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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행시 Oct 30. 2022

40대 그녀, 때로는 불행한 일이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TV를 즐겨보지 않게 된 것이 아마 이삼 년은 된 것 같다. 뉴스가 가장 재미있다고 느껴지면 나이가 들은 거라는데 내가 그랬다. 드라마나 쇼 프로그램에 별로 구미가 당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8시, 9시 정각에 맞춰 등장하는 낭랑한 목소리의 아나운서 멘트가 청각을 자극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대화 주제에 드라마가 등장했다. 여성 시청자가 주 고객인 드라마가 남녀를 불문하고 직장인의 일상 대화 속 주제가 된지도 오래되었고 주말 내내 몰아보는 시간이 쏠쏠하다는 지인들도 늘어났다.  

 

 조금 일찍 퇴근한 목요일, 저녁식사를 마치고 채널을 돌리다 한창 인기몰이 중이라는 드라마를 찾았다. 의사들의 생활을 다루고 있었다. 드라마의 흐름은 고요하고 따뜻했다.     


 아기를 간절히 원하는 부부가 있다. 하지만 산모의 상태가 좋지 않다. 결국 23주를 버틴 아기는 세상 구경을 하지 못했다. 산모를 담당했던 의사는 안타까운 마음이었지만 누구보다 상처를 입었을 산모에게 긴 메시지를 보낸다. 그중 한 문장이 클로즈 업 되었다. 

    

 ‘Bad things at times do happen to good people’     

 ‘때때로 불행한 일이 좋은 사람들에게 생길 수 있다.’     


 원래 이 문장은 산부인과 전공의 교과서 첫 장에 있다고 한다. 드라마 장면에도 너무나 잘 어울렸지만 오늘 낮에 만난 김밥집 사장님 하고도 잘 맞는 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 시청 게시판에 ‘지역 집단이기주의’라는 제목으로 긴 글이 올라왔었다. 내가 관할하는 동네였다. 부끄러운 면모가 드러나는 이야기였지만 참 잘 쓴 글이었다. 실제 경험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쓸 수 없는 설움과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얼마나 억울하면 그랬을까? 궁금해졌다.      

    

 점심 장사를 끝냈을 오후 3시경 슬슬 걸어 가게로 갔다. 글의 내용처럼 '쓰레기 무단투기 금지 안내판'이 있었지만 주변은 아주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출입구에 두꺼운 비닐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입구는 좁은데 커튼이 너무 촘촘하고 무거워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몇 초간 커튼을 잡고 흔들고 있으니 앞치마를 한 여자가 나와 커튼을 젖혔다.     


 파리가 들어올까 봐  두껍게 했다는데 사람도 들어오기 힘들 정도로 철저하게 차단되었다. 가게는 다섯 평 남짓 아담했다. 꽃을 좋아하는 건지 벽마다 마른 꽃을 장식해 놓았고 선반 위에 있는 화병에 꽂혀 있던 형광색 스킨답서스가 바닥을 향해 가지를 길게 뻗어내고 있었다.      


 때가 지나서인지 손님은 없었다. 여인은 단정한 쇼트커트 머리에 큰 눈을 가지고 있었다. 마스크에 가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젊어 보였다. 뜬금없는 방문에 잠시 당황한 듯하더니 대뜸 왜 왔냐며 방어적인 자세로 물었다. 홈페이지 게시판을 보았노라고 했다. 여인은 허공을 향해 긴 한숨을 내뱉더니 잠시 침묵했다.       

  

 어색해졌다. 괜히 벽에 걸린 마른 꽃을 가리키며 파는 거냐고 물었다. 한때 서울에서 플로리스트를 했었다고. 성실하고 열심히 살았지만 40대 중반에 들어 생각지도 않는 어려움이 닥쳤다.  살아보려고 했지만 생각만큼 회생이 어려워 오랜 서울 생활을 접고 연고지도 아닌 지방 소도시로 내려왔다고 했다. 


 조용하고 한가로워 보이는 작은 도시의 한 귀퉁이, 읍내 한복판에 자리를 잡았다. 경험이 많지는 않았지만 원래 음식점을 하던 자리 그대로 인수받았고 이사 오기 전 인터넷과 주위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은 이 동네는 유서 깊은 원도심 길목이었다. 근처에 관공서도 있었고 단독주택도 꽤 많았다. 서울의 변두리보다 못한 상권이었지만 큰 욕심 없이 성실하게 일하면 자립할 수 있을 것 같아 큰 마음먹고 둥지를 틀었다. 


 그러나 가게를 열자마자 생각지도 못한 사태가 시작되었고 지난 일 년 동안 하루도 편할 날 없었다. 문제의 발단은 쓰레기였다. 가게 출입문 왼쪽이 이쪽 구간 쓰레기 집합 장소였다. 음식점 바로 옆이고 위생을 생각하면 눈에 거슬리지 않을 수 없었지만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그것까지는 주인도 받아들이기로 하고 대신에 더욱더 가게 앞 청소에 신경을 썼다.      


 그런데 이 동네 누구도 종량제 봉투에 생활폐기물을 내놓거나 음식물 쓰레기를 규격화된 용기에 담아 내놓지도 않았다. 그저 이것저것 마구 섞여 담은 쓰레기를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아무 때나 던져 놓았다. 밤마다 고양이나 들쑤셔놓은 덕에 다음날은 비닐봉지는 다음날 아침 고약한 냄새와 지구상에 있는 모든 파리들까지 모여 초대형 파티가 벌어졌다.   

      

 그녀는 줄기차게 청소를 하고 줄기차게 시청에 민원을 넣었다. 명색이 음식점인데 파리 한 마리의 접근도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독한 세제를 써서 청소를 하는 것도 하는 것도 하루 이틀, 그리고 행정기관에서 치워가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시청에서 직원들이 주민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고 계도를 했지만 주민들의 쓰레기 투척은 여전했다. 변화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우스웠다.  


  참다못해 여인은 쓰레기를 버리는 주민들을 지켜보다가 종량제 봉투 사용을 요구했다. 이렇게까지 사정하면 조금은 이해해 줄줄 알았다. 정말 많지는 않지만 1퍼센트의 가망이라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심한 욕설과 비방이었다. 그동안 아무런 문제 없이 버려왔던 쓰레기를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면서 불편하게 만들었다고 몇몇 노인들이 동네 사람들까지 선동하고 나선 것이다.         


 못 버리게 한다는 이유였다. 자신들이 뭘 잘못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단속 카메라가 있었지만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버린 사람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은 나오지 않았고, 설령 적발되어 과태료를 부과해도 '내지 않고 버티면 없어지는 소소한 벌금'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근본적인 대책이 없다 보니 민원이 생기면 청소과에서 후딱 치워준 것도 화근이었다. 여인은 공정하지 않은 행태를 문제 삼았다. 자신은 종량제 봉투를 사용하고 음식물 찌꺼기도 제시간에 내놓는다. 상당히 수고로운 일이지만 그래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웃들은 코웃음을 쳤다. 오히려 규정을 지키는 그녀를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여인이 쓰레기 수거장소를 변경해달고 요청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또 지역주민들의 반발이 일어났고 여인을 향한 힐난이 심해졌다. 지나가는 노인이 느닷없이 가게에다 대고 손가락질을 하며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욕까지 내뱉었다. 힘들게는 살았지만 남에게 그런 험한 말까지 들으며 살지 않은 여인에게는 충격이었다. 불면증에 울렁증까지, 제대로 영업을 못하니 매출은 바닥이고, 가게를 얻으면서 받은 대출금 이자는 쌓여만 갔다.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고민 끝에 경찰서에 고발장까지 접수한 상태였다.   

      

 물론 저쪽 상대의 이야기도 들어야 하겠지만 굳이 해명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되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장면이다. 사건사고의 핵심은 늘 규정을 잘 지키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와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정기관은 규정을 잘 지키는 자의 편에 서서 합당한 처분을 내려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먼저 새로운 쓰레기 수거장부터 해결되기 어려웠다. 아무도 제 집 앞에 수거장 설치를 허락하지 않았고, 도로는 골목길 수준이라 차량 교행도 어려울 만큼 좁았다. 자주 치워주는 수밖에 없었지만 여인은 종량제 봉투를 사용하지 않는 이들을 왜 그냥 놔둬야 하는지를 문제 삼았다. 한 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서너 차례 눈물을 쏟아내던 주인장은 후반부로 갈수록 투사의 모습으로 변했다.      


 어쩌다 사업실패로 이곳까지 왔지만 남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얻어먹고 살지는 않았다고. 그래서 이제는 더 잃을 게 없으니 싸워보겠노라고. 사회 질서를 지키지도 않으면서 수시로 인격모독을 일삼는, 그리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이웃을 상대로 법의 준엄한 판단을 지켜보겠다고 했다.       


 지금보다 더 좋지 않은 일들이 발생할 수도 있어 ‘참으시면 안 될까요?’라고 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내가 관할하는 동네가 시끄럽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 지극히 공무원스러운 생각만 주장하는 꼴이었다. 하면 안 될 말이었다. 정말로 그녀를 생각한다면 그 지역을 책임지는 공무원으로서의 역할을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 내키지는 않지만 내일은 주민들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들도 서운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시간이 꽤 흘렀다. 김밥을 주문하러 손님이 들어왔다. 그녀는 재빨리 일어나 김밥을 포장해서 손님에게 건넸다. 손님이 나가고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입구의 묵직한 버티칼 커튼을 밀고 나서는데 그녀가 혼자 말하듯 말했다. 

 "저는 계속 싸울 거예요."


 '몸과 마음이 더 힘드실 텐데 그만두시면 어떻겠어요?'라고 또 말하려다 참았다. 그녀는 지난 일 년 동안 수없이 생각해 왔을 것이다. 싸움을 멈추려고 했다가도 다시 실망감에 복받치는 설움으로 싸움을 시도하고 다시 갈등하고 그런 시간을 지금도 보내고 있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첫 부분에 “남을 비판하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이 점을 명심해라.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너처럼 유리한 위치에 놓여있지 않다는 걸.”     

 내가 그 입장이 아닌 이상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될 것 같았다.

 

 녹음이 짙어지기 시작한 칠월 초, 벌써 찾아온 더위에 사람들은 지쳐 보였다. 돌아서 나오는데 여인이 공손하게 인사를 한다. ‘규정을 지키는 자’에게서 나오는 품위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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