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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nie et Travis Oct 27. 2024

경인아라뱃길

5

  길은 오른쪽으로 휘며 아라서해갑문 인증센터를 지시한다. 그것은 남로에 있으니, 여기서 둥글게 선회하여 다리를 건넌 다음에 다시 서쪽으로 향하란 뜻이다. 물론 그때의 우리는 그 지시를 몰라봤다. 애당초 세상 끝에 다다르면 북로가 바닷속으로 소멸되어 어지간하면 바다가 다시 뱉어 놓은 남로의 시작을 밟을 수 있지 싶었다. 우리가 바라볼 방향은 오직 서쪽이니, 자전거의 향유만을 위한 것을 배신해 마땅하다. 모르지, 북로는 포구에 자전거들을 세워놓고 장렬히 사라질지도.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오 그럴 리 없다, 아시다시피 그때 우리는 그런 줄도 몰랐을 따름이다.

  상기의 지시대로라면, 북로는 스스로 서쪽으로 나아가기보다 결국 남로에게 기생하는 모습을 보일 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보행인들은 잔디 사이의 좁은 길로. 나아갈 수 있다면 발끝에서부터 바다다. 눈은 이입된 것에 대해 저기가 아직도 뱃길인가 이미 바다인가 헷갈리고 있다. 아무튼 아무도 막지 못하는 달콤함. 노곤함. 유망함. 저쪽으로, 발들은 저쪽으로. 이 수상한 길이 정녕 세상 끝을 우러러보는 마지막 과정인가? 이쯤에서 증언하건대, 여기까지 걸어서 찾는 사람은 우리 말고 아무도 없었다. 자전거들에게 헌신하는 길만이 유일한 정답일지도.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오 알 수 없다. 다만 고맙게도 잔디 위에 야자매트가 깔려 있을 따름이다. 

  한층 더 깊어진 것이 분명한 물을 반듯하게 막아놓은 철제 펜스. 그것이 막는 것이 그저 물뿐일까. 그것이 쏘는 간헐적인 은빛 섬광을 맞고, 맞선다. 거대한 파랑. 눈부심을 뚫고 시선을 멀리 둘수록 출발할 때의 어떤 기억이 데포르마시옹 기법으로 복원된다. 도시의 가장 먼 원경이 격렬하게 탄생하는 곳에 관한 기억. 희미해지는 물결과 옅어지는 하늘색이 분리될 수 없는 수평선이거늘, 저곳에는 청라국제도시풍의, 아니 차라리 함부르크 풍의 남로가 엎드려 있는 거다. 이 부드럽고 거대한 푸른 색상에서 자잘하고 신비롭고 아기자기하게 돌출된 저 남쪽 세계는 지금의 우리에게 있어서 어떤 유혹이라 말할 수 있을까.

  무릎가로부터 물기 범벅의 크림슨 레이크가 위로 흘러온다. 물과 잔디 사이의 장미들. 그들은 부드럽고 차갑게 흐트러졌으니, 열을 올려 초점이 끌려내려 갈수록, 척추가 엎어질수록, 많고도 많은 그늘진 꽃잎이 선명하게 진동할수록, 이놈이나 저놈이나 똑같이 머리가 시원해지는 공평함 속에서 오히려 하나하나가 완전무결하다. 그리고 허리가 다시 곧추서기 위해서라도 잠깐 앉으면 어떨까. 반환점의 때가 무르익었으니, 환영이 끝나버렸으니, 실체가 드러난 저 바다를 향해 앉았으면. 야쟈매트조차 끝나버린 잔디에, 끝의 메커니즘 속에서 가장 탁월한 무능을 느낄 자리에 흔들 벤치가 배치되어 있다. 두 개의 엉덩이여 붙어 쉬고, 눈을 감고, 모든 모호함을 두루 느끼고, 눈을 떠라. 젊은 남자 둘이 벤을 세워두고 낚시를 한다. 

그들이 세 개의 흔들 벤치 중 가장 개방된 것을 차지했으니, 우리는 중간 것을 건너뛰고 제일 구석진 것을 향한다. 

  서쪽 바다에 관한 대부분의 기억을 지나며, 우리는 아리송한 이미지에 정착해 있다. 이 바다는 지금껏 알고 있는 그 어느 바다와도 달랐고, 결정적으로는 엄밀히 서쪽 끝이 아니었다. 침울한 지적이라고 생각하는가? 무엇이 서쪽 끝을 가로막고 있었는지 지금은 기억도 불분명하다. 야자매트에 이어 잔디조차 끝내버린 무슨 화물창고였던가.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었다. 이 바다는 차라리 강물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 이것은 단지 고지식한 어떤 반응, 실망이자 기쁨, 이르거나 뒤늦은 앎, 온 세상 끝이 방대하게 지닌 진실의 작은 누설일 뿐이다. 끝에 도달하지 못한 우리가 잠시 휴식하는 이곳에서 우리의 타고난 무능이 작동한다. 가보기 전에는 결코 작동하지 않았을 소중한 그것이 뚝뚝 흘러내리는, 우리의 좀 이상하고 귀여운 서해 구석에서. 미리 알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그리고 새로이 알게 되기 전에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 또한 얼마나 달콤한 일인가. 모름과 앎은 물론 실체의 아주 다른 일부이지만, 서로를 끊임없이 갈망한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 두 조각으로 완전히 분열시켜 등지게 만들 힘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은 얼마나 자비로운 일인가. 불가해한 상상이 꽤 벅차다고 느끼며 상상해 왔던 바다와 달리 경험된 바다는 이성적이고 일상적이었다가, 한순간 이미지들이 섬광처럼 지나가는 몽환적인 양상을 띠었다. 오늘의 바다. 그것은 단 하나였다. 아니 여러 개였다. 모르겠다. 다른 새로움에 기억들을 보충해 가면서 앞으로 또 어떻게 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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