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日法門>上 성철 스님 범어 집
완벽하지 않아도 완전한 삶이 어떻게 가능할까? 제아무리 훌륭한 삶이라도 잘못된 판단을 저지르고 부끄러운
부분이 없을 수 없다. 세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공부의 수준도 미흡하니 전체를 알지 못한다.
<평범하여 찬란한 삶을 향한 찬사>에서 서양 철학자들의 '중용'에 대해 의미를 두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중용과
불교의 '중도'는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불교의 최고 원리를 알기 위해 성철 스님의 글을 읽게 되었다. 인도의 원시불교에서 시작하여
중관· 유식 등의 사상, 중국의 선종 및 우리나라의 선종 사상까지 다 알 수 없지만 성철 스님이 강조한
중도(中道)를 알고 싶었다.
현실 세계는 상대 모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과 불, 선과 악, 옳음과 그름, 있음과 없음, 괴로움과 즐거움
너와 나 등이다. 이들은 서로 상극(相剋)이며 생과 멸, 유와 무의 모순과 대립은 투쟁의 세계다. 그렇지만
인간은 누구나 투쟁 보다 평화의 세계를 목표로 살아간다. 참다운 평화의 세계를 이루고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양변을 버려야 한다.
상극적인 두세 개가 서로 비추고 통하여 선과 악이 둘이 아니고, 옳음과 그릇됨, 괴로움과 즐거움이 둘이 아니다.
이러한 불이 법문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수학적으로 증명 한 민코프스키의 다음과 같은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앞으로 시간과 공간은 그림자 속에 숨어 버리고 시간과 공간이 융합하는 세계가 온다.”
3차원이란 공간이고 시간은 1차원인데 사 차원의 세계가 되면 서로 대립되어 통화하지 않던 시간과 공간이
융합한다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에서 시간과 공간의 양 변이 융합하는 사 차원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유와 공도 버리고 양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불법이 아닌 것이다.
성철 스님의 중도 사상은 대승경전의 입장에서 선과 교를 통하여 일관된 최고 원리라는 데 있다.
“양극단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그 가운데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런데 중도가 분명하게 한가운데라는 것이 아니다.
중용이란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지은 책인데 희로애락이 나지 않는 것을 중이라 하고 희로애락이 나서
적당하게 사용되는 것을 ‘화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희로애락이 나지 않는 것이 중이라 한다면 이것이
중도가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중도란 양변을 여의는 동시에 양변이 완전히 융합하는 것이므로
중용과 다르다.
그러므로 양 변을 떠나 가운데도 머물지 아니하는 중도 사상만이 참다운 극락세계를 이 현실에 실현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릇된 분별이나 집착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항상 깨어서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또한 현상에 메몰 되지 않도록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에도 거리를 두는 자세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