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행복의 가능성, 파스칼 <팡세>
인생무상과 세속적 욕망의 허망함을 정물로 표현한 '바니타스' 회화에는 해골, 시든 꽃, 모래시계, 엎어진 유리잔 등이 있다. 지상의 모든 것이 덧없고 헛되다는 경고를 담은 그림이다. 보이는 것에만 너무 집착하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에 좀 더 충실해서 살라는 의미를 담았다. '책'은 배움과 지식의 한계, '악기'는 세상 즐거움이 지닌 무상함, '불 꺼진 램프'와 '시계'는 생명의 유한함을 상징한 것이다.
'바로크'는 '르네상스'의 이성적이고 조화와 정제 미를 지닌 것과 반대 개념이었다.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을 지닌 바로크는 무분별, 무절제와 같은 부정적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확고한 교리를 전달하고 신앙심을 고양시키기 위해 감성적이고 강렬한 묘사와 표현을 시각화 한 미술에 대한 좋지 않은 후대의 평가(르네상스를 미의 기준으로 삼은)가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
17세기 전반부는 과학의 혁명과 합리주의의 진전이 있었지만 신구교 간의 종교적 갈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바로크 시대에 인간의 타락과 구원의 문제를 깊이 생각한 사람이 파스칼이다. 파스칼은 수학사와 물리학사에 한 획을 그은 놀라운 업적을 남겼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라는 말로 더 유명하다. '갈대'라는 말 앞에는 "자연 속에서도 가장 연약한"이 있다. 인간을 짓눌러 없애기 위해 수증기나 물 한 방울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자신이 죽는다는 것, 우주가 자신보다 유리한 입장이라는 것을 알기에 인간이 더 고매하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존엄성은 전적으로 사고(思考)"에 달려 있으나, 이 사고의 존엄성은 갈대와도 같은 존재의 '나약함'과 맞물려 있다. 바로 '죽음의 불가피성'에 대한 사유, 자신의 '갈대성'에 대한 사유가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의 사후에 초고 뭉치가 발견되었는데 종이쪽지에 쓰인 명상들이 <팡세>라는 이름의 책으로 나왔다.'생각들', '생각해본 것들'이란 의미의 'pensées'는 막연한 이런저런 생각들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철학자들의 신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들이 만난 하느님 앞에 무릎 꿇은 자신의 기쁨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 속에 써 내려간 好敎書(호교서)였다.
파스칼이 바라보는 인간과 세계의 구도는 지극히 바로크적이다. 절대자 하느님과 중재자 예수 안에서의 '환희', 정반대 편에는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타락한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불행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이 중심이 되어 누리는 예술, 사교, 교양, 야심, 권력, 사랑, 신화 등 르네상스가 추구하고 찬미한 '인간의 자족성'과 '존엄성'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표명했다.
파스칼이 바라본 인간은 우주 속에서 하나의 "점", 그것도 "매우 연약한 점"에 불과하다. 인간은 자신의 발원지인 無와 자기를 삼켜버리는 無限性 둘 다 보지 못한다. 인간의 감각이란 것도 별로 대단할 것이 없으며 이해 능력은 이도 저도 아닌 상태, "확실한 지식과 절대적 무지 사이"에 걸려 있을 따름이다. 인간들끼리 우열 성을 다툴지라도 광활한 우주에서 내려다본다면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극도의 무한성에서 볼 때 모든 유한성은
동등하다."
극과 극의 대조를 자연에서 발견한 파스칼은
인간을 믿는 '르네상스'적 논자들을 향해 조롱조로 반문한다.
"인간이란 참으로 하나의 키메라 아닌가! 참으로 신기한 존재! 괴물 같은 혼란의 극치, 모순덩어리면서도 기적 같은 존재! 모든 사물을 다 판단하면서 땅에 기어 다니는 아둔한 벌레, 진실의 보고이자 불확실함과 오류의 시궁창, 우주의 자랑이자 쓰레기가 아니던가."
이렇듯 처참한 인간 조건을 직시하지 않고 멋지고 화려한 삶에만 전념하는 현실에 대해 파스칼은 바로크의 심연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고뇌와 사색으로 일관하고 있다. "하느님의 은총이 없는 인간"은 "오류투성이 주체"일뿐이다. 이성과 감각은 서로를 호도한다. "감각은 그릇된 외관으로 이성을 속이고" 다시 그렇게 속인 이성에게 역으로 속는다. 인간은 "자가 자신에게 있어서, 또한 남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위장과 거짓말, 위선일 뿐"이다.
"남들이 자기에게 진실을 말해주기를 원하지 않고 남들에게도 진실을 말해주기를 회피하니, 이런 온갖 기질 때문에 義와 理性에서 그토록 멀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불행"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욕망이 우리가 처한 상황에다 우리가 처하지 않은 상황의 쾌락을 연관시키므로 행복한 상황을 우리 앞에 그려주지만, 우리가 바라던 쾌락의 경지에 도달하고 나면 우리는 더 이상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 새로운 상황이 야기한 또 다른 욕구들을 품게 될 것이니."
"'나'는 자신만을 사랑하고 오로지 자신만을 배려하는 속성을 갖는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자신이 사랑하는 그 대상이 흠과 불행투성이가 되지 않도록 할 도리가 없으니. '나'는 위대하고 싶으나 막상 보면 왜소하고, 행복하고 싶으나 막상 보면 불행하며, 완전하고 싶으나 막상 보면 불완전함으로 꽉 차 있다. ·····"
과거나 지금이나 인간이 끝없는 '욕망'과 '결핍'의 상관관계에서 벗어날 길이 있을까?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인 '나르시시즘'과 '쾌락 원칙'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들은 구원의 문제를 경시하고 두려움이나 뉘우침 없는 태도를 고집한다. 나르시시즘은 인간 사회에 죄악을 가져올 뿐이다. 타인에 대해 공감하고 사랑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되풀이해서 발견하게 되는 약점과 거짓에 대해 그 진실을 제거해버리기를 바라고 타인과 자신으로부터 위장하려 든다.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인 양 착각하고 이미지 속에서 감성적인 것, 즉자적인 것들이 보다 완전한 눈앞의 존재인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자기 중심성과 나르시시즘은 극복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민주적이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만일 자기애의 뒤틀린 '방어기제'가 인간 사회의 근본 원리라면 나의 삶은 위장과 자기기만 속에 있다. 바로 '진실'을 '억압'하는 고단한 과정으로 삶을 살게 된다. 따라서 '오락' 내지 '기분전환'을 미봉책으로 탐구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조건의 원초적 불행을 느끼기에 "그 어떤 것도 위로가 되지 못하"지만, 신경을 분산시킬 오락과 놀이를 추구한다.
"자신의 지속적인 불행에 대한 불만스러운 느낌"을 잠재우고, "자신에 대한 생각을 다른 데로 돌려놓는"우회로들에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이 빠져서 산다.
"모든 인간의 불행은 오직 한 가지 사실, 방 안에서 평안히 쉴 줄
모른다는 데서 연유한다."
우리에게 빛을 던져주는 말이다. 이 팬데믹 시기에 자발적 자기 격리인 '고독'의 가치를 발견하게 해 준다. 그는 "행복은 소란이 아닌 안식에서 오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때로 인간은 절실한 필요를 느껴서 분주하고 소란한 일상을 떠나 안식을 찾느라 분투하기도 한다. 몇 가지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자기 자신과 마주할 시간을 갖는다. 그러자 고독과 비참함에 대한 생각이 엄습하려 들고, 권태가 고유한 권위를 주장하며 나가려 하지 않는다. 안식의 시간을 맛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다시 '오락'과 권태, 본질을 망각케 하는 '딴짓'과 휴식, '번잡함'과 '고요함'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맞물려 접히고 뒤집힌다.
인간은 진정한 행복과 참된 평안을 찾지 못하고 자신에 대한 생각을 다른 데로 돌려놓는 우회로에 몰입한다. "오락이 없다면 우리는 권태에 빠지고, 권태는 거기서 벗어날 더욱더 강렬한 방법을 찾도록 부추긴다. 하지만 오락은 흥미를 돋우며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죽음에 당도하게 만든다." 마치 우리 시대를 내다본 듯한 경고다. 그의 바로크적 인간 이해는 300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이란 삶의 갈등과 죽음의 미지 속에서 불안에 떨며 지내는 근본적으로 불행한 존재이다. 파스칼이 보기에 인간의 딜레마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삶의 순간성'과 '죽음의 영속성'이라는 두 축에 있다. 그러므로 삶의 궁극적 종착점을 생각하지 않고 반성이나 걱정도 없이 기질과 쾌락에 이끌리는 자들에 대해 충고한다.
"자신의 지속적인 불행에 대한 불만스러운 느낌"을 마주하고 마음속 깊이 느껴지는 불안과 비참함, 즉 죽을 운명에 대한 자각을 가져야 한다. 오늘날 건강과 생명 연장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더라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안식을 추구하느라 부산을 떨고 소란을 피울 일도 아니다. 안식을 얻는 비밀은 '영혼 깊숙이' 숨겨져 있으니까.
생각하는 갈대로서 인간이란 이성의 궁극적 단계 즉, 자신이 알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한 사유를 해야 한다.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로 착각하고 자기를 기만해서는 안 된다. 신의 존재 여부를 이성이 결정할 수 없다. 인간은 유한함의 존재와 속성을 인식할 수 있지만, 하느님은 무한성도 넘어서는 절대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존재나 속성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연장체도 아니고 한계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그의 존재를 알고, 그의 영광을 보며, 그의 속성을
안다." 파스칼은 믿음과 계시 가운데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에서 영원한 행복을 맛본 사람이다.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고 하느님 앞에 낮아짐과 복종, 무릎 꿇은 간구 속에 진정한 행복을 발견했다.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삶의 목표는 기쁨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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