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히 아픈

슬기로운 명절이란

by 오행시

어떤 상태가 되어야 '지독히 아프다'라고 할 수 있을까?


남들에게는 황금 같은 연휴, 31일 하루만 휴가를 쓰게 되면 9일은 내리 쭉 쉬게 된다. 밤새워 좋아하는 유튜브를 보거나 친구들과 어울려 게임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때가 아닐 수 없다. 좀 더 금전적 상황이 허락된다면 어디 동남아 휴양지라도 훌쩍 가버릴 수 있는 시간, 이렇게 다양한 쓰임새가 있는 귀한 시간이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두 발로 활보하게 된 시간은 고작 연휴가 시작되던 첫날, 대형 마트에서 장보기를 할 때뿐이었다. 다음날 오전, 물건을 정리하며 대충 음식 준비를 마치고 나자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웬만해서는 허리나 팔다리 통증을 못 느끼는 나에게 갑작스러운 경고였다. 잠시 쉬면 나아질 것 같아 남편에게 뒷 일을 부탁하고 방에 들어가 누웠다. 생각했던 시간은 1시간 남짓이었지만 정작 내가 일어난 시간은 오후 5시를 넘기고 있었다. 몸살이었다. 병원도 약국도 지정된 기관만 운영되는 온전히 앓아누워야 하는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을 간신히 먹고 집에 있는 종합 감기약을 털어 넣고 일찌감치 또 자리에 누웠지만 몸 상태에 비해 정신은 왜 그렇게 온전한지. 잠이 오지 않는다. 오늘따라 더 유난하게 들리는 남편의 코 고는 소리. 잡이 비틀고 싶지만 나를 대신해 저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해줬다는 이유로 면죄부를 허용한다. 설마 오늘만 넘기면 괜찮겠지. 그동안 크게 앓은 적 없이 꾸준히 운동하고 몸관리를 했다고 자부한 나인데. 이깟 몸살쯤이야 못 견딜라고. 오지 않는 잠 탓에 쓸데없는 생각으로 온 밤을 지새웠다.


까무륵, 새벽 다섯 시쯤 잠이 들었나 보다. 감기에 걸리면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는 대처법을 충실히 따르느라 잠은 오지 않지만 물은 연신 마셨댔다. 덕분에 화장실만 들락날락거리다 잠도 못 자고 몽유병 환자처럼 떠돌다 지쳐 잠든 거였다. 당연히 몸과 정신상태가 엉망이었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주섬 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방을 나설 차례인데 그만 침대로 가서 엎어졌다. 심한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몸은 세상의 중심처럼 가만히 있는데 온 정신과 주변 사물들이 돌고 있었다. 아, 어떡하지? 내가 꾸물거리는 걸 봤는지 남편이 부스스 일어나 상태를 묻는다. 어지럽다 말하니 남편은 더 누워있으라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


남편 덕에 무사히 아침상을 차렸다. 두 딸 내외와 손주, 작은 집 식구들까지 평소보다 세배가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잠깐 누워있던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 돌아다닐 만 해졌다. 아픈 티를 내면 안 되겠다 싶었지만 다른 이들에게 피해가 될까 봐 마스크를 쓰고 지냈다. 모처럼 모였기에 반가웠지만 내 눈은 자꾸 시계만 쳐다봤다. 그렇게 보고 싶던 내 손주도 제대로 안을 수 없으니 즐거움마저 무료하게 느껴졌다.


12시 전에 원래 식구를 뺀 나머지가 각자 집으로 향했다. 나는 모든 것들을 뒤로 미룬 채 침대로 돌아와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병원을 방문한 것은 그다음 날, 회사에는 병가를 신청했다. 도저히 출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병원은 생각보다 한적했는데 독감은 아니라고 했다. 다만 목에 염증이 많으니 항생제 치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주사를 맞고 한 뭉텅이의 약을 받아왔다. 그렇게 남은 3일을 나는 약과 잠으로 보냈다.


한 고비를 넘기고 나서 든 생각은 '이제 나도 나이를 먹는구나.'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오십이 훌쩍 넘은 지금, 이렇게 아파본 적이 거의 없다. 뭐가 문제인지 곰곰이 생각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것은 그저 면역체계의 이상? 나이 듦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고 나대고 다닌 결과? 정도랄까. 지독히 아프고 나서 겨우 마음을 잡은 것은 '멈추지 않고 운동'이었다.


아프다는 핑계로 움직임을 피해왔다. 바깥바람이 해로울 수 있다는 나름의 예방책이 실은 구질구질한 변명이었다. 요가 학원도 벌써 이주일 채 가지 않고 있었다. 잔기침이 약간 남아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미루면 안 되겠다 싶었다. 수업 예약을 하고 퇴근 후 요가원으로 갔다. 단지 이주일 정도 빠진 것인데 몸이 무겁다.

간신히 동작을 따라 하고 드디어 사바아사나의 시간, 바닥에 내던진 몸에 살짝 열감이 생긴다.


우리말 '아프다'의 어원이 '앓다'라고 한다. '앓다'의 본 뜻에는 '서글프다, 구슬프다, 애달프다' 등이라고 한다. 긴 명절을 앞두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모이지만 쌈박하게 할 줄 아는 음식도 없고 배달을 시키자니 '엄마'라는 자존심이 허락되지 않는 그런 감정들이 몸의 앓음으로 왔다. 몸의 앓음은 일상이었던 운동을 떨궈냈고, 명절 상차림은 과잉노동으로 남았다. 차라리 애호박 전을 포기하고 스쾃 100개를 했더라도 어땠을까.


이 정도 아픈 것을 아프다고 할 수는 없지만 며칠 앓고 나니 이제는 머리 쓰는 것보다는 내 몸을 어떻게 쓰는 지를 고민할 때라고 인정하게 됐다.

작가의 이전글방(Room)의 총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