내가 제일 사랑했던 I JOOZ 오렌지자판기에서 주스를 빼먹었다. 아이는 무조건 1일 1 자판기 혹은 2 자판기 했는데 뭘 그리 아낀다고 애 하나만 뽑아주고 아이가 남기면 먹겠다며 안 뽑아 먹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 궁상맞다. 애가 한 번도 남겨준 적이 없건마는.. 다시 갈 기회가 된다면 그땐 보일 때마다 반드시 사 먹을 거다.


아해야, 우리가 같은 것을 보았지만 기억하는 건 다를 거야.

그래도 그 자리에 너와 내가 함께 했음은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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