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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따라 길고 비스듬한 경사를 내려오면 물가와 상당히 멀어진 곳으로 나오게 된다. 이 길을 더 밟아서 남쪽으로는 머잖아 청라국제도시역이 나오리라 요약된다. 이 우연적이고 단순한 앎은 언제라도 갑자기 우리의 주의력을 날카롭게 만들어 금방이라도 여로를 틀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론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 가능성으로부터 몸을 피했고, 그림 같은 유턴으로 다시 물가가 나올 때까지 되돌아간다.
이제 남로를 붙좇아 그것이 피력하는 귀갓길에 호응하면 된다. 남로는 북로보다 더 정리된 인솔의 힘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물의 최측근에 데크길을 1미터가량 높게 설치해 놓아 이동 법칙의 어떤 이중적인 의미를 설명했다. 첫째는 물과 최대한 가까이 붙어가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아직 덜 완공된 길의 불편함을 감수하리만치 서정적인 낭만을 제시하는 것이고, 둘째는 오히려 데크로부터 약간 비낀 평지에서 일부러 누릴 수 있는 것 — 아래쪽으로는 물이 보이는 창을 내는 동시에 위쪽으로는 모노레일 같은 동경의 맛을 제시하는 것이다. 햇빛에 모자람 없이 담금질당한 우리는 약간 더 그늘진 평지를 선택했다.
그리고 갑자기 우리가 올해 들어 가장 먼 여정을 달성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궁금해졌다. 4월 21일, 29.9 킬로미터. 그리고 5월 12일, 28.8 킬로미터. 비약적이며 경이로운 결과가 지금까지 두 번 표명되었던 전후, 우리의 발들이 최대치로 흥분했던 광기가 두 번 도약했던 전후로 모든 나머지 걸음들이 존재했다고 삶으로부터 공증받을 수 있다. 오랫동안 걸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오래 걸어버린 것이다. 어떤 책을 먼저 읽어야 할지 협소한 지식의 즙을 짜내어 솎아내고 줄 세워 놓지 않아도 <글을 쓰면> 그 순간 가장 긴한 책이 채용될 거야. 코디네이션을 잔뜩 꾸려 두지 않아도 <외출을 하면> 이런저런 옷차림이 생겨날 거야. 무수한 걸음들이 소비한 시공간의 양상은 아직 제대로 관찰할 시간을 머금기도 전에 오직 필요한 결과로써 먼저 주어졌던 것이다.
데크길은 물러났다. 아까 북로에서 맞춰놓았던 알람이 울렸다. 돌블록이 깔린 산책로, 빨간 이차선 자전거로, 진지하고 말없는 나무들이 우리를 재차 물길 쪽으로 붙여 놓았다. 정오께, 반질반질했던 뱃길의 적연부동함은 단지 보드레하게 광택을 잃고 누런 해넘이를 짓는다. 우리는 여전히 멈추길 싫어하고, 풍경은 종착점을 향하여 은근하게 일그러지고, 그렇게 어떻게든 일정을 마치려는 시간의 속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꼼짝도 않는 무언가가 더 많다. 발레리는 말했다. 인간의 머리로는 생각조차 못 해봤을, 중요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결과에 대한 우리의 수직 체계를, 가능성 또는 유용성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뒤집어놓을 그런 예기치 않은 관계들 앞에서만 진짜 본질을 느낀다고. 그의 말대로 그랬던 것이다. 우리의 선택에 의해 정복되어 나갔으면서도, 매 순간 그 인과에서 대뜸 벗어날 것 같은 원형의 아라뱃길. 우리가 조금은 바랐던 첫 번째와 두 번째와 세 번째 아라뱃길의 관념은 그 무엇도 앞지르지 않았고 뒤돌지도 않았다. 관념이 환각임은 사실이나, 한편 관념을 통해서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야기는 지어져 있었으니, 지어진 이야기에 복속된 우리가 고스란히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일을 하게 되리라고 알았을 때 우리는 일시에 추방되었던 고릿적 기억이 있다. 그 사이 세월이 흘렀고 아라뱃길의 이야기는 벌써, 항상, 아직도 지어져 있었다. 아라뱃길은 스스로 알아서 미화는 헐고, 정당화는 태우고, 애호적인 해석조차 누그러뜨린다. 그런 후 어느 날 우리가 찾아오자 우리에게 맛 보인다. 심미적인 즐거움을, 구조화의 놀라움을, 대리자의 황홀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