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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nie et Travis Oct 27. 2024

경인아라뱃길

3

  북로의 점점 번화해지는 신호는 저 원대한 다리의 발톱. 번화한 북로의 신호는 이 작은 두 쌍의 다리를 절며 중단을 부르짖는 밤. 알다시피 치킨버거는 절름발이를 조금 회복시켜서 집으로 돌려보내는 최상의 규칙. 그러나 아라뱃길의 북측 총체는 우리의 일정이 화려하게 끝나든 말든 당연히 끝나지 않았다. 점점 멀리, 계속 앞으로, 아니 너무 늦어버린 인천 밤바다를 제안받기 전에 나아가는 거야. 첫 번째에, 한창 발 닿는 대로 소멸해 나가는 북로에는 한낮의 빛이 가득했기에 꺼냈던 말이었다. 사실 고백하자면, 그때 아웃렛에서 나온 시간이 벌써 늦었더랬다. 

  당초 계획이 뭐였든지 간에 무슨 제안이 적절했겠는가? 두 번째와 그 이상까지 증식시키거나, 밤바다를 보거나, 바다가 있을 거라 암시를 걸거나. 

  당시 제안이 뭐였든지 간에 인천 바다는 아직도 잠들어 있다. 그것이 월미도의 그 바다란 말인가? 차이나 타운의 홍등이 월병의 달콤함과 함께 야릇하게 깨어났던 그 바다란 말인가? 밴댕이 회무침이 기승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의 그 바다란 말인가? 건조하고 비릿한 바람이 석양에 불을 붙이는 허름한 엔진이 바로 거기 있단 말인가? 마이카도 숙박계도 없이 모험하는 젊은 방문자들에게 제안된 그 무시무시한 서쪽 끝이란 말인가? 세상 끝의 감각을 입으려고 결심한 김에 유유히 걸어간다고 가능할 리가 없잖은가? 세상 끝으로 자극적인 충동을 실어 나르고자 세상 가운데 쌈박한 교통수단이 있어왔고, 우리 또한 쌈박하게 이용해 오지 않았는가? 그런데 가능하다, 걸어서 그곳까지. 이론적인 긍정, 실재적인 긍정, 그러나 동시에 겪지 않은 긍정, 어색한 긍정, 몽롱한 긍정은 노을이 지글대는 부둣가의 환영에 시달렸다. 이 두 쌍의 눈에 직접 박기 전까지는 가망 없는 긍정에 불과하리라 체념하면서.

  그리고 뭐든 지도상에서는 간명하니. 우리는 이렇게 확인할 것이며, 야생화 공원은 서쪽을 향하는 북로의 오른쪽으로 빌붙어 별 거 없군! 공원을 한 바퀴 둘러본 후 나오면 우리는 자연히 바다로 더 나아가 있겠지! 우리는 팔자가 늘어지거나 입만 살아있는 놈들은 아니며, 그리하여 너무나도 즉시 전망하는 것이다. 그럼 될 것 같아 그래 오 좋아. 전망은 외쳐진다. 북로가 내포한 모든 가망을 말로 시험할 필요가 있다는 듯. 무지는 아직 행동으로 행해지지 않았으니, 무지에 대해 앞서 어떤 표현을 진열하든 말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면 그 말들은 전망의 확실성을 드러내고 있기는 해도, 그 확실성의 무위를 역설한 듯, 전혀 다른 어떤 것을 말한 것이었다.

  두 번째의 북로는 첫 번째의 북로에 이어서 풍경의 변화가 많지 않다. 바랜 초록빛 산책로와 빨간 이차선 자전거로로 구성되거나, 몸의 이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사이에 발들은 돌블록이 깔린 오솔길에 의해 물길 쪽으로 기울고는 한다. 마법에 걸린 사람들처럼 가느다란 나무들이 진지하고 말없이 뒷걸음질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사실 나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뒤로 물이 뱃길 가득 채워져 있는 적연부동함을 바라보는 것이다. 멈추길 싫어하는 우리는 정지된 풍경을 깨뜨리며 미래에 들어서지만, 꼼짝 도 않는 무언가가 더 많다. 만약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한 사람이 있다면, 중앙을 향해 걸어도 걸어도 자기를 기준으로 원근이 재정렬되지 않는 기묘함을 그는 겪게 될 것이다. 공간 자체는 존재하는데 사잇공간은 존재하지 않는, 활동 가능한 정지와 같은 기묘함을. 

  그러고 보니 바람이 불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우리로서는, 아라뱃길은 해양 기후의 영향권이라 늘 바람이 많은 것이라 생각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첫 번째의 가장 무거운 사건, '모자의 상실'은 일반적인 어리석음에서 더 지독한 확률 쪽으로 회향할 테니까. 그러나 어리석음은 물론이요, 불운조차 사랑하고 우리 답을 바쳐버리자. 아니 그렇다기보다 어리석음이 곧 확률처럼 보이는 무엇이다. 아라뱃길은 난폭할 수도, 담담할 수도, 모자를 뺏어갈 수도, 모자를 경도할 수도 있다. 그로 인해 얼마나 또 어리석어질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또 어떤 확률에 휩쓸릴지 모르겠지만, 발레리의 뜻과 같이, 어리석음은 삶의 온갖 사건과 조합에서 긍정적이고 확실한 요인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회고에서 그 대단한 어리석음에 대해 자세히 묘사될 기회는 아직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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