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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우 Dec 02. 2022

차가운 겨울 일지, 따스한 겨울 일지

- 2부 : 어쩌나 보니 신나게 놀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을.

크게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면서 도전을 한답시고 여차 저차 해서 그나마 법학 석사 논문을 끝내면서, 4년간의 고시공부도 함께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그다지 쓸모가 없던 석사학위와 함께 나에게 남은 건 한 겨울에도 꾸준히 도서관까지 꾸역꾸역 뛰면서 얻어낸 좋은 습관, 매일 5km 이상 러닝 루틴이다. 


아는 사람은 알 테지만, 서울대 입구부터 도서관 넘어서까지 뛰는 게 만만한 것이 아니라 등록해 둔 헬스장에서 벤치 프레스 등등 근육 운동을 한 후 머신에서 뛰어도 좋으나 역시 날이 좋을 땐 야외 러닝을 따라올 청량감이 없다.


이 글을 쓰는 오늘도 거의 2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오전 러닝을 하며 드는 생각은 그나마 이 루틴이 없었다면 조금은 힘들고 우울했을 지난 몇 개월을 버티기가 좀 더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힘차게 뛰다가 개똥을 모르고 밟았다. 자기 강아지 똥은 좀 치우고 가시오!)


매일 뛰는 코스 - 국립중앙박물관 둘레길 / 이 깨끗한 길 한편에 어느 견의 응가가 있었다


그렇게 계약 해지 통보를 받고 한 달이 지난 뒤, 예정되어 있던 만큼 어느 정도 당당했던 "하얀 손(白手)'이 된 나는 계획만큼은 이것저것 야심 차게 세웠었다. 


백수라는 말은 본디 사주에서 비롯된 것인데, 무자본 혹은 무자산이며 일이 없는 사람을 뜻하지만 난 버젓이 집도 있고, 좋은 차도 있고 능력 있는 와이프에 귀염 지존 딸까지 있는데 뭐가 백수냐고 스스로 위안하면서 이제 정말 내가 원하는 일, 평생 지속할 수 있는 어떤 사명을 찾아 가보리라 하면서 기껏 인터넷과 책을 뒤지는 일에만 열중했다. 


그러다 마침 다가온 여름휴가철에는 몇 년 만에 풀린 하늘길을 놓칠 수 없어 냉큼 Guam으로 달려가 실컷 여름을 즐기고 왔고 시간이 넉넉하니 딸과 많이 놀아주면서 국내여행도 여기저기 많이 다니며 무슨 돈 많은 은퇴자처럼 신나게 놀게 되었다. 


괌은 역시 스노클링과 SunSet Beach / 대관령 하늘목장 - 파란 하늘 하얀 구름

나이가 좀 들어 안식년을 맞은 이런 느낌으로 쉬다 보니 처음에 가졌던 활활 타오르는 의지가 평안함으로 바뀌어 매일 골프 연습에 와이프와 맛난 저녁식사, 밤마다 드라마 시청 등등 정말 지금 생각해도 한심하게 보일 수도 있는 한량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간 해보지 않았던 여러 가지 시도들을 꾸준하게 하고 여기저기 교육도 들으러 다녔는데 생전 해보지도 않은 장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스마트 스토어'와 관련된 강의 몇 개를 들으며 사업자 등록증, 통신판매업 신고, 식품위생교육 등등을 다 준비하고 정작 물건은 한 개도 팔지 못했다.


유명하다는 자기 계발서는 서점에 서서 읽어보고 중요한 부분들을 캡처해놓고 되새기듯 보았으나 항상 이런 종류의 책들은 뜬구름을 잡는 느낌만 주는 터라 실제 적용을 어찌하라는 건지 알 수가 없는 터였다. 


여러 가지 사업 아이템을 구상하며 그에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래 봐야 몇 명 되지는 않지만) 커피샾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사업장에 가서 구경도 해보면서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엿볼 

기회도 가졌다.


최대한 놀면서 공부 아닌 공부, 준비 아닌 준비를 해보니  이제까지 '강의 준비 - 강의 - - 운동 - 강의 준비 - 강의 -집'의 패턴으로 살아왔던 나의 삶이 얼마나 위태할 정도로 단조롭고 안이하고 타성에 젖어있던 것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신나게 놀러 다니고, 그 와중에 관심이 생긴 대상에 시간을 쏟아부어보는 일상이 오히려 똑같았던 이전 일상보다 더 바쁘고 빠르게 흘러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생각보다 훨씬 활동적이며 새로운 것을 탐구하고자 하는 나 자신에게 조금은 놀랐던 듯하다. 

(정작 본인은 스스로를 무슨 골방에 틀어박힌 학자 같은 느낌으로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그러면서 과연 나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하게 느꼈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고 결국 그렇게도 벗어나고 싶어 했던 강사 생활 속에 본질적인 핵심 가치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롯데 콘서트 홀 - 영화음악 서머 페스티벌 : 공연장에서 음악 듣다가 머릿속이 이렇게 정리되었다면 믿어지는가? 


'아이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다면 좋겠다. 


하지만, 현실을 고려하고 상황에 맞추어 방향을 제시하는 정도여야 하겠다. 


무조건 정해주고 그쪽으로 달려가라 하면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친구들이 있지 않을까? 


 같은 방향을 향해있으나 스스로의 속도와 그에 걸맞은 방식으로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도록 


도와주는 그런 사람이었을 때 나는 행복했구나 '



단순히 영어에 관한 내용적 지식을 전달할 때뿐 만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문득문득 그들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와 

그 미래를 위해 현재에 해야 할 노력들, 그리고 추구할 수 있는 행복한 목표에 관한 대화를 나눌 때 초롱초롱 빛나며 기뻐하던 그 모습들을 볼 때 나는 가장 스스로 가치 있다 여기지 않았나 돌아보게 되었다.


갑자기 장사꾼이 되거나 (열심히 노력하면 될 수도 있겠지만) 해보지도 않던 비지니스 미팅을 해봐야 머릿속으로 '해야 하는 일'이 될 수는 있어도 '스스로를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일'이 되기엔 파장이 틀렸다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이런 하나의 발견이 다는 아니겠지만 결국 본질적인 나의 가치를 찾아내지 못하고 피상적인 가치에 부합하는 어떤 일을 시도했을 때 그것은 무의미하며 또 다른 유의미한 발견을 하기 위해 지속적인 자기 탐구가 어떤 방식으로든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벌써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젠장, 심오한 척 자기 발견이나 하고 있기엔 너무 시간이 빠르게 가고 있다고!  그래도 내가 가장인데. 


이제 뭐라도 시작해야만 했다. 


- 3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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