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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청기가 벤 검은 하늘에 수천 개의 — 스무 해에 해당하는 수천 일 만큼 어마무시한 — 감각으로 쪼개진 판단을 더한다. 하늘은 뿌연 잉크색. 따뜻한 바랜 검정. 점점 덜 뿌옇게 된 검정. 창백한 청회색. 더 선명해진 장밋빛 검정. 이제 하늘은 보라색에 가깝다. 거품처럼 건드리면 부서질 것 같은 불안은 강뿐만 아니라 저 위에도 있다. 연보라 빛 줄을 맞췄지만 다시 거기에서 달아나는 왕성한 구름 조각들. 구름은 여전히 스무 해 전의 것이라 그 인상을 두고서 어리둥절해했다. 이것이 바로 재현이 아닌 기억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인상조차 확인해야만이 인상에 대한 인상을 느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인상이란, 이 단계의 인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확인하고, 우리에게 확인시켜서 함께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안양천의 품에서 우리의 시각도 인상의 여정을 떠나게 된다. 안양천을 어떤 등반과 활강의 운동이라고 하고 그것을 규범적인 스포츠라고 할 때, 속도를 만들거나 위치를 점유하면서 운동에너지를 갖는 움직임의 주체도, 그 운동에너지가 도달하는 어떤 형태의 대상도, 각각은 이 스포츠에 대한 설명으로 살아남는다. 우리는 강에서 하늘로, 하늘에서 길로, 길에서 강으로 회전한다. 우리는 이 운동에너지를 따라 최대한 멀고도 둥글게 내려오면서 안양천의 골수 엘리트가 된다. 달리 보면 우리의 회전이 엄청나게 장엄한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그 밖에 있는 것이라고는 황량함 뿐이다. 그리스도를 잃은 초대 교회가 나아갈 세상처럼 비인간적으로 뻗은 그 바깥 공간들이야말로 장엄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인간적이고 분명한 인도를 입은 안양천이 적어도 저 전철역까지는 뻗어있지 않은가.
데크길 바로 아래는 물 투성이라 우리의 발들은 마치 텅 빈 중량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보라, 손쉬운 것을 혐오하고픈 안양천의 우승 후보자들은 이렇듯 다분히 천재적이다.
본능적으로, 이 밤에서 안양천 밖의 일들은 무용하다. 자신을 덜 좋아하게 만드는 잡념과 갑옷, 외부적인 탐색과 제한 등…. 특정한 관습에서 빌린 열정은 우리들 사이에 끼어들 수 없음을 이미 이해하고 있다. 비록 지금 안양천의 범위가 협소하다더라도 점점 광범위해져 그 마수가 닿지 않는 것이 없어 황량한 제로의 데이터는 벌벌 떨어야 할 것이다. 모든 요소들에게 떨어지는 강요는, 그 내용이 하나같이 안양천의 재료가 되라는 것이다.
어딘가에서 시작된 수상한 물줄기가 데크 아래쪽으로 깔린 널찍한 바위들 위로 흘러내려 강물의 일부가 된다. 어떤 물들은 숨었다가 다시 다른 곳에서 나올 수 있도록 존재하지 않은 척을 한다. 그들은 바로 옆에 혹은 차라리 불확실한 주변에 있으면서 소리를 흘린다. 없거나, 부동하거나, 무관심하거나, 배경처럼 반만 있거나 해도, 존재함과 가지는 엄밀한 상관관계 때문에 이 모든 가능성을 책임진다. 소리가 들리면 지금의 우리처럼 아래를 보고 놀라는 것이다. 이 물은 강이 흐르는 방향과 수직에 가가운 사선 방향으로 흐른다. 어디서 어디로, 우리는 이렇게 설명하길 좋아한다. 그러나 안양천조차 어디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서 호기심 어린 정적만이 답을 하고 있다. 말했듯 가능성에서 안양천으로, 수상한 물줄기와 우리는 일단 같은 대답을 가지고 있기로 한다.
지금 만나는 전부가 오직 안양천만의 재료가 되는 것, 이 무자비한 요구에는 한순간 너무나 특수하게 강조된 감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