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uthering Heights>, 에밀리 브론테
바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더구나 여름 더위에는 산이나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바로 산 밑에 살고 있고 그동안 살았던 집이
거의 언덕 위의 집이어서 올라가기 힘들지만 바람이 잘 불고 잘 통했다.
한때 일본에 체류하게 된 큰딸이 오사카 요도가와 강 옆 숙소(10층 원룸)를 '폭풍의 언덕 2호'
라고 해서 같이 웃었던 적이 있다.
우리가 세차게 부는 바람을 특히 좋아하게 된 계기는 소설 <Wuthering Heights> 때문이다.
활달하고 명랑한 말괄량이 캐서린이 자연 속에서 히스꽃이 피는 절벽으로 야생마처럼 뛰어다니며
히스클리프와 키운 순수하고 친밀한 사랑이 좋았다. 어머니도 영화에서 본 그 장면을 지금까지도
좋아한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다. 그래서 폭풍의 언덕 삼대(어머니와 나, 큰딸)가 되었다.
사랑과 배신, 미움, 복수로 이어지는 원초적인 인간의 김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과 극적인
상황의 전개, 거친 자연의 묘사가 절묘하게 결합되어 강렬한 인상을 준 작품이다. 무엇보다 죽는
순간까지 진실한 사랑을 간직한 캐서린의 이야기에 끌렸다.
불행한 과거는 이미 완결된 것이다. 더 나아질 가능성이 전혀 없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이해한다면(불가피한 상황이었다는) 가까운 사람에 대한 원망이나 원한에 따르는 죄의식에서
벗어나 전진할 수 있다. 그러나 히스클리프는 상처받은 기억과 마음의 응어리(격정적인 감정)로
인해 복수의 길에 들어선다. 부랑아인 자신을 데려다 키워준 언쇼 씨의 사랑을 독차지해 놓고도
힌들리로부터 받은 심한 학대만 기억한다.
"모욕에 대한 기억은 우리가 모욕을 받을 때보다 훨씬 더 우리를 분노케 한다."라고
윌리엄 제임스가 말했듯이.
그러나 인간은 기억만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감정과 의지, 감수성을 갖고 있는
윤리적 존재이다. 상황을 판단하고 결과를 예측할 수 있기에 행동을 망설이고 거듭 생각하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을 괴롭힌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쉽지 않다. 증오하는 마음을 지속시키면 기억과 의식,
무의식에 파괴적인 힘이 담겨있게 된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용서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다.
그런데 히스클리프에게 미움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은 미움밖엔 없었다.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기 자신보다 소중히 여겼던 캐서린과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좌절하게
되었더라도 그녀의 선택과 행복을 존중해 줄 수 없었을까? 그는 세상의 전부였던 캐서린마저
린턴과 결혼하자 오직 복수심에 불탄다. 돌이킬 수 없는 현실 앞에 오히려 광적으로 그녀에 대한
사랑에 집착하게 된다. 결국 그는 두 집안에 철저한 복수를 하면서 냉혹한 인간으로 변하고,
캐서린과 주위 사람들은 물론 자신마저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고 간다.
고통스럽기만 하고 해석의 여지가 없는 기억은 병적인 것이다. 자신의 감정이나 입장에서 한 발짝
나아가 상대방과 소통하지 않으면 기억은 왜곡되고 고착되어 버린다. 그래서 생긴 '미움'이란
강력하고 매몰차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적대감이 된다. 히스클리프는 원한에 쌓인 인간의 야만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래서 자신의 병약한 아들도 공포와 모멸감을 견디지 못해 정신적으로 뒤틀리게
만들고 만다.
그러나 이야기의 전반적인 암울한 분위기에도 한줄기 빛은 있다.
혼자 남겨진 캐서린의 딸 캐시는 불행 가운데서도 이해와 용서의 길을 선택한다.
"저는 아저씨처럼 되진 않을 거예요."
모든 인간은 사랑하기 이전에 사랑을 받고 존재한다. 사랑과 돌봄이 없었다면 인간은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자신에 대한 사랑과 타자의 사랑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바라기만 한다.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사랑이 커지면 사랑을 요구하지 않아.
사랑이 커지면 더 사랑하고 싶을 뿐이니까."
-니체,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히스클리프는 자신에 대해 불만스럽고, 화가 나 있어서 스스로를 환멸 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절대적 기준'을 강요하는 사람이 된 것이 문제일지 모른다. 반면 캐서린은 이렇게 자신의 사랑을
말한다. "나는 히스클리프야!"
이보다 더 진한 사랑이 있을까? "내 안에 너 있어!"라는 드라마의 대사와 비교가 안 된다.
캐서린은 서로를 위해, 서로에 의해 자기 자신이 되는 인간관계를 알았다.
다행히 그녀는 사랑하는 히스클리프의 감추어진 치부와 흉측함을 다 보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히스클리프는 연민을 넘어선 캐서린의 진정한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에 빠져
살았다. 나르시시즘을 극복하지 못한 인간의 전형이라고 하겠다. 그는 자신 속으로 구부러진 인간,
병적인 자아도취 자였던 것이다. 상처받은 자신을 더, 더 사랑해 주기만 바라고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던 어리석음과 악의에 차서 살았다.
그 결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향해서 움직이는 데 더 높은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사랑하는 이로서, 그리고 용서하는 이로서 우리 앞에 주어진 선험성에 접촉하는 데 실패했다.
그의 복수는 단층적이고, 앙상하며, 움직임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목표점에 도달해 버린 상태다.
그 안에는 다층적인 내면의 공간, 인간이 자기 자신의 집인 동시에 자기 자신의 비밀이 되는 그런
장소가 결여되어 있었다."
-막스 피카르트, <인간과 말>
그렇다! 사람이란 자기 자신의 내면(핵심)과 연결될 때 비로소 다른 사람과의 연결이 가능하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스스로에 대해서도 새로운 의미와 깊이를 발견할 수 있다. 히스클리프는
사랑할 줄 몰랐기에 마음의 샘이 고갈된 인간이었다. 인간이 자신만을 위한 존재로 전락할 때
고립과 소외, 자기 상실은 피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의 삶마저 파괴한다.
신의 선물로 모든 것이 미리 주어져 있는 세상에서 그 연속성과 신뢰, 사랑의 기초를 알지 못하면
존재의 의미마저 흔들리게 된다. 그러면 앙상하고 메마른, 일그러진 얼굴만 남게 된다.
작가 에밀리 브론테는 젊은 나이에 어떻게 이처럼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해석을 할 수 있었을까!
병약했고 짧은 생애 동안 남긴 한 편의 소설은 언니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와 달리 20세기에 들어서야
조명되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과 버금가는 명작으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영화로 10여 편
이상 제작된 것은 폭풍 같은 감정의 부딪힘과 서로 대조적인(자연과 문명, 거침과 세련됨, 사랑과 증오 등) 면이 뒤엉켜서 강렬한 느낌을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눈보라 치는 황량한 언덕 위의 집에서 울부짖듯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이 자신을
애절하게 부르는 소리를 듣고 오열한다.
히스클리프는 결국 두 저택을 소유하게 되었지만, 자기 자신의 집이 없었다. 자신을 돌보고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다층적인 내면의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몰랐고 사랑을 다시 찾을 기회를 놓친 미성숙한 인간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