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反復> 키르케고르
<반복>의 첫 부분에서 키르케고르의 말이 와닿았다.
반복이란 것이 가능한 것인가 아닌가?
반복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진정한 반복은 앞을 향하여 반복된다."
그러므로 만일 반복이 가능한 경우라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반복의 사랑은 행복하다. 순간의 축복된 확실성이 있기 때문이다.
<반복>을 읽다 보면 장황한 연예 실패담이 나와서 좀 헷갈린다. 그런데 어떤 지식의 차원이 아닌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랑에 의한, 마음에 관한 진리를 탐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사랑의 약속은
의무감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이다. 산다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고 변화하는 타인을 만나는
것이며, 변화하는 세상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꾸준히 자기 변화를 해 나가면서 사랑과 열정을 유지하는 일상이 되도록 하는 일이다.
흐르는 시간을 영원불변처럼 생각하겠다는 마음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열린 마음, 즉 '겸손한 용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성취하기란 매우 어렵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앞에 선’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게 키르케고르의 생각이다.
내가 그림을 그릴 때 피하고 싶은 것이 반복적으로 그리는 것인데...!
반복을 통해 배우고 익혀서 습관처럼 되풀이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긴 하다.
그런데 반복은 학창 시절부터 익숙하면서도 늘 거부감을 동반한 채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숙달된 기술이 기법으로 연결되는 동양화를 전공할 때도 제일 딜레마를 겪는 것이 '반복'이었다.
국화와 대나무는 그런대로 친숙하지만 매화를 제대로 본 적도 없고 난초는 관공서와 연결된 분위기라서
좋아하지 않았다. 적어도 사군자가 뭔지 알아야겠다고 신청한 수업에서 역시나 반복적인 선 긋기에
좌절감을 느꼈다. 선에 담기는 정신성은 나중이고 난초의 미덕을 알고 향기라도 좋아해야 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물방울 화가'인 김창열처럼 세상에 잘 알려진 화가들 중에도 어떤 모티프를 반복적으로
그림으로써 각인 효과를 거둔 경우가 있다. 6.25를 겪은 전쟁의 충격과 홀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평생 따라다녔던 화가는 우연히 '물방울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프랑스에서 마구간 일을 하며 그림을
그릴 때 캔버스를 재활용하려고 뒷면에 물을 뿌려 물감이 떨어지기 쉽도록 했는데 아침 햇살에 영롱한
빛을 띠는 물방울을 만난 것이 계기였다.
일본의 여성화가 쿠사마 야요이도 물방울무늬와 그물형태 문양, '호박'과 같은 동일한 모티브를 반복적으로 작품화한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가 정신병과 자살 충동을 일으켰지만 창작 욕구가 더 커서
화가가 되었고 자산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 여전히 강박관념과 편집증, 환각증세가 있어서 정신병원에서
초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작업을 하고 있다. 그녀의 호박그림은 조형물로도 유명한데 어려서 힘들 때 늘 옆에서
마음을 기댈 수 있었던 존재다. 감싸주는 자연의 품처럼 넉넉함과 순수함을 간직한 상징이다.
두 작가 모두 반복을 통해 의미를 찾고 생생하게 간직했다. 생명의 근원과 순수한 이미지, 그리고 무엇보다
평온함을 추구했다고 생각한다.
스타일화된 인체와 풍경을 통해 독자적인 세계를 그린 루카스 크라나흐도 있다. 그는 어두운 풍경화를
배경으로 비너스와 큐피드, 아담과 이브가 포즈를 바꿔가며 등장하는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그의 누드화는 르네상스 시대에 채택했던 고전주의의 이상적인 비율을 배척하고 그 어느 화가들보다 독특하고 매력적인
표정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날씬하고 뼈가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유려한 곡선에 창백한 피부, 갈고 곱실거리는 머리카락이다.
그런데 팜므파탈의 전형처럼 보이는 비너스와 이브를 바라보는 남성들에게 아름답고 교활한 여성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의미도 담겨 있는 듯하다. 의도적으로 에로틱하게 표현한 그림은 크기가 작은 것으로 보아 공공장소나 큰 방에 걸어두기보다 작품의 소장자가 사적으로 감상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작품의 포맷이 인기가 많았든지 여러 점의 카피와 약간 변형시킨 작품들이 있다. 그림의 주제와 구도를
반복적으로 사용한 이유는 뭘까? 그는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의 친구였고 독일 비텐배르크에 인기 있는
공방을 운영하며 사교계의 귀중한 일원이었다. 학자, 미술가, 정치가로서 존경받았던 그의 공방에서 배출된 그림이 천 여점 이상 남아 있는데, 실제 작품 수는 몇 배가 되었을 것이다.
비슷한 그림을 자주 그린 것은 사람들이 좋아했고 소장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려한 장식의
커다란 모자를 쓴 비너스는 大루카스 크라나흐(아들도 화가)의 작품임을 알 수 있게 하는 특징이 되었다.
세잔도 그랬듯이 화가는 똑같은 풍경, 정물, 사람을 반복해서 그리고 자기 존재의 마르지 않는 힘을 끝없이
재차 경험하는데서 만족감을 느낀다. 화가가 보는 것은 지식의 형태로 압축한다고 해서 향상되는 것이
아니다.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인 인간이다 보니 근본적인 의미들을 예술의 형식으로 공들여
반복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권태가 통찰이듯이 반복은 열정의 반대가 아니란 말인가? 이제 나도 반복해서 표현하고 싶은 주제와 모티브에 초점을 두고 더 깊이 고민해 봐야겠다.
"반복을 선택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삶을 산다고 하겠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나비를 쫓아다니지 않고
세상의 경이를 흘끗 보기 위해 까치발을 하고 서지도 않는다. 그는 이미 그것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반복해서 만족한 가운데 자신의 삶을 조용히 살아간다."
반복의 본성과 가치에 대한 숙고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영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눈으로 볼 때'
영웅이 되도록 행동하는 사람을 칭송하게 한다. 사람들에게 자랑할 만한 것은 없지만 자신의 인격 안에서
살아가면서 신 앞에 스스로 증인이 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