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행시 Oct 30. 2022

20대 그녀에겐 시간이 필요해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에게 ”

딸의 이름을 써놓고 한참을 망설였다. 뭐라고 써야 하지?

모니터 속 커서가 1초 단위로 깜짝인다. 신경은 쓰이는데 자판기 위에 손가락은 쉽게 움직여지지 않는다.


“지난 일요일 아침을 기억하니?”도전적이지만 말끝을 돌리고 싶지 않았다.     

 아침밥을 먹고 산행을 준비하는 우리 부부는 먹기 싫다는 딸애를 기어코 깨워 식탁에 앉혔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일정을 이야기하던 중 딸애가 친구를 만난다고 했다. 그 친구는 딸애의 고등학교 친구로 가장 친한 사이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했다.      


 같이 시험을 준비했던 딸애는 몇 달 전 원하는 시험에 합격했지만 친구는 아직도 몇 년째 시험에 매달리고 있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사정이 달라지면서 둘 사이가 서먹해지는 느낌이라고 딸애가 말했다. 이 때다 싶어 우리 부부는 평소에 나눴던 이야기를 꺼냈다.      


 고등학교 때 야간학습이 끝나면 우리 차로 몇 번 데려다주면서 알게 된 그 친구는 차분하고 성실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필요한 공부를 하지 못하는 것 같다며 우리 부부는 친구에게 약간의 고시원 임대료를 지원해 주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딸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편과 나는 거의 결정된 것처럼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이어갔다. 친구가 부담스러워 할 수 있으니 딸애가 주는 걸로 하면 어떻겠냐는 등 그래도 자존심에 상처를 입을지 모르니 조심스럽게 의향부터 물어보고 빌려주는 걸로 하면 된다. 정 찜찜하면 합격한 다음에 갚으면 되지 않냐고 낄낄대며 웃기까지 했다. 여기까지가 여느 가정집 정겨운 식탁 풍경이었다.


 갑자기 내 두 눈앞에 춤추듯 튕기쳐 오르는 숟가락을 보고 웃음을 멈췄다. 숟가락의 주인이 잔뜩 성이 난 표정으로 우리 부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만하라고” 딸애는 소리까지 지르며 울고 있었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남편과 나는 수저질을 멈추고 딸애를 바라봤다. 놀란 남편이 안 하면 되는데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그런다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딸애는 자기 친구를 너무 무시하는 우리 부부가 혐오스럽다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우리는 너무 놀라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적이 흘렀다. 어이가 없었다. 뭘 잘못했지?   우리는 말없이 식탁을 치웠다. 짐을 꾸리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산 아래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와 걷기 시작했다.     


 “여보, 우리 애가 아픈 거 같아.”


 남편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딸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 오르지도 않았는데 몸이 무거워져 있었다.      


 산행에서 돌아오니 딸애는 친구를 만나러 가고 없었다. 내일이면 딸애는 직장 때문에 서울로 올라간다. 지금 가면 여름휴가나 되어야 볼 수 있다. 피곤한지 남편은 잠이 들었고 11시가 넘어 들어온 딸애는 말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지금 이대로 가면 딸애의 벌어진 틈을 메울 수 없을 거란 불안함이 스쳤다. ‘이래서는 안 돼’ 늦은 밤, 나는 컴퓨터를 켰다.     


 생각해 보니 딸애가 느닷없이 화를 냈던 게 이번만이 아니었다. 대학교 4학년 때 아르바이트 문제로 나와 심하게 다툰 적이 있었다. 2년 전 한참 공부 중일 때 여행 이야기를 꺼냈다가 아빠와 한바탕 했다. 최근에 농담으로 던진 결혼 이야기에 발끈 해진 딸이 한밤중에 우리 방문을 벌컥 열고 엉엉 통곡을 해서 깜짝 놀란 일도 있었다. 지난 일들을 되새겨보니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었다. 자음과 모음을 찾는 손가락이 떨려왔다. 어디로 갈지 몰라 허둥거리는 손가락을 바라보며 나는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여백을 메워나갔다.     


 1993년 5월 봄 가뭄이 심한 해였다. 두 번의 유산으로 몸과 마음이 허약했던 나는 이번만큼은 조심해야지 하는 양가 식구들의 보호 아래 딸애를 순산했다. 세상의 많은 엄마들이 그랬던 것처럼 첫 아이의 출산은 세상을 얻은 것 그 이상이었다. 다행히 아이는 무럭무럭 잘 자랐다. 예민하고 신경질 적인 면이 있었지만 워낙 귀하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 3년 뒤 태어난 여동생과도 여느 집처럼 잦은 싸움과 보이지 않는 경쟁, 때로는 동맹을 맺어가며 잘 지냈다. 그 흔한 사춘기 질풍노도도 느낄 수 없을 만큼 순탄한 십 대를 보내고 큰 애는 대학에 들어갔다.     


 ‘꽃 다운 나이’를 일컫는 이십 대 초반, 큰 애에게 찾아온 것은 얼굴에 피기 시작한 ‘열꽃’, ‘여드름’이었다. 도자기 피부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큰 애의 피부는 맑고 고왔다. 그런데 대학 1학년 2학기가 되면서 아이의 피부 트러블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번지고 있었다. 피부과를 다녀보고 집에서 손수 천연 재료로 만드는 등 공을 들여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방에서는 음식이 중요하다고 해서 달고 짜고 매운 음식은 삼가고 물이 좋다고 해서 하루 2리터의 물도 마시게 했다. 좋아질 거라는 기대감에 아이는 하라는 방법을 곧잘 따라 하고 잘 견뎌 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몇 주가 지나면 아무 수용이 없었다. 아이가 걱정스러운 나머지 가기 싫다는 피부관리실에 끌고 가 치료를 받은 후 더 벌겋게 달아오른 딸애의 얼굴을 보고 관리사의  머리털을 뽑아버리고 싶었다. 큰 애는 울고 또 울었다. 그런데도 시간은 잘 흘렀다. 딸애는 대신 취업이라는 고민에 빠졌고 한동안 공부에 몰두하느라 피부에 대한 고민은 내려놓은 듯했다.     


 시험에 합격하고 딸애는 첫 직장이라는 곳에 발을 디뎠다. 행복해 보였다. 모든 게 완벽했다. 피부 트러블도 요즘 화장품이 좋다 보니 풀 메이컵을 하면 몰라볼 정도로 화사하고 예뻤다. 나는 그저 딸애의 여드름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심할 때는 살짝 걱정이 되었지만 딸애도 말로는 ‘신경 쓰지 않아’라고 해서 정말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줄 알았다.


 일종의 ‘회피’였다.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처음 만난 사람까지 쉽게 다가오는 말들, ‘피부가 민감하시네요’, ‘피부만 좋으면 엄청 예쁠 것 “같아요.’, ‘이런 피부에는 ○○이 좋다던데.’ 이렇다 저렇다 걱정이나 위안처럼 흘러 들어온 단어들이 오히려 생채기를 내고 있었다. 더구나 나는 어른이라는 이유로 이것저것 훈계를 일삼았다.      


 ‘더 불쌍한 사람도 있는데 그까짓 피부야 안 좋으면 어때?’

 ‘호르몬이 왕성해서 그러니 나이 들면 괜찮아져.’


 20대 팔팔한 청춘이었다. 지금 예쁘고 싶은데 나이 들면 좋아진다니, 그런 무책임한 말들이 어디 있는가? 딸애에게 네 마음을 너무 몰라 주었다는 말로 정리했다. 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딸애의 이메일에 편지를 넣고 자리에 누웠다. 이 편지마저 아이에게 상처가 되면 어떨까? 보낸 편지를 다시 회수해야 할지 말지 잠시 흔들렸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다.     


 다음날 딸애는 서울로 출발했다. 출근시간이라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나는 도착하면 이메일을 보라는 말로 잘 가라는 말을 대신했다. 그날 밤 나는 답장을 받았다.     


 ‘엄마 보세요’로 시작하는 한글 문서는 13포인트 글자에 2장을 채우고 있었다. 오랜 기간 얼굴에 난 좁쌀 여드름 때문에 겪어왔던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감. 심해진 날엔 어디도 가고 싶지 않고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아 대인기피증까지 왔던 때. 남과 비교를 통해 얻어지는 자괴감과 수치심. 딸애는 그동안 꼭꼭 숨겨왔던 자신의 속마음을 한 자 한 자 쏟아놓았다. 10여 년을 그렇게 혼자 끙끙 앓으며 살아왔다는 말에 나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당신의 딸은 이렇게 폐허인데 친구나 걱정하고 있으니 얼마나 위선이라고 느꼈을까?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대부분 속마음보다는 훤히 보이는 겉모습을 보고 판단한다. 첫 대면에 모르는 척 행동해도 ‘저 사람은 피부가 왜 저럴까?’라는 시선을 딸애가 모를 리 없다. 처음에는 화가 나고 창피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지만 대부분 상대는 크게 의식하지 않고 말하기 때문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생각만큼 행동은 따라주지 않았다.


 ‘수많은 노력과 시도에도 한 번도 맑은 얼굴을 가져보지 못했다’라는 말에 가슴이 아파왔다. 그 기쁨을 허락하지 않은 잔인함에 분노가 가슴 밑바닥부터 차곡차곡 침잠했으리라.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닌데 아이는 그렇게 흉내 내듯 지내 왔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내 편지를 읽어서가 아니라 이미 그날, 일요일 아침 그 일이 있은 후 자신도 뭔가 잘못되어 감을 직감했다. 엇나가는 자신을 보며 처음에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지금이라도 똑바로 봐야겠다고 했다.    


  셀프 카메라 촬영을 엄청 좋아하는데 여드름이 유독 심했던 때는 사진 자체를 멀리 했던 몇 년 전의 일들. 그래도 그나마 있던 과거 사진 속에 자신의 모습은 해맑게 웃고 있더라는 이야기를 하며 여드름이 청춘을 훔쳐갔다고만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는 것을 처음 보았노라고. 금방 좋아지지는 않겠지만 다스려 보겠다는 말로 아이는 매듭을 지었다.      


 그리고 가족들이 좀 더 조용히 지켜봐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편지는 단숨에 읽혔지만 긴 여운을 남겼다.

‘잘 자요 엄마’라는 끝 문장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그동안 딸아이에게 얼마나 많은 비난과 비아냥을 남발했던가? 부모로서 가벼운 농담이었든 때로는 진지한 대화였든 아이에게 들려줄 필요는 없었다. 그저 인정하고 지켜봐 주었다면 아이도 마음이 편했을 텐데, 집에 있는 내내 그래 주지 못했다.       


 이제 혼자서 자기 길을 가는 아이, 누구보다 단단하고 꿋꿋한 마음이 필요하겠지. 이런저런 생각에 시간을 보내는데 어느새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캄캄한 터널 같은 내 마음에 조금씩 빛이 스며든다. 나도 좀 자야 할 것 같다.

이전 01화 20대 그녀, 당당하게 스테이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