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윌리엄 제임스
삶의 고단함을 느끼게 되는 나이가 되거나 나이를 불문하고, 삶의 목적이나 의미를 찾지 못하는 때가 있다.
<남아있는 나날>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다가 밴 부인(켄턴 양)처럼 "남은 내 인생이 텅 빈 허공처럼 펼쳐집니다."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저지른 실수,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과 '더 나은' 삶을 생각하게 될 때 그랬다. 그러나 인생이 바라던 대로 되지 않았더라도 과거의 가능성에 매달리거나
자책하며 살 수는 없다. 그녀도 충직한 집사 스티븐스도 사랑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기 어렵지만 성숙해질 나이가 되었다. 현재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를 느끼며, 계속 앞을 보고 전진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고통과 슬픔, 절망 같은 비참한 순간도 결국 지나간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가끔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공허'라는 허무의 느낌이 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아무리 성공적인 삶으로
여겨지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내적 공허성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의미의 부재를 의식할지라도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진·선·미·힘·정의 같은 본질적인 것이 인간의 삶과 모든 사물들 속에 스며있음을 어느 순간 다시 발견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관념들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치와 가능성의 근원을 형성하는 것들로 우리를 지탱시켜 준다.
지금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알기 어렵고 상대적인 행복과 불행을 비교하기는 더 어렵다. 이런 우리의
개념들은 항상 감각 내용을 요구한다. 그러나 '신', '영혼', '영원한 삶'과 같은 말은 특정한 감각 내용을
전혀 다루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들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다. 神을 알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경험과 신앙이 있어야 한다. 윌리엄 제임스는 신적 실재가 존재하고, 그 실재와 우리 사이에 주고받는 관계들이 실질적으로 존재한다고 본다. 믿음의 대상에 대한 실재적인 감정이 존재하듯이 모든 종류의 고차원적인 추상적 개념들도 감지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그의 생각은 수긍할만하다.
"우리의 마음을 추상적 개념들을 통해서 절대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기질에서 중요한 사실들
가운데 하나이다." -제3장-
저자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미국 실용주의철학과 심리학 등에서 중요한 사상가 가운데 한 명이다.
그의 동생이 소설가로 잘 알려진 헨리 제임스라는 사실도 대부분 모른다. 100년 전 출판된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은 종교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인간의 삶의 다양한 현상은 삶과 유리된 관념이나 논리로서 파악될 수 없다는
입장에서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요소인 종교적 현상을 이해한 것이다.
윌리암 제임스는 종교에 관한 지성적이고 객관적인 표현들이 존재하게끔 해준 내적인 경험들, 이를테면 양심의
갈등, 죄의식, 구원받았다는 확신, 소망, 기쁨, 감사, 겸손, 자유, 공허감 등등에 주목했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성스러운 것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경험을 우위에 두고 그 밖의 다른 요소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종교 전통의 객관적(외면적) 요소들은 시대나 종파에 따라 뚜렷한 차이가 있지만, 내면적으로 인간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종교적 경험의 표현이 공통적으로 깔려있음을 밝혔다.
물론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행동하느냐 일 것이다. 종교의 핵심은 깊은 수준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기중심적인 삶의 방식을 바꾸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정직하게 살아가며 거짓과 위선을 용납하지 않는다. 윤리적인 책임감을 느끼고 자비심을 갖는 태도로 타인을 대하는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인간 본성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서 의학, 심리학, 종교학, 철학을 공부하였다. 인간을
동물적 부분과 이성적 부분으로 뚜렷이 나눌 수 없다고 보았다.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주관과
객관의 구분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인간이 내적 공허 성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생물학적
으로 만이 아니라 반드시 정신적 또는 영적으로 두 번 태어나야 함을 강조했다. 그는 75년 생애를 통틀어
진정으로 행복한 단 4주간도 가져보지 못했다고 한다. (시시포스처럼) 다시 들어 올려야만 하는 바윗돌을
영원히 굴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고백한다.
누구에게도 삶은 쉽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는 삶의 고단함과 허망함을 견디는 것이 인생이라는 사실을
안정할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의 존재 조건이다. 그러므로 삶이 고통과 수고, 자기 존재라는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추구하는 것과 의미를 찾아야 이겨낼 수 있기도 하다.
낙관주의적 성품과 단순한 자연적 즐거움 속에 살아가더라도 인간의 삶과 그에 대한 부정은 풀 수 없을
정도로 뒤엉켜 있다. 사람들은 이것을 잘 알지 못한 채 쾌락을 좇고 기대와 실망 가운데서 살아간다.
그런데 삶에 전반적으로 미치는 힘에 있어서 종교적 경험은 다르다. 고뇌하는 영혼을 가진 사람들만
신앙을 찾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인간은 기질상 자연스럽게 신을 의식하고 살아가게
되어 있다.
실재적인 삶에서 어떤 사실에 대한 우울함이나 즐거움을 느끼게 되는 것은 미래의 계획이나 희망에 의존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들을 해결할 가능성이 있다면 지금 당장 힘든 것은
참을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의 거짓과 무분별한 욕망을 통해 표출된 악의 문제는 삶에 부담과 괴로움을
한없이 안겨 준다. 때로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분노하게 만든다.
‘나는 어디서 왔을까?’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저마다 다르긴 해도 행복을 위해 더 큰 목표를 세우거나 환희에 도전하는 노력이 최선은 아니다. 뭔가 그럴듯한 외양과 화려한 것을 쫒다 보면 자신을 알아갈 기회를 잃고 제대로 된 인생을 누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적 공허성을 넘어서기 위해 삶의 목적과 의미를 다시금 이해할 필요가 있다. 기본적인 삶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자기를 변화시키려는 노력과 함께 인생이 가고자 하는 방향(길)을 찾아야 한다.
모든 가치와 가능성의 근원을 형성하는 궁극적 가치가 우리 삶과 사물들에 스며들어 있다면, 올바른 방향으로 보이지 않는 질서를 세워 나가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칸트의 말대로 행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진실을 찾고 가난과 불편함,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