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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행시 Oct 30. 2022

40대 그 남자의 품격

당신은 조직을 위해 태어난 사람

 사람들은 그를 두고 조직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했다. 밥을 먹을 때나 길을 걸을 때나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는지. 그를 옆에서 보면 마치 철학자같았다. 대화를 해보면 거의 모든 순간이 일과 조직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었다. 그런 고민들이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업무와도 직접적으로 적용되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9급 공채임에도 이미 40대에 5급 승진을 했다. 업무 경험도 풍부하고 워낙 지적 욕구가 강한 사람이라 야간 대학도 다니고 주요 보직을 섭렵하고 다녔다. 이번에는 우리 부서 과장이었다.  

   

 나는 무서웠다. 그는 크고 네모난 얼굴, 굵은 입술은 늘 굳게 닫혀있었다.  좀처럼 웃지 않는 표정에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내가 7급으로 막 승진했을 무렵이니 아무래도 직급 차이도 있고 그런 카리스마 넘치는 과장님을 가까이서 본다는 것은 두려움과 호기심의 동시에 들락날락했다.


 더 어려웠던 것은 중요한 기획안의 결재가 통과되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단 초안이 올라가면 과장님이 부른다. 그는 담당자에게 이 계획의 의도를 설명해 보라고 했다. 더듬더듬 계획 내용을 이야기하면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했다. 소위  ‘뜬구름 같은 이야기였다. 차라리 빨간펜으로 동그라미를 그려가며 설명해 주든지, 아니면 한글로 타자를 쳐서 문서로 만들어 주든지 하면 좀 쉬웠을 텐데 그는 그러지 않고 장황하게 계획의 의도와 실행 가능성을 담으라고 했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었다. 팀장도 과장을 어려워하는지 나서지도 않고 그렇다고 기획서의 안을 수정하거나 대신 작성해 주지도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팀장도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러니 오로지 담당자가 과장의 의도를 파악해서 맞춰야 했다.      


 그의 이상은 높았지만 직원들은 그의 생각을 따라잡기 어려웠다. 당장 앞에 놓인 문제도 해결방안을 찾지 못하는데 먼 훗날 일어나지도 않는 사태까지 고려하면서 꼼꼼하게 계획서에 담아야 했으니 보고서 작성이 쉬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었다. 그의 명령 스타일을 익히면서 그가 담으라고 했던 철학과 가치를 집어넣으려고 했다. 너무 나가면 마치 소설 같았고, 너무 간단명료하면 군대언어처럼  딱딱했다. 그래도 선임들의 잘 만들어진 보고서를 커닝해가며 간신히 따라잡고 있었다. 덕분에 정말 아주 가끔은  빈약한 칭찬도 받았다. 하지만 나는 두려움은 쉽게 해소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흠잡을 데 없는 유능한 관리자'라고 했지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직원들에게  그다지 친절하지도 자상하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유능함 속에 사람에 대한 측은지심은 없는건가?


몇달 후 이 일이 있고 나서 내가 사람를 너무 섣부르게 판단했음을 알았다.


 여름이 지나고 느닷없이 동아리 회장이 영어 연극을 하자고 했다. 그것도 다음 달 월례조회 시간에 직원들 앞에서 공연하는 조건으로 말이다. 여기저기 불만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곧바로 연극 연습에 돌입했다. 2년 전부터 한창 동아리 열풍이 불었고 나는 영어동아리에 가입되어 있었다.     

 

 공연은 춘향전의 영어 버전이었다. 중요 장면만 극화해서 영어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퇴근 시간이면 대회의실에 모여 대본을 읽고 무대 동선을 결정했다. 맡고 싶은 배역이 있었지만 소심한 성격에 나서지 못했다. 무엇보다 비주얼이 보태주지 않았다.     


 처음 공연을 한다했을 때는 그렇게 열심히 나오던 멤버들이 날이 갈수록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본격적으로 배역이 정해지자 나를 포함한 나머지는 할일이 없는 거였다.

연습조차 시들해질 무렵 회장이 긴급 소집을 요청했다. 나는 잔무가 있어 늦게 참석했는데 꽤나 심각했다. 공연을 포기해야 한단 얘기까지 나왔다. 회장은 연극은 주인공만 있다고 되는게 아니니 각자 역할을 맡아달라고 했다.


 솔직히 나도 작은 배역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낙점이 안되어 심통이 나 있기도 했었다. 그런데 회장의 말대로 모두가 무대에 올라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때 누군가가 자기는 간식을 담당하겠노라고 했다. 나는 물품 담당 스텝을 자처했다.


거의 모든 동아리 회원들은 보직을 정했다. 의상 담당, 메이컵, 대본 연습 도우미, 주인공 대타까지, 우리는 바빠서 오지 못하는 회원들 몫까지 챙겨가며 한 달간 맹연습을 했다.

    

몇달 후  연극은 성황리에 끝났다. 맨 앞줄에서 연극을 관람하던 시장님이 직원들의 기량이 뛰어나다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는 말을 들었다.


 무대에 오른 동료들은 연극이 끝난 이후에도 관심과 시선을 늘 받았다. 은근히 부러웠다. 나도 잘할 수 있었을 텐데, 무대에 섰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그런그런 아쉬움이 오랫동안 남았다.       


 며칠 후 과장님과 팀 전체 회식이 있었다. 식사 도중 자연스럽게 영어 연극 얘기가 나왔다. 내 앞자리에 앉아 생선회를 연신 먹던 동료가 나에게 물었다.    

 

 “주사님도 영어 동아리라며? 근데 한 번도 안 나오데, 왜? 얼굴에서 잘렸나?”     


 지금이라면 성희롱이니 차별이니 하며 걸고넘어질 일이었지만 오래전이었다. 그냥 뭐라고 씨부려도 대충 넘어가는 분위기. 조금 껄렁한 사람들은 '뭐 그렇다고 하지요.' 하면서 웃어넘길만한 일이었다.


 웃어넘기고 싶었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적당히 '네'하고 눈을 아래로 깔았다. 상 가운데 놓인 부르스타 에는 매운탕이 나 대신 바글바글 끓고 있었다. 희멀건 동태 눈알이 곧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내가 영어 동아리였다는 사실조차 말한 적이 없었는데 그가 알고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데 연극에 얼굴 한 번 안 나왔다고 말하는 저 인간은 도대체 일은 안 하고 사람 뒷조사하는 게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무슨 큰 잘못이라도 들킨 사람처럼 얼굴까지 빨개졌다.


 그때 과장님은 씩 한 번 웃고는

 "아, 연극 날 애썼으니 내가 한 잔 주지." 하셨다.


 나는 과장님도 나를 놀리나 싶었다. 연극에 나오지도 않았다는 것을 재수 없는 인간이 폭로했는데 뭘 수고했다고 술을 주신다는 건지. 그래도 직급에서 밀리니 소주잔을 병 밑에 들이밀었다.


 술을 반쯤 따르고는 "못 마시면 내려놔도 좋다."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뭐야, 술도 못 먹는 것을 알면서 굳이 술을 주는 이유는 뭘까? 그 짧은 시간에 별별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과장님은 턱을 들어 고개를 삐딱하게 비틀고는 뭔가를 생각하는 사람처럼 말을 하기 시작했다.

      

 “연극들 참 잘하더구. 딱딱한 공무원 조직에 그런 창의적이고 자발적인 동아리 활동은 좋은 윤활유가 되지."

  주변에 있던 팀장과 팀원들이 과장님 말씀이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그렇기도 하겠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내 마음이 자꾸 삐딱해지고 있었다.


 "아, 그런데 말이야, 여보게들은 오 주사가 연극에 나오지 않았다고 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어. 장면이끝날 때마다 누군가 무대에 조용히 올라가 물건을 치우더라고. 처음엔 알아보지 못했지. 그래서 장면이 끝날 때마다 자세히 살펴봤는데 그래도 식구라고 알아보겠더라고. 불도 없이 깜깜한 무대로 올라가 물건을 집어 나른다는 것이 그게 쉽지 않은 일이야. 고생했어."


 요즘 연극 배우들은 자기 역할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무대 세팅을 하거나 아예 대놓고 애드립을 쳐가며 소품을 치웠다. 우리야 뭐 아마추어 초보 연극팀이니 알 리가 없었다.


 과장님의 훈시가 일단 여기까지 일단락되자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이어 과장님은 다시 말을 이어가셨다.


"사람들은 항상 메인을 기억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게 있어. 이 연극을 하는 목적은 영어 실력을 높이기 위해서도 있지만 동아리 회원의 결속력을 높이는 면도 있지. 그러니 소품을 줍는 일이 주인공보다 낮은 일이라고 감히 누가 얘기할 수 있겠나?"


 알고보니 연극연습 초반에 우리 동아리 회장을 과장이 우연히 만났다고 한다. 월례회의를 주관하는 과장으로서 의례히 진행상황을 물었는데 회장이 그만둘까 라고 했다고 한다. 이유는 주인공만 나오고 다른 이들은 비협조적이라 어렵다는 거였다. 거시서 우리 과장이 회원들이 각자 모두 참여할 수 있도록 역할을 줘서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도록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뭐야, 이 분, 마치 영화의 한 대사를 읊듯, 한 마디 막힘없이 매끄럽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나는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얼른 과장님이 주신 소주 반 잔을 홀딱 털어 넣고 동태살을 집어 먹었다.


 무대 스텝, 따지고 보면 허드렛일이었다. 나이도 있고 영어도 나름 한다고 생각했는데 무대 청소나 하는 사람으로 전락했으니 아무리 자청했어도 자존심이 상했었다.


 연극이 있던 날 평소 입지 않던 옷을 입고 고개도 한번 쳐들지 않았었는데 과장님은 용케 알아본 거였다. 평소 일만 시킬 줄 알지, 사람에 대한 관심은 일도 없는 줄 알았다.


 반전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훌륭한 언변으로 나를 무시한 재수 없는 인간에게는 시원하게 어퍼컷을 날려주고, 부끄러움에 풀이 죽은 나에게는 용기를 주고 있었다.


 그 이후에도 과장님은 주인공도 좋지만 조직은 나 같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을 눈여겨보아야 한다고 했다. 급기야는 그런 사람이 인재라는 말까지 했다. 졸지에 나는 '인재'가 되어 있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아마 누군가의 마음속에는 반박이 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과장님은 특유의 진지한 카리스마를 안주삼아 소주 세 병을 너끈히 해치웠다.


이미 퇴직하신 지 십 여년은 족히 넘었다. 그럼에도 나는 이 분을 내가 만난 사람 중 최고의 리더라고 생각한다.


나는 가끔 쉽게 해결되지 않는 일들, 사람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갈등이 있을 때 그때의 일을 떠올린다. 지금은 세대가 다르고 행정환경도 너무 달라졌다. 하지만 리더에게는 어떠한 부서원이든 차별 없이 넓게 품어 줄 수 있는 포용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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