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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규원 Mar 10. 2023

산다는 것은 아름답다

우리의 생명은 늘 요동치고 거품을 일으킨다. 이제는 가고 없는 옛날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이미 산 시간을

차곡차곡 쌓으면서, 살지 않은 시간이 썩어가도록 내버려 두는 이유는 뭘까?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의 고통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는 아름다운 기억과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

<토지>에서 작가는 “산다는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애잔하다.”라고 서희의 입을 통해 말한다. 주변 사람들

뿐만 아니라 크든 작든 살아있는 모든 것은 아름다움과 애잔함을 지니고 있다. 나라는 개인적인 생명도

그 아름다움을 붙잡고, 팽개치고, 열렬히 바라고, 불안해하는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새 낡아지고

사라져 가는 사물들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돌아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상실감, 슬픔, 고독까지 견딜 수밖에 도리가 없으니 애매한 긴장감을 가지고 저항해도 소용없다. 그 모든 것이 사랑 때문인데 사랑을 미워할 수는 없다.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해야지!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살기를 원한다면 자신의 두려움과 정신적인 불안을 마주해야 한다. 나 자신에게

아르는 길로 다가서려면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된다. 자신의 내면세계를 만나기 위해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면을 좋아해 준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쪽을 택하는 것은 일종의 도피

행위가 될 수 있다.


"자신과 가까움에게로 돌아가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타자에게 다가갈 것인가?"


정신 분석학자요 철학자, 문화비평가인 뤼스 아리가라이가 <사랑의 길>에서 말했다.

그녀는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적인 서구 철학의 분류에서 항상 하위 개념인 몸이나 촉각이 여성적인

것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인식했다. 동일성에 기반한 서구 문화에서 남성적 편향성을 가진 언어에

압도된 여성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수립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환자들을 통해 탐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주체는 언제나 남성적인 형식을 빌려서 쓰이고 여상은 남성적 시선의 대상쯤으로 격하된다는

문제의식을 <성적인 차이의 윤리학>, <근원적 열정>, <하나이지 않은 성>, <사랑의 길>, <나, 너, 우리>

<서양과 동양의 차이>등  수많은 저서를 통해 주장하고 있다.


"그것이 보편적이고 중립적이라고 주장될 때마저 주체는 언제나 남성적인 형식을 빌려서 쓰인다"


그렇다면 자신의 고유한 특질을 가진 여성이란 어떤 존재인가? 여성은 역사 속에서 억압받은 피해자일까? 여성과 아이들을 위해 남성들은 숱한 전쟁을 겪으면서 목숨을 걸고 보호해 왔다. 오늘날 자본주의를 통한 물질적 풍요와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여성은 선택의 자유와 경제적 독립을 누리게 되었다. 여성의 공감능력과 주관적 경험이

이성적(합리적)인 정신의 능력보다 우월하다는 식의 젠더 연구와 성정채성 규정은 한계가 있다. 성적인 차이를

사회적 구성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책임 있는 선택을 통해 스스로 자신을  창조하고

자신의 존엄성을 지켜나가야 한다.

여성은 정신뿐만 아니라 자연에 가까운 몸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생명을 잉태하고 돌보는 특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여성은 공감을 잘하고 감정이 풍부하며 꿈과 상상력을 지닌 존재로 삶을 살뜰히 보살피는 일을

해나가는 사람이 아닐까?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이해하고 동반자로서 산다는 것도 아름답다.

젠더 문제로 증오나 분노를 부추기는 문화는 폐기되어야 한다. 살지 않은 시간이 無의 바다에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이 되지 않도록 여성은 공동의 가치와 생명을 지키고

오늘도 다시 시작할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은 고통과 슬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충실하게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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