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망과 사랑
파리 여행을 갔을 때 문인들의 단골집으로 유명한 '레 되 마고'나 '카페 드 플로르(Flore)'에
가 보고 싶었다. 소르본에서 가깝기도 한 생제르맹 거리를 찾아가서 생 쉴피스 성당의 그림을
보았다. <천사와 싸우는 야곱>이라는 들라크루아의 프레스코화였다. 수도원에서는 마침 내가
좋아하는 프라 안젤리코의 성화가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단순한 표현으로 그림에서 '성스러움'을
느끼게 하는데 탁월해서 참 부러운 화가다.
20세기 초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단골이었던 그 카페에서 젊은 시절 헤밍웨이도 하루 대부분을 보냈다.
좁은 집을 나와서 한 잔의 커피로 몇 시간이고 앉아 있을 수 있는 공간이었으니까. 가끔 술 한 모금씩
마시며 글을 쓰기도 했다. 제임스 조이스와는 서점 '셰익스피어 & 컴퍼니'에서 가끔씩 만났던 모양이다.
나와 큰딸은 헤밍웨이가 부담 없이 책을 빌려보았던 그 헌책방에 머물면서 작은 공간들을 천천히
둘러보았고 동화책을 샀다. <파리에서 보낸 7년>은 1920년대를 추억하면서 썼다. 온수도 책상도 없는
방에 아내와 살았으나 젊었고 가난함을 개의치 않았다. 그는 파리 시절을 축제처럼 인생에서 가장 행복하게 보낸 것으로 기억한다.
중학교 때 <적과 흑>은 최초로 내가 매혹당한 소설이다. 책을 통해 마음속으로 누구나 한 번씩 꿈꾸어 보는 자신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재능과 준수한 용모를 지닌 쥘리앵 소렐은 거짓의 계단을 밟고서라도 성공을 움켜쥐려 하다가 파멸하고 만다. 지금도 스탕달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출세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학벌을 중시하는 사회니까 부모들은 어려서부터 영어유치원에다 학원 과외, 특목고
플랜을 세우고 아이들을 몰아간다. 법조인, 언론인, 교육인, 예술인, 사회운동가 구분 없이 성공의 최종
목적지는 정치권력이다.
"국회의원이 되려는 야심가들은 자유니 국민에 대한 사랑이니 운운하겠지만
국가라는 배 위에 올라 조종하고 싶은 거지. 돈벌이가 되니까."
작품을 쓰던 스탕달 시대의 현실과 프랑스 정치인에게만 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톨리 남작과 지지자들은
선거조작을 서슴지 않는다. 정치 세계의 추악한 단면이 소설 속에 폭로되기도 한다. 선거는 민주공화국의 근간인데 결과가 조작될 위험은 항상 존재한다. 사람들은 더 공정하고 안전한 나라를 만들어주길 바라고
풍요로운 미래를 기대하며 투표한다. 그 기대가 어느 정도 충족될 때 정부를 믿고 안심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정치는 우리의 일상과 밀접하다.
그 시절 쥘리엥에게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면서 첫사랑의 감미로움을 느꼈다.
'세상에 태어났으면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죽어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그의 생각에 깊이 공감했다.
남자만 세상을 향해 성공하려는 야심을 갖는 것이 아니다. 고향을 벗어나서 좀 더 큰 세상을 만나고 싶다는 내 안의 야망을 발견하며 동일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쥘리엥이 상류층의 어리석음과 허세를 증오하고 경멸하면서도
동등한 입장이 되고 싶어 몸부림치는 탐욕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자신을 대단한 존재인 양 착각하고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게 나가는 이기적인 모습은 마음에 들지 않기도 했다. 아직 어리고 사랑이 뭔지 몰라서인지 레날 부인의 한결같은 진실한 사랑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었다. 주인공처럼 나도 미숙했기에 그녀의 헌신적인 사랑조차 의심하고 냉소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다.
쥘리앵은 여성의 사랑과 호감을 이용해서 출세하려는 비열한 존재일까?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은 오직 사회적 성공이나 귀족 신분으로 상승하는 데 있었을까? 그가 성공하려는 야심이 엄청난데 비해 거기에 필요한 위선, 교활함, 아첨을 익히지 못했다. 다시 신학교에 돌아왔을 때 무능력하고 타락한 이들이 생래적으로 터득한 요건이 부족해서 따돌림과 미움을 받았다.
"천주님만 의지해라. 천주께서 네가 미움을 받도록 하신 것은 네 교만함을 벌하시기 위해서 그것이 필요
했기 때문이다. 순결하게 행동해라. 그것이 네게 주어진 단 하나의 길이다."
쥘리앵에게 특별한 총애를 보인 파라르 사제의 말이다.
그는 자신도 잘 모르면서 휩쓸려 들긴 했지만 위계화된 사회의 모순과 부당성을 온몸으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부딪친 현실을 낱낱이 폭로하면서 좀 더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질서에 대한 염원을 주위에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나중에 보니 그런 정의감을 나도 지니고 있었다. 쥘리엥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 버렸지만 그의 야망과 사랑 이야기는 인간의 본질적인 행복에 관한 개념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제
그런 사랑, 말 하나 몸짓 하나가 환희와 비애를 만들고 가슴 전체로 받아들이던 첫사랑은 벌써 지나간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내 안에 남겨진 마음이 있다.
헤밍웨이도 야망을 지녔을 것이다. 그는 마음속의 두려움과 맞서고자 전쟁에 참여하고 낚시와 투우, 사냥을 즐겼던 것 같다. 파리에서 “몹시 가난했고 행복했던 시절은”은 지니가 버렸다. 그 시절을 추억하는 글을 작가로 성공하고 나서 삼십 년쯤 후에 쓴 것을 보면 공허감이 더 커져갔기 때문일까?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과 보낸 시간과 소박한 삶이 행복이었다고...!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언뜻 생각나도 사무치지 않는 그리움으로 남겨진 마음이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소설 속에서 야망을 이루지 못한 사람도 야망을 이룬 작가도 허망하게 갔다. 그렇다면 인생에서 야망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레날 부인이 간직한 사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