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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에그타르트의 그전이자 다음의 끝과 출발, 검암역의 거대한 다리를 통해 다시 시작되었다고 하자.
입 안에 단내를 품은 우리들이 별 의식 없이 승강기에서 내린다. 5월 초를 기억한 살갗은, 눈이 전달하기를 비슷하게 눈부시다 하여, 얼마간은 막연하게 더위를 타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한 달 새 한껏 더워졌다. 5월 혹은 6월. 둘 중 뜨거운 쪽이 훨씬 우리 것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약속된 지금 위에 있었으니까.
첫 번째의 그때는 사실 상당히 추웠다. 과격한 바람과 표적과 타격과 체념과 묘한 쾌감이 정확하게 반복해서 원형으로 돌았고, 그 회전은 검암역에 다다라서야 잦아들었었다. 검암이라는 도시에 들어서자 우리는 풍편에서 기억으로, 풍차에서 회전목마로 갈아탔다. 고정된 현장의 껍데기를 벗은 사방이 흐트러져 회전하자 어리점증을 느낀 차, 이곳은 곧 우에노의 높은 역사와 철로처럼 보였다. 도쿄의 외각을 방문한, 허기졌던 자들은 평소 총애했던 닭고기 버거 프랜차이즈의 독보적인 지점을 금방 찾아냈다. 이것은 검암역 다리 다음 순번으로 등장하는 데칼코마니였으니, 때가 되어 전체의 머리 가까이에 다시 귀환하면 이 말들을 통해 다시 주의를 받아 반짝이게 되리라. 그러니 다시 도착의 검암역이 아닌 출발의 검암역으로 이동.
출발의 검암역은 두 번째 도착의 검암역으로 거듭날 것이다. 다리 위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는, 만약 다리 자체를 무시할 수 있다면, 오직 하늘뿐이다. 까마득한 푸르름의 근원과 호흡 사이의 공백은 머리 위로 심하게 쏘아 올려지지 않았다. 우주 아래의 층간이 퍽 낮아 보이는 것이다. 시선을 거기 이마 닿는 곳에 대고 있으면, 바다 거품처럼 마찰 없이 덩어리 진 하얀 털북숭이 집들이 시퍼런 구멍의 낭떠러지 사이사이에 들어선 기이한 마을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준다. 저기 불룩거리는 그림자 위로 도톰하게 엉겨 붙은 뽀얀 망울들은 파란 웅덩이가 더 새파래지는 깊이까지 들어간 끝에 구멍을 경계 짓되 그 속으로 빠져 버리지는 않았으므로, 가장 마음에 드는 구석 자리가 되어 놓여 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깊고 눈부시고 푹신한 저곳에서의 생활을 계획하는 일은, 자애로운 불가능이자 쾌적을 무료로 정당화할 수 있는 욕망, 부득이 (기꺼이) 초현실적인 욕망이다. 틀림없이 저 위로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으니, 시선을 점점 멀리 가져가서 오히려 이 확신을 파괴하는 걸로 족하다. 하늘의 끝은 희미해지는 거품들과 옅어지는 하늘색이 분리될 수 없는 곳, 도시의 가장 먼 원경이 격렬하게 탄생하는 곳이다. 눈을 한 번 지그시 감은 채로 눈알을 굴린다. 안구에 물기가 배이면 눈꺼풀을 연신 깜빡인다. 눈부시게 황홀했던 각막은 눈부시게 고단해진다. 오늘 치의 각막은 이제 막 고생길에 오른 참인데. 보려는 힘과 안 보려는 힘이 따로 놀다 맞닥뜨리는 지점에 익숙해질수록 이제 이맘때의 눈부심을 붙들지 않아도, 마치 아침이 오기 직전 잠에서 깜빡 깨어 보랏빛으로 물든 각막을 음미할 때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괜찮아졌다.
팽팽하게 당겨진 시력은 아라뱃길을 위한 것. 이제 새파란 투사를 움직여 위에서 아래로. 공중의 시퍼런 구멍을 더 짙게 흐르는 물줄기로 변모시키고, 공간이라기보다 면으로 펼쳐진 투시에 자잘한 결을 얹으면 입체감을 내뿜는다. 검암역이 내보낸 다리는 물길의 남로에서 북로 쪽으로 웅크린다. 말단을 오므려 놓아 봤자 뽑혀 나온 발톱은 인간을 위한 승강기일 뿐. 좌로 바다가, 우로 김포 아웃렛이 있을지니, 다리 한가운데서 서서 한없이 뻗은 물줄기를 번갈아 내려다 보라. 좌로 두 번째의 반환점이, 우로 첫 번째의 출발이자 세 번째의 도착이 여기에서 사라져 있다. 다만 공식적인 점 두 개로 대변되어. 점들이 위안을 준다면 그것을 그대로 받고, 첫 번째를 지나 두 번째를 시작한 우리로서, 이제는 피할 수 없이 아라뱃길에 열광하는 시대로 들어섰다는 것을 기억하며, 시선과 평행한 서의 소실점에서 바다를, 동의 소실점에서 김포아웃렛을 간과하지 마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