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가계부는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24년 가계부 실전 후기#가계부의 쓸모#한 번의 젊음#인생 2막#나눔의

by 두번째지니

[에필로그] 두 번째 서른셋, 가계부의 쓸모에 답하다


분류기호: 199.1 (철학 - 삶의 지혜와 인생관)


매일 아침, 늘 꿈꿔오던 일상이 시작됩니다.

눈을 떠서 거실 커튼을 걷으면 눈부신 아침 햇살과 파란 하늘, 그리고 창릉천을 따라 달리는 사람들의 활기찬 풍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창문을 열면 제가 그토록 사랑하는 나무와 물 냄새가 거실로 밀려 들어옵니다.

3월21일우리집-삼송아이파크2차.jpg 오전 11시 저희 집 거실의 모습입니다

식물원이자 미술관인 집

제 인생 첫 집의 테마는 '식물원 & 미술관'입니다. 36개의 화분을 알뜰살뜰 돌보는 식집사로서, 제 취향이 듬뿍 담긴 10점의 그림을 곳곳에 걸어두고 매일 감상합니다.

하지만 우리 집에서 가장 비싸고 아름다운 명화는 다름 아닌 거실 창문 너머의 '하늘'입니다.

푹신한 소파에 누워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의 모양을 관찰합니다. 맑은 날은 맑은 대로, 흐린 날은 흐린 대로 하늘이 어쩜 이리도 예쁜지. 50년 평생 살면서 하늘을 이렇게 오래, 마음 편히 올려다본 적이 있었나 싶습니다.


꿈을 다 이루고 난 뒤의 우울

하지만 이 완벽한 평화가 찾아오기 전, 저는 뜻밖의 깊은 우울감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2023년 11월 무렵이었습니다.

'아들이 대학에 가고 나면 무조건 내 집을 사서 이사를 갈 텐데. 평생의 숙원과 꿈을 다 이루고 나면, 나는 앞으로 뭘 하고 살아야 하지?'

남들이 보면 배부른 소리라 하겠지만, 11월 특유의 스산함까지 겹쳐 제 마음은 한없이 심각했습니다. 예전에 다시 독서지도사로 일하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논술지도사 자격증과 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장이 이젠 필요 없어졌다는 사실은 무척 감사했지만, 나이 쉰에 도대체 무엇을 목표로 살아야 할지 막막했거든요.


그때 김미경 강사님의 《김미경의 마흔 수업(확장판)》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중위연령'이라는 개념을 만났습니다.

중위연령이란 대한민국 인구를 출생 연도별로 한 줄로 세웠을 때 가장 정중앙에 위치한 사람의 나이를 뜻합니다. 1994년에 통계청이 발표한 중위연령은 29세였는데, 2023년의 중위연령은 46세로 훌쩍 높아졌다는 겁니다. 30년 만에 무려 17년의 차이가 벌어졌으니, 당연히 우리의 생애 주기도 '재조정'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죠. 벌어진 중위연령의 격차만큼 현재 자신의 나이에서 17살을 빼보라고 했습니다.

50 - 17 = 33

순간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습니다.


두 번째 서른셋

저는 지금 '두 번째 33세'를 살고 있습니다.

저의 첫 번째 33세는 어땠을까요? 빚은 갚았지만 여전히 13평 다가구 주택에서 돈 한 푼에 벌벌 떨고, 사랑스러운 아들을 키우며 엄마로서는 행복했지만 온전한 '나'로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터널을 걷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두 번째 33세는 완전히 다릅니다. 성인이 된 든든한 대학생 아들이 있고, 무엇보다 제 휴대폰 연락처 목록에 더 이상 굽신거려야 할 '집주인'이라는 세 글자가 없습니다. 오직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삶을 통제할 수 있는, 완벽하게 자유로운 33세입니다.


한 번의 젊음을 어찌할 것인가

최태성 선생님의 《역사의 쓸모》에는 제가 참 존경하는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회영 일가는 조선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명문가로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도 얼마든지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지만, 그들은 전 재산(현재 가치로 약 600억 원)을 처분하여 서간도로 넘어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웁니다. 그 막대한 돈은 독립투사를 양성하느라 불과 3년 만에 바닥이 났고, 평생 쫓기고 탄압받던 이회영 선생님은 결국 예순여섯의 나이에 일제의 고문으로 순국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세운 신흥무관학교는 수많은 이름 모를 독립군들을 길러내며 무장투쟁의 거대한 뿌리가 되었죠.

서른 살의 이회영 선생님은 스스로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한 번의 젊음을 어찌할 것인가?"


그러자 예순여섯의 이회영 선생님이 대답했습니다.

한 마디 말이 아닌, 예순여섯 해의 일생으로 말입니다.


제 보잘것없는 이야기 끝에 그 위대하고 숭고한 분의 삶을 감히 이야기하는 것이 송구스럽지만, 저 역시 그분의 질문을 가슴에 품고 제 두 번째 33세를 살아보고 싶어 졌습니다.


그래서 2024년부터, 학교 밖에서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제가 제일 좋아하고 자신 있는 '한국사'를 가르치는 교육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가계부로 내 가족을 지켜냈듯, 이제는 내가 가진 지식으로 세상에 작은 쓸모를 더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가계부의 쓸모에 답합니다

그리고 몹시 쑥스럽지만,

"가계부의 쓸모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저는 '24년 삶의 결실'로 대답합니다.


이 연재의 서두에 저는 이 글이 '성공담'이 아닌 '생존기'라고 적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결국 운 좋아서 집 사고 돈 번 자랑 글 아니야?"라고 느껴질 수 있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듯 그 평가 역시 절반은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지난 24년의 민낯을 낱낱이 공개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제 글을 우연히 읽게 된 누군가가, 오늘 밤 문구점에서 작은 노트 한 권을 사 와 영수증을 붙이고 기록을 시작하길 바라는 마음. 그래서 훗날 그 기록이 그분의 인생을 조금씩, 그러나 완벽하게 바꿔놓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브런치에 글을 연재하기 위해 아주 오랜만에 24권의 가계부를 하나하나 넘겨보았습니다.

'품위 유지비' 꼼수에 웃음이 났고, 600원짜리 새우깡을 참아내던 그 밤의 서러움에 눈물이 났으며, 결국엔 내 삶을 지켜낸 제 자신이 너무도 장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처음엔 보잘것없어 보이는 매일의 지루한 기록이, 결국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분명 여러분 중 누군가도, 저와 똑같은 벅찬 감동을 경험하는 날이 올 것이라 굳게 믿습니다.


그동안 24권의 가계부 속에 담긴 저의 치열하고도 투박한 이야기를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매일매일이, 단단한 숫자 위에서 아름답게 빛나기를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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