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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뱃길이란 누구인가? 기껏해야 서부 하이킹 코스라고 불릴 수 없다면, 노출에 따른 목격자의 전율로 보답되듯, 보인 이상 보통내기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잠시 황금빛으로 노래하고 춤추는 가수와 비슷하게, 이 길은 우리를 위한 야망을 품고 있다.
우회전의 미로는 정류장을 숨겼고, 우리의 기대는 담담한 흥미에 기대어 조소를 담았고, 한순간 나타난 정류장은 금방 버스에 우리를 태웠고, 버스의 한 칸짜리 좌석에 앞뒤로 앉아 앞사람은 뒤쪽으로 몸을 틀었고, 그가 뒷사람의 모자 끝을 바라보면 초점을 잃은 연두 빛의 원경이 어떤 말을 감쌌고 — 너의 말이었나, 나의 말이었나? — , 음량을 곤충 소리만큼 낮춘 듯 그 말이 무엇인지 잘 모른 채 몸은 흔들렸고, 햇빛은 버스 안으로 침략을 시도하고, 이미 빛에 약탈당한 연두 빛은 창 밖에서 횡으로 빠르게 흐르고, 얼마 후에 마땅히 잠들 것처럼 나른하게 출발한 적이 있었다.
이로부터 7시간가량이나 지나 이 출발이 만들었던 무언가의 끝은 각자에게 한 개씩이나 배당되어 아주 호화로운 에그타르트였는데.
그리고 그 에그타르트로 다시 시작한 날이었다. 이번에는 반 개씩, 왜냐하면 딸기 밀크롤을 이미 먹어두었으니까. 나는 아라뱃길보다 더 뻔뻔한 야망을 품고 있었으니, 더 거창한 감각을 앞둔 까닭로 소강되고자 하는 종전의 야망에 관해서는 매우 관대하다. 막무가내로 배를 채우려고 혀가 어리석음에 응답한다. 나는 식이의 순종을 걷어차지만 이것이 신앙적으로 돌출된 경험인 것은 아니다. 나의 주인이여, 저는 지금 당신의 사자를 만나러 가고 있나이다. 다만 당신의 앞선 사자에게 탄수화물을 조절하라는 전언을 들었던 자들이 아라뱃길의 우리를 질투한답니다. 그렇다. 결국 영원회귀는 자신을 향한 질투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영원에 값하는 무수한 축들이 시공간 전후에 연쇄된 인과와 다툰다기보다는 신의 그림에서 각자 어떤 부위에 가까워졌는가를 다툰, 창조력에 대한 질투인 것이다. 아라뱃길을 구사한 사자가 우리에게 달콤함을 섭취시켰듯, 이 날 예비되었을 감각적 경험 또한 훗날의 영원 — 더 구체화된 창조력을, 말하자면 아라뱃길이 언어로 표현되는 순간을 질투할 것이며, 아마도 글을 쓰는 바로 지금 그때로부터 질투받고 있다.
에그타르트는 첫째 날 말미에 맛본 후 둘째 날 처음에 이르기까지 그 사잇기간을 형성시킨 약조에 조용히 반쯤 스며들어 있었다. 우리는 아라뱃길에 대해 반드시 추가적인 일정을 한두 번 정도 부여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실현이 집행되기 전까지 에그타르트는 머리부터 등을 따라 내려간 몸체의 꼬리 끝에 묶인 사슬이었다. 결박을 다시 풀어야 할 때는 꼬리에서 이번에는 배 쪽으로 머리까지 갈 이유밖에 남지 않는 것이다. 유일한 이유라는 것은 전혀 무관한 일상에서 사고가 다채롭게 흐르는 중에도 변함없이 공통된 것이었고, 뿌리에서 떨어져 나온 해초가 이따금씩 바다 표면에 떠올랐다가 해류의 산산이 부서지는 물결에 한껏 부풀려지고는 곧이어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라진 척하는 것처럼, 찰나를 통해서 단발적으로만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것은 마치 잊어도 되는 것과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의 중간 지대를 떠도는 어떤 매혹이자 먼지이며, 방관이자 요구와 같이 점멸했다.
에그타르트. 끝과 출발이 중첩된 데칼코마니의 가장 안쪽에서 피어난 이것에 관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확대하여 논쟁을 할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