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미안해~"
벌써 오래된 일처럼 느껴지지만 2016년 겨울 어느 날, 결혼 3년 만에 우리 부부에게 정말로 사랑스러운 딸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만삭의 아내를 볼 때마다 한 여성이 엄마가 되어가는 과정은 정말 위대하고 신비로우며 아름다운 여정이라는 것을 느꼈던 시기입니다.
이래저래 배의 무게로 인해 허리와 골반이 아파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힘들게 출근하는 모습을 보면 다 큰 남자가 눈물이 핑 돌정도로 안쓰러운 마음도 컸기에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았지만 말이죠.
여느 때처럼, 늦은 퇴근을 하고 들어와 보니 힘든 몸을 이끌고 회사에 다녀온 아내가 소파에 앉아서 배를 어루만지고 있었어요.
"오늘은 어땠어? 몸은 좀 어때?"
"응, 오늘은 좀 더 배가 땅기고 조금 아프네."
"아직 예정일이 며칠 남았으니까 일단 한 번 누워서 잠을 청해볼까?"
하지만, 30분쯤 지나 그래도 병원에 한 번 가보는 게 좋겠다며 아무런 준비도 없이 주섬주섬 옷만 걸쳐 입고 도착한 병원에서 "바로 입원하셔서 출산 준비하셔야겠습니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죠.
새벽 2시에 이제껏 준비한 출산 당일 용품들과 제정신은 집에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그저 간호사분들의 말씀들만 귀에서 윙윙 맴돌 뿐이었습니다.
다행히도 그렇게 길지 않은 시간 진통을 하고 드디어 저희 딸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탯줄을 자르고 아기를 처음 안았을 때의 그 감정은 경험한 사람들끼리만 공유되는 종류의 것일 겁니다.
양가 어르신들이 모두 도착하시고 나서 급히 집에 물건들을 가지러 다녀온 과정이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빠가 되어있었던 거죠.
밤마다 아기띠를 매고 잠을 재우고, 조금 커서 이유식을 직접 새벽 늦게까지 손수 만들어 먹이고 때론 아픈아기때문에 속상해하기도 하며 아이는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라서 이제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조금씩 말을 하기 시작할 때였던가요, 너무 많이 잔소리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지지야~ 만지지마!” ”거기는 올라가면 안돼!“
“이걸 먹어야 건강해지는거야~~”
백희나 작가님의 '알사탕'이라는 책과 뮤지컬이 있는데, 주인공 소년의 아버지가 잔소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사건건 수많은 잔소리들로 자칫 피곤스러운 사람으로 보일 수 있으나 속마음을 듣는 알사탕을 먹고 나면 수천번의 '사랑해'를 외치는 아빠의 속마음을 알게 됩니다. (어린이 뮤지컬 처음 보러 갔다가 폭풍 눈물을 흘렸었죠. 꼭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혹여나 더러운 바닥에서 무언가 만질까, 위험한 곳에 올라가 떨어지진 않을까, 수많은 걱정들 속에 말을 듣지 않으면 가끔 무섭게 혼도 내고 혼자 삐져서는 심통 난 얼굴로 딸을 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주체할 수 없을 때도 있는데 왜 그랬을까요.
아이가 점점 더 자기표현을 잘하는구나 생각되던 어느 날인가, 그날도 화내는 저의 모습을 조심히 살피며 '눈치'를 보는 딸의 흔들리는 눈빛을 처음 마주했을 때 갑자기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듯하더군요.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구나!‘
하지만, 쉽사리 고쳐지지 않은 채 빈도만 좀 덜해졌을
뿐이었어요. 저도 나름 고집, 아니 아집이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평소 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아내도 어느 날엔가 이렇게 말을 해주었습니다.
"가끔씩이지만 당신이 애한테 그렇게 잔소리를 많이 하고 말 안 듣는다고 화내면 점점 사이가 멀어진다, 조심해. 남이 말하면 좀 들어.“
생각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왜 나는 아이에게 화를 내는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강요하는 마음.
아직 어린아이니까 부모로서 통제하고 싶은 마음.
피곤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많이 알아주길 바랐던 마음.
이것들만이 이유는 아니었을 겁니다.
이제 어느 정도 컸으니 이렇게 말해도 되겠지라는 잘못된 기대감도 있었던 것 같고 습관처럼 몸에 밴 생각들에 위배되는 딸아이의 행동이나 말들에 순간적으로 심하게 반응한 것도 있었습니다.
티격태격하던 중 어느 날엔가, 딸아이에게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라고 말하는 순간, 이내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울음을 터뜨리며 '이랬던 거 저랬던 거 다 섭섭했어!'라고 칭얼대는 딸의 모습을 보며 '정말 사랑스러운 눈빛으로만 대해줘야지, 뭐든지 다 이해하려고 노력해야지'라는 마음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날 이후로, 아주 조금씩이지만 잔소리도 덜 해보려 하고 뭔가 화가 조금 날 듯하면 참고 다른 방식의 표현을 해보려고 애쓰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좀 더 부드럽고 상냥한 말투와 표정, 진심으로 공감하려는 관심의 집중 그리고 무엇보다 '미안해, 사랑해'라는 말을 더 자주 하려고 애썼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저도 화내거나 짜증내지 않는 제 자신이 좋아지기 시작했죠.
지금은 딸이 아주 가끔 말하곤 합니다.
"이제 아빠는 화 안 내니까 똥꼬 120점!"
왜 120점인지, 아이들은 '똥꼬'란 말을 그리 즐겨 쓰는지 잘은 몰라도 예전의 그 못난 아빠와는 조금 멀리 떨어진 듯하여 정말 안심이 됩니다.
잘못된 저의 태도가 반복이 되어 아이가 느꼈을 여러 감정에 대한 미안함과 자책감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지금도 못난 아빠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온몸을 바쳐 신나게 놀아주고,
아이의 말을 경청하고
그 눈높이에서 이해하려 애쓰고
무엇보다 이제 그저 어린아이가 아닌 인격체로서
제대로 된 존중을 해주어야겠다는 마음가짐을
다시 또 다잡아 봅니다.
못난 아빠가 미안해, 앞으로 더 사랑할게.
2023년 2월 16일에 쓴 반성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