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가계부 실전후기 #손글씨가계부#가계부는 명상#필사#기록의 힘
분류기호: 199.5 (수양, 처세)
최근 들어 시간 낭비를 줄이고 삶을 더 단단하게 다져보려고 '실물 다이어리(일기)' 쓰기에 도전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죠. 24년 동안 매일 밤 10원 단위까지 가계부를 썼던 저인데, 다이어리를 펼치면 그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고 펜이 나가지 않는 겁니다.
"나는 왜 숫자를 기록하는 건 쉬운데, 삶을 기록하는 건 이토록 힘들까?"
닫는 기록 vs 여는 기록
그 이유를 찾고 싶어 요즘 《기록이라는 세계》, 《쓰는 만큼 내가 된다》, 《쓰는 사람》 같은 책들을 연달아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책장 사이에서 제 답답함을 풀어줄 명쾌한 해답을 찾았습니다.
가계부는 철저히 '생존과 통제'를 위한 무기였습니다. 1,500만 원의 빚, 한정된 수입 안에서 가정을 지키기 위해 숫자로 명확한 울타리를 치는 작업이었죠. 예산이라는 정답이 있고, 식비, 교통비처럼 KDC 십진분류법에 맞추듯 항목이 딱딱 떨어집니다. 600원짜리 과자를 참으면 잔액이 600원 늘어나는 즉각적인 피드백도 주어집니다.
반면 다이어리는 '탐구와 확장'의 영역입니다. 정답도 없는 무한한 백지 위에서 모호한 감정과 시간을 마주해야 합니다. 생존을 위해 본능을 억누르며 '닫는 기록(가계부)'에 24년을 최적화해 온 제 뇌가, 갑자기 무한한 '여는 기록(일기)'을 하려니 엄청난 저항감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숫자들의 무덤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깨달음 끝에, 저는 문득 24년 치 가계부가 꽂혀있는 책장을 바라보다가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하나 놓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써온 종이 가계부는 결코 차갑고 건조한 '숫자들의 무덤'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스마트폰 앱이 1초 만에 원형 그래프를 그려주는 편리한 시대에도, 제가 굳이 펜을 쥐고 종이에 숫자를 꾹꾹 눌러썼던 이유는 그것이 제 널뛰는 욕망을 다스리는 일종의 '필사(筆寫)'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글귀를 베껴 적듯 지출 내역을 적다 보면, 돈이 빠져나갔다는 분노보다는 아쉬움과 반성이 찾아옵니다.
'오늘 스트레스받는다고 건강에도 안 좋은 떡볶이랑 튀김을 왜 그렇게 많이 먹었을까.'
하루를 돌아보며 후회하다가도, 다음번에 비슷한 충동이 일면 가계부의 그 페이지를 떠올립니다.
'그래도 미치도록 먹고 싶으면 그때 먹자'며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지하철 vs 캔커피
볼펜을 쥐고 가계부를 쓰는 시간은 가끔 아주 철학적인(?) 내적 갈등을 선물하기도 합니다.
어느 날은 차비가 아까워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를 땀 뻘뻘 흘리며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목이 너무 말라 기어코 편의점에 들러 시원한 캔커피를 사 마시고 말았죠.
밤에 가계부를 적으며 펜을 든 채 생각에 잠깁니다.
'이럴 거면, 설탕이 잔뜩 든 캔커피를 마실 바엔 그냥 시원하게 지하철을 타는 게 낫지 않았나?'
하지만 이내 긍정적인 회로가 돌아갑니다.
'그래도 두 정거장을 걸었으니 운동한 셈 치자. 내 몸에 좋은 일 한 거잖아.'
이 귀여운 갈등들은 결국 저를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이끌었습니다. 한동안 이 캔커피 딜레마를 겪고 난 뒤, 저는 무더운 여름날 두 정거장 정도를 걸어갈 일이 생기면 아예 집에서부터 텀블러에 시원한 (설탕 없는) 커피를 타서 나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실물 가계부라는 거울이 없었다면, 저는 영원히 지하철 대신 (몸에 안 좋은) 캔커피를 사 마시며 돈과 건강을 동시에 흘려보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입니다.
가로 40cm x 세로 27cm x 너비 20cm 공간
처음 종이 가계부를 쓰기 시작하면, 매일 밤 나의 얕은 인내심과 마주해야 하는 그 시간이 꽤나 고통스러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낯선 불편함에 익숙해지는 순간, 손끝으로 전해지는 사각거림은 나를 점점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강력한 명상이 됩니다.
요즘 미니멀라이프가 대세라며 종이와 물건을 줄이는 분들이 많습니다. 매년 가계부가 쌓이면 짐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년에 단 한 권입니다. 제가 24년 동안 지독하게 써온 가계부 24권을 다 모아도 가로 40 cmx세로 27 cmx 너비 20cm 공간에 넉넉히 들어갑니다.
작은 공간에 모여 있는 24권의 가계부는 저의 24년의 청춘이자, 수만 번의 욕망을 다스려온 치열한 필사의 흔적이며, 13평 다가구 주택에서 오늘의 자산을 모을 수 있게 해 준 저의 '가장 완벽한 일기장'이었습니다.
거창한 다이어리 앞에서는 저처럼 여전히 작아지셔도 괜찮습니다.
오늘 밤, 스마트폰을 잠시 내려두고 빈 노트와 펜을 꺼내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 내 마음이 흔들렸던 숫자들을 천천히 필사해 보세요.
그 작은 사각거림이 당신의 내일을 어떻게 바꾸어 놓는지, 단 한 분이라도 꼭 이 경이로운 기적을 경험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