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하고 순결한 영혼

<굶주림> 크누트 함순

by 명규원

이제는 춥고 배고픈 인생, 몸을 누이고 글을 쓸 책상 하나도 허락되지 않은 채 내몰리는 삶이 잘 와닿지

않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도 살얼음판을 걷듯이 불안하고 대책이 없는 상황 속에 살아가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복지 사회가 되면서 가난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만으로 돌리지 않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현재 노르웨이는 상당한 부자 나라다. 어쩌면 지구 상에서 가장 부유할지 모른다. 1969년 북해에서 어마

어마한 양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걸 발견했으니까. 그것을 까맣게 몰랐던 크누트 함순(1859-1956)이 살았던 시대는 어업에만 의존했으니 너무나 큰 차이가 난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을 쓴 마이클 부스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사는 사람들을 가까이 지켜보았다. 노르웨이 사회의 여러 가지 특징과 문화가 있지만 살기 위해서 우선 받아들여야 할 것은 ‘추위와 어둠’이라고 했다. 지금처럼 과학문명이 발달한 시대에도 어느 노르웨이인이 말한 대로라면, 작가가 살았던 시절에는 오죽했을까?

“내가 크리스티아니(오슬로)에서 굶주림에 배를 움켜쥔 채 방황하던 시절이었다.”로 시작하는 소설은

고단한 삶의 경험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먹을 것이 없어 열에 들뜨기도 하고 겨우 먹게 되었는데 다

토해버리는 안타까운 상황이 반복된다. 매일매일 생계에 대한 걱정과 백일몽 사이의 긴장 속에서 그의

내면은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고투한다. 마치 도스토옙스키의 또 다른 주인공처럼 화자는 인간성에 경멸을

던지고 자학한다.

글을 써서 먹고 살려는 젊은 작가의 자전적 초상이 별 줄거리 없이 그려진다. 신문 편집장에게 보여줄

글도 전당포에 맡길 물건도 바닥이 났다. '나'는 굶주림으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친구에게 빌린 담요를 전당포에 맡기려다가 거절당하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천박한 짓거리를 자책한다. 그리고 우발적이라기보다 최후의 선택으로 염두에 두었던 화물선에 올라타고 그 도시를 떠난다. 배고픈 고통도 참기

어려웠지만 그의 지독한 자의식이 그를 더 괴롭혔던 것이리라.

이런 개인의 자의식은 개인의 가치에 대한 지나친 관념일까? 절박한 현실 앞에서도 자신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용기와 인간으로서 위엄을 지키려는 노력이 참으로 가상하다. 심한 굶주림과 존재의 위기 앞에서도 지극히 선량하고 비정상적이라 할 만큼 양심적인 주인공을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그의 처절한

내적 투쟁은 단순한 도덕의식이 아니다. 그의 정직하고 순결한 영혼은 신을 의식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신 앞에선 인간은 부끄러운 자신을 숨길 곳이 전혀 없기 때문에 주인공처럼 자신과의 싸움을 멈출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삶의 기반인 신을 의식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가난 그 자체인 생활 일지라도 균형을 잡고 나아갈 수 있었다. 이처럼 주인공이 지닌 원초적 순수성은 모든 것을 극복하고 일어설 수 있는 정신력과 같다. 비록 당장 기회가 주어지지 않더라도 견디어 내다보면 반드시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게 될 것이다.


지금의 노르웨이가 안정적이고 부요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은 크누트 함순이 보여 준 정신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을 사랑하고 무미건조해 보일 정도일지라도 삶에 종교적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 천연자원의 물질적 축복을 허비하지 않고 후손들과 미래를 위해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해 나가리라는 믿음이 든다. 이 책에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풋풋한 연애의 감정을 그린 대목이다. 근근이 살아가던 화자가 주머니 사정이 괜찮았을 때 우연히 술을 미시고 떠들다가 스친 여인과의 재회다. 서로에 대한 호감과 대화가 발전해서 그녀의 적극적이라 할 수 있는 구애까지 갔는데, 오해와 암울한 결말이 되고 말았다. 귀하게 얻은 기회이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에 자신을 맡길 수 없는 딱한 처지가 정말 안타까웠다.


이렇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여행을 떠날 수 있어서 좋다. 그냥 책을 집어 들고 펼쳐서 읽으면 된다. 책 속의 주인공의 삶에 공감하면 친구가 생겨서 여행을 위한 준비를 따로 할 필요가 없다. 곧바로 전혀 다른

환경과 사람들을 만나서 생각을 듣고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니까. 에너지와 시간도 아낄 수 있다. 내가 공공도서관 가까이 집을 얻어 사는데 만족하는 제일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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