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해도

오로지 예술

by 명규원


인지과학에 대한 이야기가 들리면서 지능에 대한 정의도 달라졌다. 인간의 두뇌는 환경에 대처하기 위해

지각, 학습, 기억, 추론, 문제 해결 등의 여러 인지 과정에서 효과적인 적응을 하면서 발전했다. 환경을

변화시키거나 새로운 환경을 찾는 적응의 과정들을 선택적으로 조합하는 것이 정신 과정이라면 지능은 하나의 능력이 아니라 많은 능력을 효과적으로 하나로 모은 것이다. 과거 IQ 검사로 지능과 사고력을 판단하는

시대는 사라지고 있다. 이제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비범한 천재성이나 고도의 전문성이 아닌 협업할 수 있는 소통능력을 필요로 하는 세상이 되었다. 창의성도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는 실천력과 열정을

지니지 못하면 꽃 피우지 못한다는 사실도 보편화되었다.


인지과학은 여러 학문 분야에서 이루어진 학문적 성과와 생각이 수렴되면서 오랜 시간을 거쳐 형성되었다.

언어학 수업에서 처음으로 ‘인지과학’을 접했을 때 디지털이 뭔지 잘 몰랐다. 벽시계와 전자시계를 예로

들면서 모든 정보를 점으로(0과 1로) 치환해서 처리하는 방식이 이라고 하니까 쉽게 그 차이가 와닿았다. 실생활에 기술을 이용하고 있으면서도 개념을 알고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그림을 그리는

작업도 그렇고 난 아직도 아날로그 방식이 좋다. 시장에 가서 제철 채소를 만나고 라디오로 듣는 클래식 음악이 익숙하고

편안하다. 나이를 먹어가는 탓도 있지만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에너지를 쓰고 싶어 하지 않는 경향을

부정할 수 없다. 명화를 학습시켜서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고 작곡도 한다지만 예술은 과거의 아날로그를 간직할 수밖에 없다. 기억을 포함해서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과 생각은 과거나 요즘이나 미래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해도 예술작품이 주는 감동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달리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예술작품에는 인간과 사물을 바라보고 주의 깊게 만드는 정신과 마음을 담고 있다. 작가의 개성이 살아있는 표현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움과 빛을 던져준다. 진실을 담고 있어서 고단한 삶과 상처를 위로하기도 한다.

세상은 갈수록 인간에게 많은 것이 주어지고 모든 것이 허용된 것처럼 보이지만, 밑바닥이 없는 확실성일

수도 있다. 스스로 느끼고 찾는 것만이 자기 것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살면서 깨닫게 되니까. 아무런 계기도 없이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발상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는다. 뭔가 표현해내거나 해결하고 싶은 절실한 주제를 찾을 때 직접 부딪혀 만들어 보면서 생각에 변화가 일어난다. 니체는 “예술, 오로지 예술만을, 우리는 진리를 조금도 죽일 수 없는 예술만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한다. 나 역시 이 땅 위에서 살 가치가 있게 하는 어떤 것을 꼽으라면 사랑, 자유, 진리, 진정한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보이는 것 이면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낸다는 점에서 신앙과 같이 예술도 상징과 기억의 영역이다.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세상에 대하여 인간답게 적응하고 자신을 발견하도록 해준다.


미술을 전공했지만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 작업실이 있느냐, 혹은 아직도 그림을 그리느냐고 신기해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그림을 좋아하긴 했으나 정말로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은 지는 십여 년 밖에 안 되었다.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매일 살다시피 했던 파리 여행을 통해서 느낀 행복감으로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삶에서 아름다움과 예술을 추구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전시회를 하면 아름다움을 느끼는 소박하고 진실한 마음이 서로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들에게 그림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는 세계가 있기에 위로와 용기를

주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 비록 삶이 힘들고 외롭게 견뎌내야 하더라도 주위를 둘러싼 자연과 사물을 섬세하게 살필 수 있는 눈, 그리고 감동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있다면, 또 자신의 방식으로 그것을 표현해 낼 수

있다면 우리는 어느 순간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된다. 예술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을 실현하는 활동이며, 인간성의 위대한 부분을 깨닫게 해 준다. 편리하고 정형화된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순수한 감정을 만나게 된다. 늘 진지한 자세로 살지 않더라도 그런 순간을 느끼기 위해 예술이 필요하다.


#브런치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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