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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nie et Travis Oct 27. 2024

경인아라뱃길

6

  이제 우리는 다시 걸어가고 있었다. 최대한 은빛 펜스에 바짝 붙어 가려고 한다.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해가 등 뒤에 있으니 더 당당해진 것이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갈 만한 폭의 길은 아니었다. 애당초 펜스를 지지해 주는 작은 공간은 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좌측 약간 사선으로 내가 뒤에 바짝 붙어서 형제의 뒤통수에 양산을 드리웠다. 야자매트를 버리면서 한 선택이란 혹독할 수밖에 없는 법인지, 길은 유백의 녹빛으로 길게 늘어진 수풀에 점점 잠식되어 갔다.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국부적으로 감춰진 행로의 농담 또는 침묵을 밟고 빠져나왔다. 작은 간이 건물 너머로 비밀스러운 칸막이에 무익한 품을 가져다 댄 곳이었다. 그곳은 우리가 아직 서쪽을 부지런히 향하던 당시에 눈길조차 주지 않아 공중화장실 뒤편에서 응당 사라져 있던 공간이었다. 

  밟고 헤쳐나가며, 네브래스카의 밀밭 사이에 끼어든 탈주범들의 안도에 들뜬 촐싹거림으로, 자전거로로 분할되어 사실상 북로가 끝나버렸던 그 지점에 도착할 때까지, 여바란 듯이, 충분히 멀리 나아갔다. 

  자전거 표지판이 재림하면 두 차례 모두 부인한다. 우리는 자전거족이 아니니 더 쌈박한 다리를 찾아 남로로 건너기를 희망한다. 아니다. 우리는 당연히 아직도 모르는 중이다. 저 북서쪽으로 휘어 보이는 자전거로만이 유일하게 남로를 향할 수 있는 경로라는 것을. 청운교는 고고하게 닫힌 기둥 위에 떠 있고 곧이어 경인아라교까지. 설명을 요구할 수 없는 저 높다란 봉쇄. 희망찬 걸음이 이내 탄식에 걸려 버렸을 때야말로 말단을 오므려놓은 고가 교량의 발톱 따위 문명적 친절의 정수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교차로로 다시 되돌아간다. 이번에야말로 자전거로에 대한 세 번째 부인을 안 하기 위해서다. 

  자전거로는 이내 동남향으로 급하게 커브 지면서 청운교와 이어진다. 바로 이때가 쉽게 포기되지 않는 논리적인 판단에 유머가 조금씩 스며들다가 생각을 빼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의 진실을 알게 된 때다.

  검암역의 그 다리를 본받으라 그리고 그 이상 파격적으로 다루어라 요구당한 그러나 더 왜소한 다리. 너무 가까워 솔직히 그냥 닿아버리겠어. 벽공에 하얀 솜털로 이루어진 저 아늑한 마을이 가진 이미지라고는 분명 거의 소모되었음이 분명했는데, 응결된 시간에 잠복해 있다가 타임슬립의 신호라도 받은 것처럼 나지막한 허공을 침입해 들어온다. 근래 각인된 바 있는 이미지가 영혼을 재가열하는 순발력은 조건반사적이다. 그런데 집중력의 변심으로부터 곧 죽어도 뽑혀 나와 사실적으로 완성된 구름 떼 정도야 그저 몇 시간 전을 본받는 수준이다. 그렇다면 파격적인 요구, 그 이상의 요구라고 하면 오늘자 두 번째로 다리를 건너면서 다리마다 필연적인 것이되 재현된 것은 아니어야 한다. 다리를 건너는 자들은 가까운 하늘과 재회하자마자 복제된 흥분으로 한껏 차올라 타이밍이 늘어진 것이다. 그 사이에 은밀하게 더 넓게 펴져나가는 식별의 욕구는 일단 방어된다. 그러나 암흑에 도달할 광점의 궤적은 임박해 있다. 잠들어 있던 데이터는 밝혀질 준비를 마쳤다. 명암경계선의 대기 상태는 그야말로 아주 맑고 깨끗하다. 사람의 시야라는 것은 충분히 좁혀졌다고 판단될 때가 사실 가장 넓은 법이다. 분명코 밝히게 되리라고 결심이 서기도 전에, 마치 극장 계단과 복도의 어수선한 어둠을 뚫고 영사기가 돌아가는 소리만 들려도 보이지 않는 스크린이 벌써 눈에 번쩍거리는 것처럼, 이제는 허용된 값을 한시도 거스를 수 없어 뱃길을 굽어본다. 혼신에 불을 밝힌 웅장한 수염고래의 척추가 비틀리는 대로 유연하고 맹렬하게 발광하는 저 광원체. 요구를 충족시키는 경이로운 법칙은 대저 황금의 법칙일 것이라. 검푸른 물결 위에 완전히.

  이 모습을 윤슬이라 어설프게 인식하지 말 것. 또한 이것은 피로한 여행자의 의무적인 감탄이나 기계적인 지각의 원인이 아니다. 이것은 수염고래의 멎은 야성, 다물어진 형이상학, 뜨겁고도 떨리는 불안에 맺힌 상이다. 한 시간가량 전부터 왼쪽 눈은 각막 화상을 입어 자질구레하지만 경멸적으로 빛나는 네모 하나가 눈 속에 새겨져 있었다. 5월에 들어서면서 자외선에 각막 상태가 안 좋아지고, 그야 퍽 신경 쓰이고 걱정되어, 주도면밀하게 네모만을 관찰하는 인간은 불안에 맺힌 특별함에서 거리낄 것 없이 초점을 풀어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불안한 심장이 구경하는 독특한 시야를 놓쳐버린 채, 좁쌀 만한 네모가 점령한 시각 사이에만 빈번히 존재했던 인간으로서 고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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