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랄드그린

<안목의 성장> 이내옥, 민음사

by 명규원

결혼 예물을 하러 종로 2가에 있는 금은방에 갔다. 반지에 넣을 보석을 물어보자 나는 대뜸 ‘에메랄드’

라고 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보석에 대한 관심도 없었지만 단지 녹색이라는 이유였다. 내가 좋아하는 녹색은 크레파스의 다양하고 고운 색깔도, 새마을 운동 깃발의 촌스러운 시각 공해도 견뎌내고 살아

남았으니 참 신통하다. 맑고 깊은 녹색을 기대했는데 광채도 없었다. 나중에 빛나는 에매랄드를 보고 반지의 보석은 가짜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신혼도 잠시 입덧이 시작되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속이 메슥거리고 어지러워서 외출도

어려웠다. 시간이 가기만 바라는 처지가 되어서 창밖으로 나뭇잎과 넝쿨을 자주 쳐다보았다.

그 무엇으로도 위안을 찾을 수 없던 내게 녹색은 그나마 유일한 안정제였다. 그러나 가을이 되어 변색

하고 떨어지기 시작하자 <마지막 잎새>의 존시처럼 견딜 자신이 없어졌다.


그녀는 가난한 동네에 친구와 작업실을 얻은 무명 화가였다. 결핵이 유행하던 시기라서 갑자기 건강을 잃고 약해진 몸과 마음이 담쟁이 잎에 흔들리게 되었다. 다행히 화가들이 모여 살아서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아래층 베어 먼 노인이 비바람에도 불구하고 담쟁이 잎을 벽돌에 그렸다. 덕분에 존시는 삶의 의지를 되찾을 수 있었지만 걸작을 그리고 싶어 하던 노화가는 안타깝게 결핵에 걸려 죽는다. 시각적으로 예민한 화가였기에 있을법한 이야기다.

둘째를 가졌을 때는 반대였다. 산뜻하던 녹색이 정말 싫어서 눈을 가리고 다녔다. 잘 먹지 못하고 토하는 것뿐 아니라 보이는 색채까지 나를 괴롭혔다. 모든 감각이 예민해진 데다 비슷한 시기에 다시 임신했으니

똑같이 반복되는 시간을 견디기 힘들었다. 어서 가을이 와서 노랗고 붉게 자연을 물들이기만 바랬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자연 친화적이고 평범하게 느끼는 녹색이 오히려 인간 정신에 반작용을 유발할 수도 있다. 지나치게 평온한 장소에서 두려움을 느끼거나 지나친 친절함을 의심하게 되고 예쁜 여자나 잘 생긴 남자를 경계하는 것과 비슷하다.

영화나 만화에서 에일리언이나 그의 피, 슈렉과 헐크, ‘마스크’, 아기공룡 둘리까지 녹색이다. 시각적으로 친숙한 색채를 기괴한 창조물로 만들어 충격과 함께 오히려 낯설게 만드는 것이다. 올 추석 연휴에 넷플릭스를 통해 세계적으로 관심을 끈 <오징어 게임>에 청록색 트레이닝복이 나온 것도 다 그런 이유로 보인다.


“당신 에메랄드그린 알아?”

어느 날 남편이 오랫동안 국립박물관에서 근무했던 이내옥 선생의 책을 읽으면서 한 말이다. 미술을 전공하고 그림을 그리지만 색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편이 아니라 그랬을 것이다. 동양화를 전공했기 때문에 우리의 옥색이나 비취색을 떠올릴 수 있었지만 그 차이를 이미 알고 있던 터라 몇 마디 해 주었다.

본래 에메랄드그린은 홍해 근처의 바다색이었다. 에메랄드처럼 맑고 아름다운 녹색으로 1572년 색명으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산업계의 색채 표준에 따라 Emerald 17-5641로 본래의 자연스러운 빛깔 대신 채도와 명도가 낮은 색으로 통용되고 있다.

언뜻 세련되어 보이지만 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색의 본래 이름과 영 달라져 버린 색이 되었으니까.

남편이 고른 책인데 나도 예술작품이나 문화재를 보는 감식안에 대해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저자에게 학창 시절의 가장 강력한 이미지로 남겨진 것은 사립고등학교에 다녔을 때 입었던 여름 교복 상의 색깔이라니! 우리 세대와 약간 차이가 있으나 당시의 획일적인 문화가 어땠는지 짐작이 간다.

보통 교복의 색으로 사용하지 않는 애매하고 이상한 느낌(미묘한)으로 ‘에메랄드그린’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미묘한 색에 대한 기억이 저자의 미의식을 일깨워 주었을지도 모른다.

저자는 익히 들어온 대로,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안목은 많이 보는 대서 생긴다"라고 한다. 주변에 그런 눈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자주 접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최고(최상)의 작품’을 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평생 그 길을 걸은 사람의 탁월한 견해가 아닐 수 없다.


서양화가 중에 ‘에드워드 호퍼’를 언급한 부분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호퍼는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그리면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곳에서 대도시의 고독을 보았다.”라고 했다. 누구나 호퍼의 그림에서 공통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은 작가의 그런 감정이다. 저자는 그가 그린 인물들뿐 아니라 “심지어 풍경과 집도 고독하고 그곳을 비추는 빛까지 투명한 고독으로 표백되어 있다”라고 하면서 그것을 시대정신으로 해석한다.

또한 저자가 서양 회화사의 하이라이트로 꼽는 <최후의 만찬>을 보기 위해 이탈리아 밀라노를 찾아간

이야기가 흥미 있었다. 인간으로서 가장 감내하기 어렵다는 ‘배신의 문제’를 주제로 삼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최후의 만찬 장면이 가장 자세하게 묘사된 성서의 요한복음에 주목하고 기독교의 핵심 가르침이

모두 담겨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영화 ‘바베트의 만찬’을 나도 인상 깊게 보았는데 책을 통해 다시금 되새겨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노르웨이의 궁벽한 마을에 프랑스인 바베트가 가정부로 몸을 의탁하게 된 두 자매는 목사의 딸이다. 바베트는 복권에 당첨된 돈을 몽땅 최고의 만찬을 준비하는데 쓴다. 청교도 신앙에 따른 금욕적 생활과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이 만찬에 초대되었다. 훌륭하고 풍성한 음식과 포도주는 자기 이익을 도모하며 서로 반목하고 갈등해 왔던 마을 사람들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주었던 것뿐이다”라는 죽은 목사의 말을 함께 나누며 회개한다. 천국의 잔치와 같은

만찬의 자리에서 신의 은총을 다시금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경직된 신앙의 자세에서 벗어나 무한한 신의 은총을 믿고 기다리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가 있는 영화다.


저자가 보여준 안목에서 예술의 본질적 세계는 신앙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불교나

도가에 대해서도 수용적인 입장은 공감이 간다. 쉽게 써 내려간 글이 아니라 일생을 통해 경험한 것 중에

여러 번 깊이 생각하고 다듬은 글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자란 안목에 비해 정치나 사회의식은 통념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나와 같은 동향이라 반가웠는데, 사회를 보는 눈 역시

올바른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는 자신의 선입견과 경험에 매몰된 선 긋기 같은 것을 하면서 산다. 버리고 넘어서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옳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 진실을 찾으려는 자세를 지닌다면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안목(眼目)은 한발 더 나아가 현상 너머까지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데 중요성이 있다. 그래야 진정으로 아름다움을 함께 느끼며 사회를 상향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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